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반 피카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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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지노(영어: Beenzino, 본명: 임성빈, 1987년 9월 12일 ~ )는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래퍼이다.
  빈지노(영어: Beenzino, 본명: 임성빈, 1987년 9월 12일 ~ )는 대한민국의 래퍼이다.
 
 
  활동명 빈지노는 미국의 래퍼 벤지노와 본명 임성빈의 '빈'자를 합쳐서 만들었다.
 
  활동명 빈지노는 미국의 래퍼 벤지노와 본명 임성빈의 '빈'자를 합쳐서 만들었다.
 
  2008년 여러 아티스트들의 곡에 피쳐링 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2009년 피스쿨의 음반 《Daily Apartment》 객원 래퍼로 참여하였고,
 
  2008년 여러 아티스트들의 곡에 피쳐링 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2009년 피스쿨의 음반 《Daily Apartment》 객원 래퍼로 참여하였고,

2019년 12월 1일 (일) 21:59 판

서론

-유투브, 주꾸짱


일리네어 레코즈에서 자신의 솔로 EP 음반 2 4 : 2 6를 발매한 빈지노는 2013년 12월 6일, 티저 이미지와 함께 1년 반만에 같은 달 18일 싱글 "Dali, Van, Picasso"를 발매한다고 알렸다. 빈지노는 곡을 통해 자신의 예술가적 영감과 열정을 세 화가; 살바도르 달리,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의 이름을 빌려 표현하였으며 아트워크는 자신의 크루인 IAB가 작업하였고 모델은 김원중이 맡았다. 원래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마스터링을 맡겼으나 맘에 들지 않아 국내에서 다시 하였다. 또한 곡 제목에 맞게 아트워크에 사용된 펜던트 목걸이를 직접 디자인하였는데, 곡에 언급된 세 화가의 대표 작품을 하나씩 형상화하였다. 지금부터 빈지노와, 그가 영감과 열정을 표현할 때 인용한 달리, 반, 피카소를 알아보자. CC-BY-SA 위키


빈지노

CC-BY-SA,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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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지노(영어: Beenzino, 본명: 임성빈, 1987년 9월 12일 ~ )는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래퍼이다.
활동명 빈지노는 미국의 래퍼 벤지노와 본명 임성빈의 '빈'자를 합쳐서 만들었다.
2008년 여러 아티스트들의 곡에 피쳐링 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2009년 피스쿨의 음반 《Daily Apartment》 객원 래퍼로 참여하였고,
이후 2010년 비트박스 DG와 핫클립, 시미 트와이스와 재지팩트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듬해 도끼와 더 콰이엇이 설립한 일리네어 레코즈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첫 솔로 음반인 《2 4 : 2 6》을 발매한 뒤 주목받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독일의 여자 모델인 스테파니 미초바의 연인이다.
이후 싱글 "Dali, Van, Picasso"를 발매하여 각종 음원 차트를 휩쓸었고,
2014년 5월 일리네어 레코즈 컴필레이션 음반 11:11 발매 후 두 번째 EP 음반 Up All Night EP를 발매하였다.
2015년 《4가지쇼》 출연 후 싱글 《어쩌라고》를 발매하였으며,
하반기에는 싱글 《Break》와 《We Are Going To》를 발매하였고 2016년 첫 정규 음반 《12》를 발매하였다.
CC-BY-SA 위키

살바로드 달리 (Salvador Dalí)

저작권만료-Van Vechten, Carl, library of Congress
저작권만료-Van Vechten, Carl, library of Congress


생애

그는 카탈루냐의 피게레스(Figueres)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형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다.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인 1903년 8월 1일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는데 중산층 변호사였다.
마드리드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와 작가들과 사귀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의 수법은 '환상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린다. 또, 영화 <황금시대>를 제작한 외에 로트레아몽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의 삽화를 그렸다.
뒤에 미국에 건너가 정통적 초현실주의를 떠난 후, 가극·발레의 의상 등 장식 예술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또 디즈니와 협력하여 영화 제작에도 종사하였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 <잉태한 성모>가 있다.[1]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고 그의 아내인 갈라(Gala Eluard Dalí)를 성모 마리아에 비유한 종교화를 연작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통치자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히틀러를 찬양해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히틀러에 대한 숭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	나는 항상 제복에 꽉 조여진 히틀러의 부드럽고 살찐 등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벨트에서부터 어깨까지 가로지르는 히틀러의 가죽끈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복으로 포장된 그의 살의 부드러움에 두근거리는 바그너적 황홀경에 빠진다. 나는 사랑의 행위 중에도 이같은 극도의 흥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
또 달리는 히틀러를 소재로 〈히틀러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Hitler,1938)〉라는 그림도 그렸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달리는 스페인에서 달아났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그를 "쥐새끼처럼 달아났다"며 비판했다. 달리의 자서전에 대한 1944 년의 주목할만한 연구에서,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사람들은 달리가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머리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말은 살바도르 달리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힘든 평가이기도 하다. 공화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에 까지 참전한 조지 오웰로서는 그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공화주의자편에 서지 않은 살바도르 달리를 좋게 평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달리의 개인적인 신념이고 그 신념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화주의자들이 내전에서 승리했더라면 과연 스페인의 운명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카탈로니아에 귀국 한 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권위주의 정권과 밀착했다. 달리의 성명 중 일부는 "스페인에 파괴적인 세력(공화주의자들)을 제거하는"것을 목표로 한 프랑코의 행동에 대해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달리는 프랑코에게 감옥에 갇힌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것을 칭찬하면서 전보를 보냈다. 그는 개인적으로 프랑코를 만났고, 프랑코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달리는 또 2차 세계대전 후 원자폭탄을 찬미하는〈멜랑코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1945)〉라는 그림도 그렸는데 멜랑코리라는 제목 덕분에 이 그림은 종종 전쟁의 비극과 핵폭탄에 대한 경고로 읽히곤 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달리는 또 비키니 섬에서 벌어진 핵실험을 소재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Three Sphinxes of Bikini,1947)〉라는 작품도 그렸다. CC-BY-SA 위키

대표작

Gala in the Window, CC-BY, Manuel González Olaechea, 위키
A Couple with Their Heads Full of Clouds, Fair use, wiki art
A Seated Man and a Dancing Couple, Pubilc Domain US, wiki art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CC-BY-SA, Europeana
CC-BY-SA, Wikimedia
CC-BY-SA, 위키


생애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 반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고흐가 태어나기 정확히 1년 전인 1852년 3월 30일 고흐의 형이 태어났으나, 얼마 못 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흐가 집안의 장남이었다. 1860년에 그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32km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회상하곤 했다. 1866년 9월 15일부터 1868년 3월까지 그는 틸뷔르흐에 위치한 제2 빌렘 칼리지에 다녔다. 고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불모스러운”시간이라고 했다.[2]
16살에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네 살 아래 동생이자 빈센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이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 모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보존되어 오다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그 편지들은 그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한 마음의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다음에는 파리로 발령했다.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76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 때,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켄트주의 감리교학교 램스게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1877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1878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결국 그는 6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80년에, 빈센트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Anton Mauve)[3]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1881년에 그는 과부인 사촌 케이 보스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는 매춘부 신 호르닉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엄격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그의 동생 테오도 그것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신 호르닉과 고흐는 성격차이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헤어졌다.
1885년과 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화를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다. [4]즉, 고흐의 그림 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그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는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들판으로 걸어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는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후, 심하게 앓고 난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매독을 앓다가 죽었다. 두 형제의 시신은 나란히 묻혔다.CC-BY-SA위키


대표작

De turfschuit, Europeana
The Cornshocks, Europeana
Still Life - Vase with Fifteen Sunflowers, CC-BY-SA, wikiart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Photograph by Ricard Canals. CC-BY-SA, wikipedia
photographed in 1953 by Paolo Monti CC-BY-SA, wikipedia
CC-BY-SA, 위키



생애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의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화가로 관립 미술학교 교사였고 피카소는 모친 마리아의 성(姓)을 계승하였다. 14세에 집안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갔으며, 피카소는 부친이 교편을 잡고 있던 그 곳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이 무렵에 이미 그는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의 사실(寫實)에 눈을 떴고 미술전에서 상을 받을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5세 때 그는 마드리드에 나와서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수업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프라도 미술관을 매일 다니다시피 명화를 감상하였는데 특히 그레코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로 부친과 관학파(官學派)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1901년에 당시 파리 몽마르트르의 술집을 근거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로 삼고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고 있던 화가 로트레크과 스텐렌의 작품에 이끌리어 파리의 땅을 밟게 되었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양친이 있는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자(敗殘者),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였다. 그러나 결코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대상에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그렸던 것이다. 대상은 짙은 블루의 거의 한 가지 색 속에 표현되고 있었다. 화면의 형체는 야위었고 선은 병적일 만큼 섬세하며, 색채는 어둡고 안타깝고 또한 아름답다. '눈물에 흥건히 젖은 예술, 촉촉한 계곡의 푸르름'(시인 아폴리네르의 평), 이것이 이른바 '청색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작품에는 <애정>, <늙은 유대인>,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유명하다.
이 시대를 이어 짧은 기간인 '분홍색의 시대'(1904∼1906)가 계속된다. 화면은 밝은 연분홍색으로 채색되고 간소한 형체 파악으로, 대상은 겨우 물 속에서 이제 막 떠올라와서 화면에 붙여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에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洗濯船)' (시인 막스 자콥의 명명)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와 연인도 사귀게 되어 시야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넓혀 갔다. 그는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공을 타는 소녀>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연예인을 많이 대상으로 하였다. 유명한 동판화 <살탐방크>(16점, 1913년 출판)의 제작도 거의 이 무렵이었다. 이 동판화는 유채(油彩)와 같이 방금이라도 형체를 잃을 것만 같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도 때로는 생생한 수법으로 돌아왔으며, 이 경향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큐비즘에 사실상의 종지부가 찍혀진 무렵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1917년 피카소에게 한 전기가 닥쳐온다. 이 해에 장 콕토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의 공동작업을 권유받은 피카소는 콕토와 더불어 로마에 갔다. 그리하여 같은 그 해에 일단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다시금 나폴리·폼페이·피렌체 등지로 고대와 르네상스의 미술행각을 한 후, 1920년 드디어 신고전주의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화풍(畵風)을 택했던 것이다. 이 이후의 3년간을 피카소의 '신고전파 시대'라 한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母子)'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유명하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세 사람의 음악가(音樂家)>와 같은 모순된 수법의 대작도 나왔으나, 1924년에는 다시 화면구성을 주로 하는 대정물(大靜物) 시리즈에 착수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기괴의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관여했다. 또한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보(變身譜)>와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는 걸작>에 고전주의적 수법인 동판화(銅版畵)에 의한 삽화를 그렸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물렀다. 이 체재의 선물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투우도(鬪牛圖)를 그렸다. 이 묘화(描畵)는 언제부터인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환상이 되어 이듬해에 아름다운 동판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1937년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무방비한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폭격하자 그는 즉시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렸다. 이것이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을 장식한 유명한 <게르니카>이다. 퀴비슴 이래에 오로지 예술의 범위 내에서만 행하여진 듯이 보인 규문(糾問)의 자세를 피카소는 <게르니카>로써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침략자를 향하여 규탄(糾彈)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石版畵)와 도기(陶器)의 제작에 열중하였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으나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평가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또 1950년대부터는 걸쳐서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이것을 자기의 양식화(樣式化)한 독특한 모작(模作)에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였다. CC-BY-SA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