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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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물리학자로 성인이 된 이후에 물리학에 대해 더 공부하기 위해 국적을 미국으로 이전하였다. 미국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그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제시로 현대 물리학 이론의 기반 마련하였으며, '참 입자의 탐색' 논문에서 말한 이론과 일치하는 새 입자를 발견하여 위상을 드높였다. 이때까지 발표됐던 140여 편의 논문 중 60여 편이 1만 회 이상 인용되었으며 후속 연구로 7명의 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생애

이휘소는 1935년 1월 1일 의사 부부인 이봉춘과 박순희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학지식은 모조리 흡수하였고, 1947년 경기중학교에 진학해서도“국가대표 공부선수”라고 표현할 만큼 수재로 유명했다. 특히 화학 과목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였고 부모님 병원에 자신만의 작은 실험실을 만들어놓고 화학 실험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마산으로 피난을 갔고 전시 훈령을 통해 그는 위탁생 신분으로 마산중학교에 편입했다. 이후 그는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입시 자격을 얻은 후 195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이휘소는 대학에서도 전공보단 물리학에 더 관심을 가졌고, 미국 물리학자가 쓴 양자역학 원서를 읽다 잘못된 계산 문제를 발견한 이휘소는 자신의 의견을 적어 저자에게 편지를 썼다. 얼마 후 물리학자는 “당신의 지적이 옳고 오류를 알려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학교 측에 전공을 물리학과로 바꾸고 싶다고 요청으나, 학교 측은 화학공학과는 공과대학 소속이고 물리학과는 문리과대학 소속이기 때문에 전과는 불가하다고 답했다.이 때문에 1955년 1월 26일, 이휘소는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마이애미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미국에 간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영어 이름을 ‘Benjamin Whisoh Lee’라고 지었다.


1956년 최고우등(summa cum laude)으로 학부를 졸업한 이휘소는 피츠버그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였고, 이론물리학에 매진해 1958년 논문 「산란 행렬의 해석성과 그 응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를 마친 이휘소는 미국 내에서 가장 명예로운 장학금 혜택으로 꼽히는 연구 장학금을 받고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첫 논문으로 석사 논문에 분산 관계를 추가한 「비상대론적 퍼텐셜 산란에서의 분산 관계」를 발표했고, 소립자 물리학의 첨단 이론에 관한 논문을 연이어 발표해서 유망한 신진 학자로 주목받았다. 1960년 그는 논문 「K+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마친 이휘소는 불안정한 한국의 정치 상황을 고려해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 그리곤 입자물리학 흐름의 최전선에 자리한 양-밀스 게이지 벌판 이론 연구에 몰두했다. 1962년 이휘소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열린 국제 고에너지 물리학 회의에 미국 대표단으로 선정됐다.

1967년 이휘소가 천착해온 게이지 이론에 대전환을 가져올 와인버그 모형(Weinberg model)이 발표됐다. 와인버그는 통합 이론의 돌파구를 마련한 전약(電弱) 이론을 개발했지만, 이론이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요건인 재규격화를 해결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1972년, 이휘소는 독창적 범함수 방법을 도입해서 와인버그 모형을 재규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범함수 방법을 물리학자가 이해하기 쉬운 연산자곱 정식화로 바꿔 설명하는 게이지 이론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트후프트-벨트만 팀이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도 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그의 이론을 기초로 물리학자들이 양-밀스 게이지 이론의 양자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3년 이휘소는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4년 8월 이휘소는 참(Charm) 쿼크의 존재를 예견한 논문 「참 입자의 탐색」을 『Review of Modern Physics』에 발표했는데, 그해 11월 11일 Brookhaven에서 실험하는 샘 팅과 SLAC에서 실험하는 리히터가 이휘소의 이론적 예상에 맞는 제이/프사이(J/ψ)입자를 발견하게 된다.

1974년 서울대는 과학 분야 대학원 육성을 위해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에서 사업을 추진했고, 그해 8월 이휘소는 AID 측을 대표하는 물리학 평가위원으로 위촉되어 귀국했다. 그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서울대를 실사하고 교수·학생·시설·행정·하계 학교·방문자 계획으로 분류된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대학 발전 방향을 기술한 그의 보고서는 서울대 이공계 교육이 괄목할 성장을 거듭하는 지침서로 활용됐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이휘소는 유명 물리학자들을 서울대로 초빙해 물리학 하계 학교를 여는 사업을 추진했다.


1977년 6월 16일 이휘소는 가족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동 중 일리노이주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78년 9월 이휘소가 기획했던 하계 학교 대신 한국 최초 입자물리학 국제대회인‘이휘소 추모 소립자 물리학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당시 한국물리학회 간사장이었던 조병하는 이휘소의 애석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훈장추서를 건의했다.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이 결정됐고, 이휘소의 정치철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한국 초청을 거절한 아내 마리안 대신 어머니 박순희 여사가 훈장을 받았다.

경력 사항

  • 1961년~1962년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원
  • 196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
  • 1966년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교수
  • 1972년 페르미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 연구부장
  • 미국 시카고대학교 교수

학력

  • 경기중학교
  • 경기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 마이애미대학교 물리학 학사
  • 1958년 피츠버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석사
  •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 입자물리학 박사

수상

  • 2005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 2006한국과학기술한림원


업적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참 입자의 탐색

소설 속 이휘소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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