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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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7일 (금) 05:28 판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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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1

파일:창경궁동물원1.jpg 일제시대 때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기 위해 창경궁내의전각들을 허물어 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궁궐안의 나무들 역시 기존의 나무들을 베어낸 후 벚꽃나무를 심었다. 창덕궁과 바로 붙어있는 궁궐이기도 한다. 지도를 보면 창경궁과 종묘사이에 도로가 보인다. 원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없었다. 이것 역시 일제가 이를 갈라놓기 위해 설치한 도로이다.

건축

궁문 권역

궁문권역 설명
홍화문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향이며,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2층으로 된 목조 건물로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궁궐 대문으로서의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은 1484년(성종 15)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 8)에 다시 지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이전에 홍화문으로 나가 양반 및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경청하였고,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세 쌀을 나누어 주었다.

월근문
월근문(月覲門)은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북쪽에 있는 문으로 대문과 작은문이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문은 정조 임금이 친부(親父)인 사도세자의 묘(廟)를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년)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러 갈 때에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가야 했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지었다 한다.
선인문
선인문(宣仁門)은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에 위치한 문(門)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8년)에 재건이 되었는데,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소실되어 1877년(고종 14년)에 복원한 바가 있다. '동궐도'를 보면 현재의 월근문(月覲門)과 같은 솟을지붕과 유사한 외관을 취하고 있었으나 2번째 복원 때 지금의 모습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 의하면 선인문(宣仁門) 부근에서 장조(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운명했다고 한다.

집춘문
창경궁의 동북쪽에 있는 집춘문(集春門)은 관덕정 북쪽, 성균관과 창경궁 사이의 담장에 난 궁문으로 성균관과 마주 보이는 곳에 있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균관으로 행차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과 이어진 길을 없앰으로써 쓸모가 사라졌으나 2008년 성균관과 잇는 길을 종로구에서 복원하였다. 현재, 집춘문의 외부 지역에는 민가(民家)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出入門)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정전 권역

정전권역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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