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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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춘당지.jpg|섬네일|250px|'''춘당지'''(왕이 농정(農政)을 살피던 곳)]]|| 춘당지(春塘池)는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으로 본래 이 곳은 임금이 농업(農業)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이를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일본식(式) 정원을 만든 것이다. 광복 후(後)에는 이 위를 떠다니는 케이블카가 개통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한국식 정원으로 다시 개조되었다.
 
|[[파일:춘당지.jpg|섬네일|250px|'''춘당지'''(왕이 농정(農政)을 살피던 곳)]]|| 춘당지(春塘池)는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으로 본래 이 곳은 임금이 농업(農業)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이를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일본식(式) 정원을 만든 것이다. 광복 후(後)에는 이 위를 떠다니는 케이블카가 개통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한국식 정원으로 다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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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경궁 대온실_1.jpg|섬네일|250px|'''대온실'''(식물원)]]|| 대온실은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파일:창경궁 대온실_1.jpg|섬네일|250px|'''대온실'''(식물원)]]|| 대온실은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 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유산 중 하나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 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유산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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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2018년 12월 7일 (금) 08:45 판

사건1

파일:창경궁동물원1.jpg 일제시대 때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기 위해 창경궁내의전각들을 허물어 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궁궐안의 나무들 역시 기존의 나무들을 베어낸 후 벚꽃나무를 심었다. 창덕궁과 바로 붙어있는 궁궐이기도 한다. 지도를 보면 창경궁과 종묘사이에 도로가 보인다. 원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없었다. 이것 역시 일제가 이를 갈라놓기 위해 설치한 도로이다.

건축

궁문 권역

궁문권역 설명
홍화문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향이며,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2층으로 된 목조 건물로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궁궐 대문으로서의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은 1484년(성종 15)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 8)에 다시 지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이전에 홍화문으로 나가 양반 및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경청하였고,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세 쌀을 나누어 주었다.

월근문
월근문(月覲門)은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북쪽에 있는 문으로 대문과 작은문이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문은 정조 임금이 친부(親父)인 사도세자의 묘(廟)를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년)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러 갈 때에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가야 했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지었다 한다.
선인문
선인문(宣仁門)은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에 위치한 문(門)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8년)에 재건이 되었는데,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소실되어 1877년(고종 14년)에 복원한 바가 있다. '동궐도'를 보면 현재의 월근문(月覲門)과 같은 솟을지붕과 유사한 외관을 취하고 있었으나 2번째 복원 때 지금의 모습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 의하면 선인문(宣仁門) 부근에서 장조(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운명했다고 한다.

집춘문
창경궁의 동북쪽에 있는 집춘문(集春門)은 관덕정 북쪽, 성균관과 창경궁 사이의 담장에 난 궁문으로 성균관과 마주 보이는 곳에 있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균관으로 행차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과 이어진 길을 없앰으로써 쓸모가 사라졌으나 2008년 성균관과 잇는 길을 종로구에서 복원하였다. 현재, 집춘문의 외부 지역에는 민가(民家)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出入門)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정전 권역

정전권역 설명
명정문
명정문(明政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출입문이다. 명정문은 홍화문과 같은 동향(東向)을 하였는데, 명정전(明政殿)으로 이어지는 동서(東西)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향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었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다.
명정전(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政殿))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제 1의 전각(殿閣)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이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어 임진년의 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再建)되어 현재까지 이르렀고,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처음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어진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궐이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단층이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품위를 갖추었다. 명정문과 행각이 조정에 둘러싸여 있다.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齎室)로도 쓰였다.


편전 권역

편전권역 설명
문정전(국왕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文政殿)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향(東向)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南向)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 는 찾아보기 어렵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경우도 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리어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 자리로 이용되었다. 1984년부터 발굴 조사를 한 후,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숭문당(군신(君臣) 간의 학문이 교류되던 곳)
숭문당(崇文堂)은 창경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로 된 팔작기와집으로 경종 때 건립 되었다. 1830년(순조 3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에 중건한 것이 오늘날의 '숭문당'의 모습이다.

명정전 뒤쪽에 있는 빈양문의 남쪽에 맞닿은 전각이다. 현판과 내부에 걸린 일감재자(日監在滋)라 쓴 게판은 영조가 쓴 것으로 학문을 숭상하는 뜻답게 당시 영조도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하였고, 이곳에서 왕이 친히 학생을 접견하여 시험을 치거나 때로는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였다.


침전 권역

침전권역 설명
경춘전(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
경춘전(景春殿)은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왕비의 침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에서 측면 4칸으로 된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1484년(성종 15년)에 세워졌으며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 당시 소리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다시 복원하였고 오늘날 까지 이른다. 지금의 현판은 순조대왕이 쓴 것이다.

이 경춘전(景春殿)은 소혜왕후(성종대왕의 모(母))한씨와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곳이자 정조대왕과 헌종대왕이 탄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환경전(대장금이 중종대왕을 진료한 곳)
환경전(歡慶殿)은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에 소실된 것을 1616년에 재건하였다.

환경전은 침전임에도 불구하고 용마루가 있다. 중종이 이 전각에서 붕어하였으며, 세자 시절의 광해군, 광해군의 세자, 소현세자 등이 거처하였다가 소현세자(인조대왕의 맏아들) 사후(死後) 1652년(효종 3) 14세 까지 승선군(인조의 서자 중 장남)도 머물렀다.

조선시대의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불만이 많았으나 중종의 대장금에 대한 신뢰가 깊어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통명전(장희빈의 저주가 이루어진 곳)
통명전(通明殿)은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으로 팔작지붕을 한 전각이다.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南向)으로 위치한 전각으로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 또한, 중종과 명종비의 빈(정1품 후궁)의 처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을 갖추고 있다.

통명전(通明殿)은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었으나 이괄의 난(亂)과 정조대왕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모습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된 것이다. 장희빈(숙종대왕의 부인)이 복위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死體) 등을 통명전에 주위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다.

양화당(통명전 옆 접대 공간)
양화당(養和堂)은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 건물이다. 현판은 순조대왕의 어필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인조대왕이 환궁을 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철인왕후(철종비)가 1878년(고종 15)에 이곳에서 운명하였다.

영춘헌과 집복헌(후궁들의 처소, 정조대왕의 독서실 겸 집무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의 북쪽에 위치한 침전 건물이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이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여지지 않았고,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영춘헌(迎春軒)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한 것이다. 집복헌(集福軒)에서는 사도세자(정조의 父)와 순조대왕(정조대왕의 子)가 탄생했다. 또한, 정조대왕은 순조대왕을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集福軒)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迎春軒)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기타 권역

기타권역 설명
빈양문
빈양문(賓陽門)은 명정전(明政殿)을 돌아나와 만날 수 있는 명정전의 후문(後門)이자 창경궁의 침전권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중앙간의 지붕이 솟아있는 솟을지붕 형식이다. 명정전 후면(後面)에 설치된 가설한 툇마루부터 양문까지 복도각이 쭉 연결되어 날씨가 궃은 날에도 편히 왕이 행차를 할 수 있게 배려한 곳이다.
함인정(사랑방 같은 정자(亭子))
함인정(涵仁亭)은 창경궁의 정자 중 하나로 환경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또한, 빈양문을 지나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건물이며, 내밀한 침전권역으로 가기 전에 거쳐갈 수 밖에 없는 건물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대왕이 문무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동궐도에는 함인정(涵仁亭)의 서쪽과 동쪽에 벽체를 둘러 막혀 있지만 현재는 사방이 트인 모습이다.

관덕정(문무의 정신을 담은 곳)
관덕정(觀德亭)은 활을 쏘던 정자(亭子)로 1642년(인조 20)에 지어졌다. 건립 당시에는 취미정(翠微亭)으로 불리다가 1664년 현종 때 관덕정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앞쪽의 넓은 터는 군사 훈련장과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다. 정자 뒤로는 단풍 숲이 우거져서 여러 임금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전해진다. 집춘 문은 관덕정 북쪽 담장에 난 궁문으로 문묘(文廟, 또는 성균관)가 마주 보이는 곳 에 있다. 역대 임금들이 문묘로 나갈 때는 이 문을 이용했다.

춘당지(왕이 농정(農政)을 살피던 곳)
춘당지(春塘池)는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으로 본래 이 곳은 임금이 농업(農業)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이를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일본식(式) 정원을 만든 것이다. 광복 후(後)에는 이 위를 떠다니는 케이블카가 개통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한국식 정원으로 다시 개조되었다.
대온실(식물원)
대온실은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 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유산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