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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인 성기철의 역마살ㅡ70년대 해외출장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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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철(건설인)은 70~80년대 중동 국가 건설 붐 시기인 1977년 10월에 대우그룹에 입사한 뒤로 한국을 떠나 반 평생을 중동, 아프리카 등 건설 시장을 개척하며 백개 정도의 국가를 가보았다. 1990년부터는 대우그룹 임원이 되었으나 1998년 대우그룹이 부도하고 부영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지금도 생소한, 이름도 몰랐던 나라, 위험한 지역까지 발자국을 남긴 성기철이 마주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성기철(건설인)은 70~80년대 중동 국가 건설 붐 시기인 1977년 10월에 대우그룹에 입사한 뒤로 한국을 떠나 반 평생을 중동, 아프리카 등 건설 시장을 개척하며 백개 정도의 국가를 가보았다. 1990년부터는 대우그룹 임원이 되었으나 1998년 대우그룹이 부도하고 부영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지금도 생소한, 이름도 몰랐던 나라, 위험한 지역까지 발자국을 남긴 성기철이 마주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2020년 6월 16일 (화) 22:06 판



소개

성기철(Sung Ki Chul, 1952~, 경기도 부천시) 1952년 경기도 부천시에서 자랐다. 소사농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때까지는 농부의 길을 꿈꿨으나 취업 후 대학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한양대학교 에서경제학 을 전공했다. 1997년 10월 대학 졸업 전 대우건설에 조기 취업한 뒤로는 한국을 떠나 반평생을 중동, 아프리카에서 보내며 건설 시장을 개척했다. 1990년 대우그룹임원이 되었다.

학력

경력

취미

건설인 성기철의 역마살ㅡ70년대 해외출장 썰

  1. 알제리 건설현장
    리비아 건설현장
이라크 건설현장
    1. 성기철(건설인)은 70~80년대 중동 국가 건설 붐 시기인 1977년 10월에 대우그룹에 입사한 뒤로 한국을 떠나 반 평생을 중동, 아프리카 등 건설 시장을 개척하며 백개 정도의 국가를 가보았다. 1990년부터는 대우그룹 임원이 되었으나 1998년 대우그룹이 부도하고 부영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지금도 생소한, 이름도 몰랐던 나라, 위험한 지역까지 발자국을 남긴 성기철이 마주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1952년 부천시 중동에서 태어난 기철의 꿈은 농부였다. 정성을 쏟은만큼 보답하는 땅을 일구는 일이 좋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뛰어든 사회는 냉혹했다. ‘대학은 가야겠구나.’ 기철은 그길로 퇴사해 학업에 전념, 한양대학교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흙내를 사랑하던 청년이 경제학과라니. 너무 사람이 급히 바뀐 거 아닌가 싶겠지만 취업난은 당시에도 있었다. 법학과, 경제학과 말고는 취직이 안 되는 시대였기에 선택한 길이다. 전공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고, 1997년 대학교 4학년에는 대우그룹에 조기취업했다.


1980년대 초, 대우건설 플랜트 사업은 조직도 미약하고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신생아와 같았다. 특히 해외 플랜트부 인력이 몇명 되지 않다 보니 기철을 포함해 두세명은 출장으로 한 해를 보내기 일쑤였고, 특히 기철에게 출장 업무가 몰렸는데 그 후 이런 상황이 20년 넘게 지속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무렵 일년에도 몇 번씩 출장을 떠나면서, 기철은 ‘과연 나에게 정말 역마살이라는 것이 낀 것일까 그냥 미신일까’ 자문자답 하곤 했다.


많은 사람이 기철을 부러워하며 여행을 많이 다녀 좋겠다고 했지만 기철은 비행기가 겁났다. 비행기 사고가 나서 추락한다거나 이런 걱정이 아니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좁은 이코노미석에 끼어 앉아 12시간씩 왕복해보면 기철의 말을 뼈저리게 이해했을 것이다. 출장에서 돌아와 본사 사무실에 출근하면 유럽에서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므로 졸리게 되는데, 오전은 어떻게 하든 버티어 내지만 점심을 먹은 직후가 가장 문제의 시간이다. 결국 오후 시간에 잠깐씩 의자를 창가로 돌려놓고 앉은채 쪽잠을 자는 것으로 풀곤 했는데, 하루는 잠시 풋잠을 자고 깨니 부서 직원이 본부장님이 왔다 가셨다고 했다. “그러면 나를 깨워야지!” 그냥 가시게 했나 질책을 하자, 본부장님이 깨우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본부장님이 인정한 “공인 낮잠부장”이 되어 해외 출장 귀임 후 15분에서 20분 정도 엎드려 잘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여행의 기본이자 방문하는 나라의 얼굴인 국제 공항들의 이야기를 몇 개 해볼까 한다. 세계 각국의 공항들을 보면 최신 설비를 갖춘 대도시 공항도 있고, 한눈에 보아도 시골티 물씬 나는 흙길 활주로의 소박한 공항까지 천차만별이다보니, 여행객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비교를 해보는 것이 재미도 있거니와 때로는 다음 여행에 참고할 내용도 있으니, 어찌 보면 일거양득이라 할 수도 있겠다. 동남아 국가들은 공항에서 꽃과 음악으로 환영하는 경우가 많고, 근래에는 국가별로 많이 개방되었지만 독일을 기점으로 동쪽에 있는 동유럽국가 공항의 근무자들은 한결같이 무표정에 미소는 멀리한 차가운 얼굴이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공항 근무자들은 별로 표정은 없지만 손도 빠르고 일처리도 빠른 것을 보면, 모두들 국가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오지 않으시는지?

공항에서 대마초 걸리면

지금은 나이지리아에서 우리나라로 올 때 항공편이 매우 다양하지만,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던 80년대 후반 나이지리아 현장 근무를 마치고 귀임할 때의 이야기이다. 귀국하는 항공편은 나이지리아 라고스로부터 런던을 거쳐 파리에서 대한항공으로 환승하는 여정이었다. 영국의 공항들은 예나 지금이나 입국 수속이 끝나면 짐을 찾아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곤 하는데, 세관 직원들이 제복에 모자를 쓰고 근엄하게 입국자들을 주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워보여도 할일은 다 한다고 했다.


런던에 도착하고 밖에 나와 지사 직원을 만나서 인사하고 뒤이어 나오는 사람들을 집결시켜 인원점검을 하는데, 30분이 지났지만 모두 같이 움직인 일행 중에 두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지사 직원이 입국장 문 앞에 있는 공항 경찰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안의 상황을 알아보아 주기를 부탁했는데, 그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세관원으로 보이는 제복 한 사람과 같이 기철의 일행에게 다가와 “Mr.Sung”을 찾았다.


기철은 가방을 맡기고 그를 따라 방금 나왔던 입국장 문 안으로 다시 들어가 어떤 조그만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두 사람이 커다란 귀국 가방의 내용물을 대형 탁자위에 모두 쏟아 놓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기철을 보자 벌떡 일어나며 반색을 했다. 기철은 세관원에게 나이지리아 건설 현장에서 귀국하는 일행의 리더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러자 그가 기철에게 두 사람이 수입 금지된 물품을 휴대하여 체호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체포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문제가 된 수입 금지 물품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마약과 입국시 신고하고 검역을 받아야 하는 식물류라고 하였다. 식물류는 그렇다 치고 마약이라니, 기철은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꼬였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우선 체포되었던 두 사람들로부터 상황을 들었는데, 한 사람은 귀국하는 가방속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열대 과일만 한가득 담아 오다가 적발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물소 뿔 두개에 대마초를 가득 넣어서 가방에 넣어 왔는데 발각되었다고 했다. 열대과일을 담아 오던 친구는, 현장은 끝났는데 가진 돈도 넉넉치 않은데다 나이지이아에서는 특별히 살 것도 없고 런던과 파리에서는 공항 외에 둘러볼시간도 없으므로, 주변에 선물이나 하자는 생각에 바나나와 파인애플, 희귀한 열대과일 몇 가지를 요령껏 가방에 가득 담아 억지로 기내에 들고 탑승했다고 했다. 80년대 우리나라의에서는 바나나가 낱개에 3천원이었다.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고급 과일인 것이다. 그런데 나이지리아에서는 커다란 한송이에 우리 돈 2천원 정도에 살 수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세관원들의 말에 의하면 과일을 가진 사람은 모두 몰수하고 석방할 수 있지만, 대마초를 가진 사람은 마약단속반에 인계하는 것이 세관 운영의 원칙이라고 운을 떼었다. 마음속으로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영어도 안 되는 기능직 사원을 영국 구치소에 두고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강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이 나이지리아 본부와 런던 지사, 그리고 서우루 본사 인력 선발팀에 미치게 될 영향 등이 줄줄 떠오르며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다행히도 세관원이 기철과 옆에 있던 법무팀 H대리의 명함을 보더니 두 사람의 여권과 명함을 보니 두 사람은 신분이 확실하고 귀국팀의 지휘자들이므로 믿고 이야기한다며, 자기들에게 각서를 써준다면 체포한 친구들의 훈방을 고려해 보겠다고 하며 두 사람이 구금된 친구를 위해 마치 보증처럼 각서를 제출하겠는가 물었다. 상황을 보면 무조건 “Yes”라고 해야 하지만 어떤 각서인지 물어보니, 체포된 사람이 법을 어겼으나 영국을 벗어날 때까지 추가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보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서를 검토하는 중 기철의 일행이 세관원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 일행이 30여명인데 어떻게 저 두 사람을 골라서 잡았나”물었는데,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7~80퍼센트 정도는 알 수 있단다. 열대과일은 가방 모양을 보고 조사했고, 대마초를 가지고 있던 친구는 얼굴 색깔이 마약을 사용한 사람이라고 특정할 수 있어서 가방 조사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들이 하는 일이었고 말에 자신감이 묻어 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추후에 들어보니 그 때 벌써 대마초 정도는 약한 마약으로 분류될 정도로 영국에서는 강한 마약이 성행하여, 그들의 석방판단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말라리아와의 싸움

일하고 돈을 못 받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