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흥학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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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회장에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에 [[지석영(池錫永)]], 총무에 [[정영택(鄭永澤)]]을 선출하였다. 평의원은 [[유성준(兪星濬)]] ·[[석진형(石鎭衡)]] ·[[이상재(李商在)]] ·[[윤효정(尹孝定)]] ·[[장헌식(張憲植)]] ·[[정교(鄭喬)]] ·[[장도(張燾)]] ·[[유근(柳瑾)]] ·[[유일선(柳一宣)]] ·[[안종화(安鍾和)]] 등 10명으로 출발하였다.
 
초대회장에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에 [[지석영(池錫永)]], 총무에 [[정영택(鄭永澤)]]을 선출하였다. 평의원은 [[유성준(兪星濬)]] ·[[석진형(石鎭衡)]] ·[[이상재(李商在)]] ·[[윤효정(尹孝定)]] ·[[장헌식(張憲植)]] ·[[정교(鄭喬)]] ·[[장도(張燾)]] ·[[유근(柳瑾)]] ·[[유일선(柳一宣)]] ·[[안종화(安鍾和)]] 등 10명으로 출발하였다.
 
===연원 및 변천===
 
===연원 및 변천===
을사조약 후 애국계몽운동자들은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여,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때 활동한 애국계몽단체 가운데 [[대한자강회]]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이 단체가 강제 해산되자, 11월에 [[대한협회]]를 설립해 자강운동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이 시기에 학교설립 등 교육진흥사업의 체계있는 지역적 추진을 위해 각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는 그 중 하나이다. 이밖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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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후 애국계몽운동자들은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여,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때 활동한 애국계몽단체 가운데 [[대한자강회]]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이 단체가 강제 해산되자, 11월에 [[대한협회]]를 설립해 자강운동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이 시기에 학교설립 등 교육진흥사업의 체계있는 지역적 추진을 위해 각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는 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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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과 조직은 회장·부회장·총무·회계감독·서기·회계 각 1명, 간사 약간 명 및 평의원들로 구성하고, 임기는 1년이었다. 회장은 초대 이용직에 이어 윤웅렬(尹雄烈)·김윤식(金允植)·홍필주(洪弼周) 등의 순으로 역임하였다.지회는 경기도의 광주·수원·양근·장단·교하·강화 등 6개 군, 충청북도의 청주·충주·청양·풍덕 등 4개 군, 충청남도의 서산·공주·연산·당진·해미·목천·홍주 등 7개 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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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 흥학운동은 유지들의 협력으로 비교적 활발해 학교 설립을 속속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사의 부족으로 1908년 6월서울 소격동에 교사 양성을 겸한 기호학교를 설립하는데 머물렀다.
  
 
===기호흥학회 월보===
 
===기호흥학회 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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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흥학회월보」 (한국잡지백년1, 현암사, 2004. 5. 15)
 
  「기호흥학회월보」 (한국잡지백년1, 현암사, 200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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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6월 13일 (수) 01:29 판

기호흥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