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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96년(건양 원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환궁[3]을 경운궁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건 공사를 명하여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연히 임금이 머물 정식 침전 역시 필요했고 그에 따라 1897년(건양 2년) 함녕전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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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덕수궁은 빈 궁궐이 되었고,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들이 팔리거나 헐렸다. 광명문은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양 옆 행각이 철거당했다. 그리고 1938년에 일제가 미술관[5]을 개관하면서 건물 자체를 미술관의 남쪽으로 옮겼다. 이 때 벽체와 문짝을 다 뜯어버렸다. 그리고 신기전 기화차와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를 보관 및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수십 년을 그 모습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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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2018년 6월부터 그 해 말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이전하고, 없어진 벽체와 문짝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에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준공 기념행사'를 열어 일반에 개방했다. 이로써 광명문은 약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건하면서 기와도 공장제에서 수제로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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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8일 (일) 15:30 판

광명문사진.jpg

기본정보

개요

광명문 光明門 (光明 : 밝음을 맞다)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다.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되었다가 1930년대에 석조선 서관 남쪽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의 문화재를 전시하였다. 2018년 80여 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함녕전 남쪽으로 옮기고 없어졌던 문과 잡상 등을 복원하였다. 현재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중이다.

건립시기·연도

1897년 (창건) / 1904년 (중건) / 1938년 (이건) / 2019년 (이전 복원)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관련 영상

역사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잠시 머물던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이후엔 왕들의 흔적이 서린 즉조당과 주변 몇 채 정도만 뺀 나머지 건물들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어있었다.
그러나 1896년(건양 원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환궁[3]을 경운궁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건 공사를 명하여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연히 임금이 머물 정식 침전 역시 필요했고 그에 따라 1897년(건양 2년) 함녕전을 건립했다.
이 때 함녕전만 지은 것이 아니고 당연히 주변에 에워쌀 행각과 문도 같이 세웠다. 함녕전의 남쪽 행각을 이중으로 만들었고 바깥 행각에 정문을 지었으니 이것이 광명문이다.
건립한 지 불과 7년만인 1904년(광무 8년)에 함녕전 온돌을 수리하다 대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고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1919년에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덕수궁은 빈 궁궐이 되었고,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들이 팔리거나 헐렸다. 광명문은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양 옆 행각이 철거당했다. 그리고 1938년에 일제가 미술관[5]을 개관하면서 건물 자체를 미술관의 남쪽으로 옮겼다. 이 때 벽체와 문짝을 다 뜯어버렸다. 그리고 신기전 기화차와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를 보관 및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수십 년을 그 모습으로 있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현판의 색마저 바뀌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였던 것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변했다. 이것은 문화재청에서 2016년에 본래 모습대로 복원해 교체했다.
문화재청은 2018년 6월부터 그 해 말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이전하고, 없어진 벽체와 문짝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에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준공 기념행사'를 열어 일반에 개방했다. 이로써 광명문은 약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건하면서 기와도 공장제에서 수제로 교체했다.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