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성보문화재)
(성보문화재)
48번째 줄: 48번째 줄:
 
*보물 제1460호
 
*보물 제1460호
 
{| class="wikitable"
 
{| class="wikitable"
| '''링크'''
+
| '''이칭별칭'''
| colspan="4" | https://vo.la/TxGjR
+
| colspan="4" | 흥청사 동종
 
|-
 
|-
| 자료 분류
+
| 제작시기·일시
| colspan="4" | 기록유산/전적류/목판본
+
| colspan="4" | 1462년
 
|-
 
|-
 
| 자료 명칭
 
| 자료 명칭

2021년 6월 11일 (금) 12:30 판

개요

흥천사는 조선 태조임금이 신덕왕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6년에 착공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된 절이다.


흥천사 위치

지도를 불러오는 중...

찾아오는 길

찾아오는 길 흥천사 img.jpg

  • 지하철/버스

4호선 또는 우이신설 경전철 성신여대입구역(6번출구)에서 22번 마을버스 승차 후 돈암2동 주민센터 흥천사에서 하차

  • 자가용

성신여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아리랑고개 방면 500m 직진 후 모당약국 삼거리에서 좌회전 300m 직진

  • 셔틀버스

성신여대입구역(4번출구) 앞에서 흥천사 셔틀버스 이용


성보문화재

흥천사 동종(興天寺 銅鍾) )
  • 보물 제1460호
이칭별칭 흥청사 동종
제작시기·일시 1462년
자료 명칭 묘법연화경 권3~4, 5~7 (妙法蓮華經 卷三~四, 五~七)






흥천사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1894년 작성된 ‘흥천사사십이수관세음보살불량시주’ 현판 기록에 따르면 19세기경 부터 흥천사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1450년 전후 티베트계 관음보살상과 가장 흡사하고 당시 조성된 장신 계통의 보살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길고 세장한 관과 얼굴, 신체, 손과 손가락 등 장신의 늘씬한 양식을 대표하는 보살상이라고 한다. 특히 뛰어난 작품성을 감안했을 때 국가장인이 조성한 뒤 왕실사원인 흥천사에 봉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세상에 현존하는 4점의 42수 천수천안관음보살상 중 하나이므로 그 희귀성은 물론 조선 초기 신앙 경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42수 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신앙이 많이 됐지만 상으로 남아있는 예는 굉장히 드물고 또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서는 흥천사 42수 관음상이 유일하다.






흥천사 대방(興天寺 大房)


865년 흥선대원군이 직접 시주하고 모연하여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직접 현판까지 적었던 전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도에는 본전인 법당 정면에 누각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흥천사에는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누각 대신 대방(큰방)이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인 능찰(陵刹)에서 보이는 가람배치이다. 대방은 H자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였으며, 전면은 겹처마의 2익공(翼工)집이고, 측면과 후면은 민도리집으로 구성하였으며, 전면양끝에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평면 구성을 보면, 몸체에 해당하는 중앙부 가운데는 대방 8칸이 있고, 그 앞뒤에 퇴칸이 놓여 마루를 구성하며, 대방의 좌측에4칸 크기의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작은 방과 헛간이 달려 있다. 따라서 누각과 방사와 법당과 숙소 및 부엌의 기능까지 합친 종합적인 다용도의 공간으로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의 건립 시기는 사중에 보관 중인 현판 기문(京畿右道楊州牧地三角山興天寺寮舍重創記文)을 근거로 고종 2년(1865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안내

  • 이용시간

일출시~일몰시


  • 입장료

무료


  • 문의 및 안내

02-929-6611~2


  • 홈페이지

http://www.heungcheonsa.net/

참고문헌/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