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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이야기==
 
==관련 이야기==
 
일제 강점기 시데 때 한용운은 오세암이라는 절에 머물며 대장경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에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했다는 설이 있다.
 
일제 강점기 시데 때 한용운은 오세암이라는 절에 머물며 대장경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에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했다는 설이 있다.
 
==내용==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가르침을 암송의 방법에 의하여 작성한 결집이다. 고려 고종 때 불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판수가 8만여판이고, 8만 4천 번뇌에 법문이 수록되었다는 뜻에서 붙은 별칭이다.
 
  
 
==기여자==
 
==기여자==
 
[[박민선]]
 
[[박민선]]

2022년 6월 15일 (수) 13:11 판


개요

불교정전의 총칭으로 부처님의 가름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이다. 1889년 고종 원년 남호 스님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복사한 두 개의 복본을 만들었으며, 그 중 하나가 설악산의 오세암이란 절에 보관된 것이다. 이는 '설악산 오세암 경각 중건기'와 '해인사 고적 인성 대장경' 에 기록되어 있다.

옮기는 과정

대장경을 옮길 당시 동해에 상서로운 바람이 서서히 불고, 신령한 거북이 앞뒤에서 호위했다 하며, 50개의 소나무로 만든 궤에 넣어져 운반되었다 한다. 그리고 육로에서는 소로 옮겼는데, 소가 불교에서는 거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관련 이야기

일제 강점기 시데 때 한용운은 오세암이라는 절에 머물며 대장경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에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했다는 설이 있다.

기여자

박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