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흥학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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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총권수''' || 12권 | | style="text-align:center;"|'''총권수''' || 12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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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립취지=== | ||
+ |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조직된 단체로 대한제국 국권 회복의 길은 교육 진흥과 산업 발달에 있다 보고 교육진흥을 가장 중점적인 목표로 추진했다. | ||
+ | ===개설=== | ||
+ | 1908년 1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한성부에서 조직되었다. 기호인사 105명이 서울 신문로의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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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회장에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에 [[지석영(池錫永)]], 총무에 [[정영택(鄭永澤)]]을 선출하였다. 평의원은 [[유성준(兪星濬)]] ·[[석진형(石鎭衡)]] ·[[이상재(李商在)]] ·[[윤효정(尹孝定)]] ·[[장헌식(張憲植)]] ·[[정교(鄭喬)]] ·[[장도(張燾)]] ·[[유근(柳瑾)]] ·[[유일선(柳一宣)]] ·[[안종화(安鍾和)]] 등 10명으로 출발하였다. | ||
+ | ===연원 및 변천=== | ||
+ | 을사조약 후 애국계몽운동자들은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여,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때 활동한 애국계몽단체 가운데 [[대한자강회]]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이 단체가 강제 해산되자, 11월에 [[대한협회]]를 설립해 자강운동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이 시기에 학교설립 등 교육진흥사업의 체계있는 지역적 추진을 위해 각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는 그 중 하나이다. 이밖에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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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호흥학회 월보=== | ||
+ |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는 1908년 8월 25일자로 창간된 기호흥학회의 기관지로서 1909년 7월 통권 12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내용이 국권 회복에 관계된다 하여 제6·9·10·11호 등이 여러 번 압수되기도 하였다. 창간호에는 의친왕의 [[‘咸與維新(함여유신)’]]이라는 친필을 실었다. 1910년 9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판권장을 보면, 발행인 [[김규동(金奎東)]], 편집인 [[이해조(李海朝)]], 인쇄인 [[이기홍(李基弘)]], 인쇄소 우문관(右文館), 발행소 기호흥학회(황성·중부 교동 23통 1호), A5판 70면, 정가 15전이다. 문장은 거의가 한문에 토를 단 국한 혼용문이며, 전문 4호 활자로 2단 세로짜기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6월 13일 (수) 01:26 판
기호흥학회
기호흥학회 월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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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기호흥학회 월보 |
창간일 | 1908년 8월 25일 |
종간일 | 1909년 7월 |
총권수 | 12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