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예술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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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은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21일 (목) 14: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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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연구회

설립자

유치진, 서항석, 홍해성, 윤백남

창립 동인

김진섭(金晉燮)‧유치진[柳致眞]‧이헌구(李軒求)‧이하윤(李河潤)‧정인섭(鄭寅燮)‧조희순(曺喜淳)‧최정우(崔珽宇)‧함대훈(咸大勳)‧등 해외문학파 구성원들.

창립목적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사도(邪道)의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을 수립”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창립됨.

상세설명

약칭 극연(劇硏). 1931년 설립된 연극운동단체. 연극영화전람회가 성공을 거두자 여기에 적극 관여하였던 서항석(徐恒錫)‧유치진(柳致眞) 등이 홍해성(洪海星)과 윤백남(尹白南)을 영입하여 1931년 7월 8일 발족시켰다. 연구회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예술연구회는 이론과 실제를 포괄해 보려는 의욕을 가진 단체였다. 극단으로서의 활동은 「실험무대(實驗舞臺)」를 직속극단으로 설치하고 모집한 연구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는데, 창단 공연은 1932년 5월 4일부터 3일간 조선극장에서 공연한 고골리의 「검찰관」홍해성 연출)이었다. 극예술연구회가 극단으로 변모하여 본격적으로 공연활동을 전개한 것은 「실험무대」의 연구생을 회원으로 받아들여, 동인제에서 회원제의 단체로 변모한 1932년 12월부터이다. 극예술연구회의 공연활동은 크게 3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홍해성이 연출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던 시기로 창립 공연부터 7회 공연(1934. 12)까지이다. 창작극 계발을 위해 번역극의 공연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제1기의 공연은 유치진의 「토막」(3회, 1933. 2)과 유치진 자신이 직접 연출한 「버드나무선 동리 풍경」(5회, 1933. 11)을 제외하고는 번역극 일색이었다. 제2기는 동양극장으로 떠나버린 홍해성의 공백을 유치진이 감당하였던 시기로 제8회 공연(1935. 11)부터 제17회 공연(1938. 2)까지이다. 유치진은 제2기 활동의 목표로 ① 창작극 중심으로 공연 ② 소인극(素人劇)적 태도에서 연극 전문극단으로 전진 ③ 경쾌한 극도 상연하겠다면서, 무엇보다도 경제력의 기반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제1기에 비해 창작극의 공연이 활성화되었는데 유치진 외에도, 이무영(李無影)의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1935. 11), 「무료치병술」(1936. 3), 이광래의 「촌선생」(1936. 4), 이서향의 「어머니」(1936. 4) 등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제3기는 극연좌(劇硏座)로 개칭한 이후로 제18회 공연(1938. 5)부터 마지막 공연(1939. 5)까지이다. 제3기는 악화되는 시대상황 때문에, 인기있었던 작품을 재공연하면서 극단의 명맥을 유지해야 하였던 힘든 시기였다. 극연좌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극 수립을 목표로 연극계를 재편하려 하였던 일제에 의해 1939년 5월의 제24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론 분야에서의 활동 역시 공연 분야에 못지 않게 활발하였다. 본격적인 연극론은 홍해성과 유치진을 통해 이루어졌고, 서항석‧이헌구 등이 소속된 연구부에서는 서양 연극에 대한 소개의 글을 집중적으로 발표하였다. 특히 유치진은 「산 신문극」(1931) 등 진보적 연극이론을 소개하여 1930년대 연극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강연회 개최와 잡지 『극예술』의 발간도 연극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극예술』은 1934년 4월에 창간호를 낸 이래 1936년 9월에 5호까지 발간하였고, 매호마다 공연과 관계된 내용을 실어 관객들의 연극 이해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극예술연구회는 상업적 신파극이나 프롤레타리아연극과는 다른 서양의 근대극운동의 이념을 보급‧실천하려 한 점, 그리고 창작극 공연에 관심을 기울여 다수의 극작가를 발굴하였다는 점에서 연극사적 의의가 있다.

기능과 역할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사적 의미는 근대 서구 사실주의의 도입·정착을 통한 본격적 신극 수립이었다. 이 극단은 1920년대의 토월회가 신파극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이룩한 공적을 이어받아 신극운동을 본격화시켰으며, 시대배경, 창립동인의 인적구성 및 자질, 운동 목표의 명확한 인식, 상업주의의 비타협적 배격, 범문화계적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해서 토월회식 좌절과 변질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의의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사적 의미는 근대 서구 사실주의의 도입 · 정착을 통한 본격적 신극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의 토월회가 신파극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이룩한 공적을 이어받아 신극운동을 본격화시켰으며, 시대배경, 창립동인의 인적구성 및 자질, 운동목표의 명확한 인식, 상업주의의 비타협적 배격, 범문화계적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해서 토월회식 좌절과 변질을 극복할 수 있었다. 8년이라는 장기간(극연좌까지 합쳐)의 활동을 지속했던 것은 그간 큰 변질 없이 운동을 지속해 나갔으며, 극단 내부의 중대한 의견대립 또는 분파작용이 나타나지 않았고, 재정적 안정기반 없이도 극단을 운영하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다각적으로 연극운동을 펼쳐나갔다는 데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말기의 가혹한 문화탄압의 일환으로 연극계의 여러 숙제를 미처 풀지 못한 채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것은 우리나라 신극사상 가장 큰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던 이 극단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나라 신극의 발전에 적지 않은 불행이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극예술연구회 [劇藝術硏究會]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극예술연구회와 유치진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유치진 극예술연구회 설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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