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반 피카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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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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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그는 스페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Salvador Dalí i Cusí, 1872 ~ 1950)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탈루냐계 변호사이자 공증인이었다. 달리의 형은 그의 탄생 이전에 위장염으로 사망했고, 달리의 부모는 달리가 형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외로 3살 어린 여동생 안나 마리아는 달리에 대한 책을 집필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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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카탈루냐의 피게레스(Figueres)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형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다.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인 1903년 8월 1일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는데 중산층 변호사였다.
  달리의 아버지는 달리가 공립 학교의 교육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가 6살이 되던 해에 그를 프랑스어 학교에 보냈다. 그는 가족의 여름 별장이 있는 카탈루냐 지로나 주의 카다케스(Cadaqués)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후 달리의 부모는 그에게 첫 전시 스튜디오를 카다케스에 제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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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와 작가들과 사귀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의 수법은 '환상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린다. 또, 영화 <황금시대>를 제작한 외에 로트레아몽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의 삽화를 그렸다.
  1916년 달리는 가족과 함께한 여름 휴가에서 처음 현대미술을 접한다. 그리고 다음해 달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 자신이 그린 목탄화 전시회를 개최한다. 1921년 달리가 갓 17살이 되었을 때 달리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으로 떠났고 달리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다. 달리는 이에 대해서 '이모를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평소에 아버지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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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미국에 건너가 정통적 초현실주의를 떠난 후, 가극·발레의 의상 등 장식 예술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또 디즈니와 협력하여 영화 제작에도 종사하였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 <잉태한 성모>가 있다.[1]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고 그의 아내인 갈라(Gala Eluard Dalí)를 성모 마리아에 비유한 종교화를 연작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통치자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히틀러를 찬양해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히틀러에 대한 숭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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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항상 제복에 꽉 조여진 히틀러의 부드럽고 살찐 등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벨트에서부터 어깨까지 가로지르는 히틀러의 가죽끈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복으로 포장된 그의 살의 부드러움에 두근거리는 바그너적 황홀경에 빠진다. 나는 사랑의 행위 중에도 이같은 극도의 흥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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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달리는 히틀러를 소재로 〈히틀러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Hitler,1938)〉라는 그림도 그렸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달리는 스페인에서 달아났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그를 "쥐새끼처럼 달아났다"며 비판했다. 달리의 자서전에 대한 1944 년의 주목할만한 연구에서,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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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달리가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머리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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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말은 살바도르 달리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힘든 평가이기도 하다. 공화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에 까지 참전한 조지 오웰로서는 그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공화주의자편에 서지 않은 살바도르 달리를 좋게 평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달리의 개인적인 신념이고 그 신념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화주의자들이 내전에서 승리했더라면 과연 스페인의 운명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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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카탈로니아에 귀국 한 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권위주의 정권과 밀착했다. 달리의 성명 중 일부는 "스페인에 파괴적인 세력(공화주의자들)을 제거하는"것을 목표로 한 프랑코의 행동에 대해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달리는 프랑코에게 감옥에 갇힌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것을 칭찬하면서 전보를 보냈다. 그는 개인적으로 프랑코를 만났고, 프랑코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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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또 2차 세계대전 후 원자폭탄을 찬미하는〈멜랑코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1945)〉라는 그림도 그렸는데 멜랑코리라는 제목 덕분에 이 그림은 종종 전쟁의 비극과 핵폭탄에 대한 경고로 읽히곤 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달리는 또 비키니 섬에서 벌어진 핵실험을 소재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Three Sphinxes of Bikini,1947)〉라는 작품도 그렸다. '''CC-BY-SA''' [https://ko.wikipedia.org/wiki/%EC%82%B4%EB%B0%94%EB%8F%84%EB%A5%B4_%EB%8B%AC%EB%A6%AC 위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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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일 (일) 20:58 판

서론

-유투브, 주꾸짱


일리네어 레코즈에서 자신의 솔로 EP 음반 2 4 : 2 6를 발매한 빈지노는 2013년 12월 6일, 티저 이미지와 함께 1년 반만에 같은 달 18일 싱글 "Dali, Van, Picasso"를 발매한다고 알렸다. 빈지노는 곡을 통해 자신의 예술가적 영감과 열정을 세 화가; 살바도르 달리,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의 이름을 빌려 표현하였으며 아트워크는 자신의 크루인 IAB가 작업하였고 모델은 김원중이 맡았다. 원래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마스터링을 맡겼으나 맘에 들지 않아 국내에서 다시 하였다. 또한 곡 제목에 맞게 아트워크에 사용된 펜던트 목걸이를 직접 디자인하였는데, 곡에 언급된 세 화가의 대표 작품을 하나씩 형상화하였다. 지금부터 빈지노와, 그가 영감과 열정을 표현할 때 인용한 달리, 반, 피카소를 알아보자. CC-BY-SA 위키


빈지노

CC-BY-SA, 나무위키




빈지노(영어: Beenzino, 본명: 임성빈, 1987년 9월 12일 ~ )는 대한민국의 래퍼이다.
활동명 빈지노는 미국의 래퍼 벤지노와 본명 임성빈의 '빈'자를 합쳐서 만들었다.
2008년 여러 아티스트들의 곡에 피쳐링 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2009년 피스쿨의 음반 《Daily Apartment》 객원 래퍼로 참여하였고,
이후 2010년 비트박스 DG와 핫클립, 시미 트와이스와 재지팩트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듬해 도끼와 더 콰이엇이 설립한 일리네어 레코즈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첫 솔로 음반인 《2 4 : 2 6》을 발매한 뒤 주목받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독일의 여자 모델인 스테파니 미초바의 연인이다.
이후 싱글 "Dali, Van, Picasso"를 발매하여 각종 음원 차트를 휩쓸었고,
2014년 5월 일리네어 레코즈 컴필레이션 음반 11:11 발매 후 두 번째 EP 음반 Up All Night EP를 발매하였다.
2015년 《4가지쇼》 출연 후 싱글 《어쩌라고》를 발매하였으며,
하반기에는 싱글 《Break》와 《We Are Going To》를 발매하였고 2016년 첫 정규 음반 《12》를 발매하였다.
CC-BY-SA 위키

살바로드 달리 (Salvador Dalí)

저작권만료-Van Vechten, Carl, library of Congress
저작권만료-Van Vechten, Carl, library of Congress


생애

그는 카탈루냐의 피게레스(Figueres)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형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다.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인 1903년 8월 1일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는데 중산층 변호사였다.
마드리드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와 작가들과 사귀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의 수법은 '환상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린다. 또, 영화 <황금시대>를 제작한 외에 로트레아몽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의 삽화를 그렸다.
뒤에 미국에 건너가 정통적 초현실주의를 떠난 후, 가극·발레의 의상 등 장식 예술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또 디즈니와 협력하여 영화 제작에도 종사하였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 <잉태한 성모>가 있다.[1]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고 그의 아내인 갈라(Gala Eluard Dalí)를 성모 마리아에 비유한 종교화를 연작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통치자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히틀러를 찬양해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히틀러에 대한 숭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	나는 항상 제복에 꽉 조여진 히틀러의 부드럽고 살찐 등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벨트에서부터 어깨까지 가로지르는 히틀러의 가죽끈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복으로 포장된 그의 살의 부드러움에 두근거리는 바그너적 황홀경에 빠진다. 나는 사랑의 행위 중에도 이같은 극도의 흥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
또 달리는 히틀러를 소재로 〈히틀러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Hitler,1938)〉라는 그림도 그렸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달리는 스페인에서 달아났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그를 "쥐새끼처럼 달아났다"며 비판했다. 달리의 자서전에 대한 1944 년의 주목할만한 연구에서,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사람들은 달리가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머리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말은 살바도르 달리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힘든 평가이기도 하다. 공화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에 까지 참전한 조지 오웰로서는 그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공화주의자편에 서지 않은 살바도르 달리를 좋게 평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달리의 개인적인 신념이고 그 신념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화주의자들이 내전에서 승리했더라면 과연 스페인의 운명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카탈로니아에 귀국 한 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권위주의 정권과 밀착했다. 달리의 성명 중 일부는 "스페인에 파괴적인 세력(공화주의자들)을 제거하는"것을 목표로 한 프랑코의 행동에 대해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달리는 프랑코에게 감옥에 갇힌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것을 칭찬하면서 전보를 보냈다. 그는 개인적으로 프랑코를 만났고, 프랑코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달리는 또 2차 세계대전 후 원자폭탄을 찬미하는〈멜랑코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1945)〉라는 그림도 그렸는데 멜랑코리라는 제목 덕분에 이 그림은 종종 전쟁의 비극과 핵폭탄에 대한 경고로 읽히곤 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달리는 또 비키니 섬에서 벌어진 핵실험을 소재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Three Sphinxes of Bikini,1947)〉라는 작품도 그렸다. CC-BY-SA 위키

대표작

Gala in the Window, CC-BY, Manuel González Olaechea, 위키
A Couple with Their Heads Full of Clouds, Fair use, wiki art
A Seated Man and a Dancing Couple, Pubilc Domain US, wiki art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CC-BY-SA, Europeana
CC-BY-SA, Wikimedia
CC-BY-SA,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