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顚八起: 어머니의 삶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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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호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2일 (월) 23:04 판 (임효심의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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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주변을 둘러보면 다수의 능력 있는 여성들이 임신, 출산, 육아, 가족 돌봄 등의 이유로 일터를 떠난다. 문제는 그녀들이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일정 정도 마치고 다시금 일을 하려는 순간이다. 저마다의 과거 커리어와 경력이 단절된 사연, 환경, 간직한 꿈은 다르지만 사회는 육아와 가정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들을 ‘경단녀’라고 치부하며 쉽사리 받아주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내, 혹은 엄마들이 잠시 놓치고 있었던 꿈을 찾아 재도전하는 모습과 공백 깨기를 두 아이의 엄마이자 직장인인 임효심씨의 전반적인 생애와 경력 단절을 해소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경력 단절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노력하는지 알리기는데 기여하기 위함과 어머니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생애

임효심의 유년시절

1968년 임효심 여사는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라는 시골 깡촌에서 1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나게된다. 임효심씨가 태어났을때 가족은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임효심씨 네식구였다. 그 당시에 의료상황이 안 좋았던 것일까? 특이하게도 임효심씨는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요즘 세상에는 듣기 힘든 산파가 자택에서 도와줘서 태어났다. 임효심씨는 7남매 중 둘째라 동생들을 많이 돌봐 줬다고 한다. 동생들을 돌봐주는 과정에서 임효심씨는 형제들과 사이좋게 자랐다. 그러던 중 1975년 임효심씨는 국민학교 현재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6년 동안 공부도 제법 잘하며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그에 대한 증거로 3학년 때는 도서부장 4학년 때는 음악부장을 했다. 그리고 5학년 6학년 때 반장 또한 했다. 중학교는 함평여자 중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까지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녔다. 고등학교는 함평여자중학교 인근 함평 여자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자택과 멀어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임효심의 청년시절

꽃을 좋아하던 임효심씨는 1987년 목포에 있는 목포대학교 원예학과를 입학했다. 재학 중에 1988년 학교 동아리에서 운명적인 사랑인 남편을 처음 만났다. 임효심은 현재의 남편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둘은 사랑했고 연애를 했다. 그러던 중 1990년 재학 중에 전라남도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해에 도전해 바로 합격했다. 졸업 후에 1990년경에 임용되었다. 공무원으로 1년 반 정도 재직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대검찰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며 서울 살이에 도전한다. 그 이후로 임효심씨는 전업 주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에 1994년 첫째와 1996년 둘째가 태어나고 임효심씨는 육아에 전념했다. 육아도 하며 운전면허 시험공부도 하고. 결국, 노력의 산물로 2000년도에 임효심씨는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도전해 취득하게 된다. 운전면허가 그리 대단한 시험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임효심씨와 그의 동반자인 남편과 연애중 찍었던 사진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삶

임효심씨는 어린 자식들을 돌보면서 많이 힘들었던 탓일까? 갑자기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게 되어 몸이 많이 쇠약해 졌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은 갑상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과다하게 분비되어 갑상선 중독증을 일으키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남들보다 평소에 몇 배의 체력을 소모한다. 하지만 이런 힘들었던 상황인데 도와주는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혼자서 오로지 육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그때 많이 힘이 들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신생아와 두 세 살 먹은 아이였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몸이 체력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다. 아이들이 아프고 아플 때 밤새 보채고 잠을 안 자고 열이 나고 그럴 때는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자식이니깐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갑상선 항진증을 이겨내게 된다. 2001년도쯤에 시장을 보러 가는 길에 임효심씨가 시장을 보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둘째가 그때 왜 그러세요? 아저씨하고 했을 때 내 편을 들어주는 자식이 있구나! 그렇게 어려도 내 편을 들어주는 자식이 있어서 육아를 하면서 아주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 지금까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육아에 소홀했던 것에 대해 아이들에게 아직까지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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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변천과 도전기

일을 그만둔 임효심씨는 무료했던 것일까? 임효심씨는 직업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 복직은 물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그 당시 여성들에겐 아득한 일이었다. 더불어 전공이 원예학인 어머니는 전공을 살리려면 꽃집이나 그런 것을 차려야 했지만 대학에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난후였다. 경력단절여성에게 열린 직업은 대부분 단시간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이었다. 그나마 처우가 좋은 무기계약직 일자리는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은 뒤에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현실을 벗어 나고자 임효심씨는 육아도 하며 직업을 갖기 위해 공인중개사 시험도 공부했다. 약 8개월 간의 공부를 마친 뒤, 2002년도에는 공부하던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하고 합격하게 되어 그 해부터 구로구 개봉동에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취직하게 된다. 일은 재미있었고 적성에 맞았지만 당시에 형과 내가 나이가 어려 혼자 두기 무서웠던 임효심씨는 2005년경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그만두게 된다. 퇴사 이후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 틈틈이 주택관리사 시험을 공부해 주택관리사에 도전하고 9개월 만에 합격한다. 그 이후 주택관리 관련된 직업을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경력도 없고 자격증만 겨우 있는 기혼 여성을 써주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없었다. 임효심씨는 그 이후로도 전업주부로 삶을 이어가다가 아이들이 사리분별 정도는 할 때쯤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또 공인중개사로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부동산 경기불황의 여파로 인해 공인중개사의 삶은 짧게 끝나게 된다. 그 이후 2013년 임효심씨는 집 근처에서 부품품질검수 일을 시작하게 된다. 일은 재미없었지만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아 직장 생활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직업을 다른 직업들과 달리 꽤 오래 이어 나갔다. 하지만 경기불황여파로 고용주의 자금 사정으로 인해 임효심씨는 결국 2019년 부품품질검수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임효심씨는 또 잠깐의 공백기를 가지며 전업주부의 삶을 이어 간다. 이후 첫째가 집에서 분가하고 둘째가 말레이시아로 교환학생을 떠나고 공허함을 느꼈던 임효심씨는 또 직장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싶어 했다. 하지만 50대 기혼여성의 일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나라에서는 이런 경력단절여성들을 위한 국비지원 교육을 하고 있었고 임효심씨는 취업을 하기 위해 국비지원을 받으며 2019년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엑셀, 파워포인트, 아래아 한글 그리고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임효심씨는 다시 취업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던 탓일까? 이력서를 내는 족족 임효심씨는 떨어졌다. 임효심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이력서를 지원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 홍보를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영등포 당산동에 있는 아파트의 경리로 들어가게 되고 지금 현재까지도 근무하고 있다. 향후에 임효심씨는 경력을 쌓고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기위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도전하고 있다.

그녀가 취득한 자격증들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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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업 성공사례자인 임효심씨 경력단절 관련 녹취

Q: 여성 재취업 성공 사례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거 같아요. 임효심씨는 그러면 재취업을 해야 겠다, 결심하신 이유가 뭔가요?

A: 재취업은 재취업은 경력 단절 여성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 재취업을 해야한다고 생각을했고 그걸 위해서 경리 업무를 볼 수 있는 아파트 빌딩 관리 학원에서 자격증과 공부를 했었습니다. 재취업이 꼭 필요한 이유는 여성이 갱년기가 오다보면은 우울증도 오고 자존감도 떨어지는데 자존감도 회복하면서 우울증도 극복할 수 있고 사회의 역군으로써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에대해서 재취업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Q: 재취업에 도전하면서 자격증을 많이 취득하셨어요. 자겪증이 굉장히 많은데 자격증 취득 비결이 있다면?

A: 비결은 꾸준한 노력과 그리고 독학으로 이런 것들을 다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는데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독학으로 8개월 만에 취득을 하였고 그리고 주택관리사도 한 9개월 정도만에 취득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독학으로 한건데 도서관에서 시간을 투자하여 하루에 4시간에서부터 8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집중력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 자격증을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선택을 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선택과 집중 그 비결로 해서 자격증을 취득한 것입니다.

Q: 그러면 취득 후에 바로 취업도 하신건가요?

A: 아파트 경리로 취업하기전에 부품품질검수 아르바이트를 하였는데 그때의 경험은 인내심 테스트밖에 할 수 없는 거였고 취업하는데 다시 취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7년의 경력이 아파트 경리로 취업하는데 그리고 7년 일하다가 권고사직을 당하고 일감이 없어서 1년 정도 취업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같은 경우에 1년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Q: 재취업을 하면서 힘들었던점

A: 우선은 업무에 미숙하고 도와줄 선배가 없어서 그 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환이 와서 글씨가 잘 안보이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런점들이 좀 힘들었습니다.

Q: 경력 단절 여성들에게 하고싶은 말

A: 저는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은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겁니다. 제가 경력단절 기간이 길어진 이유가 취업하는데 있어서 조금 망설이고 두려움을 겪다보니 그게 좀 많이 늦어졌던거 같은데 일단 도전해보라는 겁니다. 도전만이 경력단절을 깨고 취업전선에 나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도전을 하지 않고서는 모든 일들을 이뤄낼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뭔가를 해야될까 말아야 될까 순간 기로에 섰을 때 꼭 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 항상 망설임에 순간과 제가 뒤로 한발 물러서고 했던 점들이 항상 후회가 됐고 그게 절실함인데 그 절실함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도 좀 들어서 그리고 취업을 할려고 생각을 했을 때 그때는 제가 나이가 많이 너무나 많이 들고 면접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나이가 젊을 때 불러줄 때 일을 하라는 겁니다. 50이 되기전에 50이 되기전에 무조건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그때 취업을 했으면 50이 넘어지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습니다.

약력

1968년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출생- 1남 6녀중 둘째

1975년 국민학교 입학

1977년 국민학교 3학년 도서부장

1978년 국민학교 4학년 음악부장

1979년 국민학교 5학년 반장

1980년 국민학교 6학년 반장

1981년 함평여자중학교 입학

1984년 함평여자고등학교 입학

1987년 목포대학교 원예학과 입학

1988년 동아리에서 남편 처음 만남.

1990년 전라남도 지방직 공무원 합격

1991년 목포대학교 졸업

1991년 전라남도 고흥군 공무원

1993년 아버지와 결혼과 동시에 상경

1994년 첫째 출생

1996년 둘째 출생

2000년 운전면허 자격증 취득 1종 보통

2002년 공인중개사 자격증 취득

2002년 공인중개사무소 입사

2005년 퇴사

2006년 주택관리사 취득

2012년 공인중개사무소 입사

2013년 경기불황으로 퇴사

2013년 부품품질검수 시작

2019년 부품품질검수 퇴사

2019년 컴퓨터 자격증 취득 (엑셀,한글, 파워포인트, 컴퓨터 활용능력 2급)

2020년 아파트 경리 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