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함태민(1514081)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8일 (일) 05:21 판 (새 문서: <onlyinclude> {|class="metadata" style="background:#f2f2f2; width:320px; margin: 5px 5px 5px 5px;" cellspacing="10" align="right" |- ! colspan="2" style="background:#3ca9a9; color:#f...)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 style="text-align:center;"|웹사이트 || 트위터[1], 페이스북[2] |}



생애

소개

대강 이런식 한국의 시인, 번역가. 1958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안재찬이다. '류시화'는 안재찬이 작품상에서 쓰는 필명으로 현재는 이 이름을 고정적으로 사용한다. 이 필명만 보고 류시화를 여성으로 착각했다가 아저씨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는 사람도 있다. 프로필로 쓰는 사진에서는 장발 스타일을 고수하기에 더더욱 착각하기 쉽다. 비슷한 장발을 하고 있는 이외수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창작 이외에도 외국 시를 번역하는 작업도 겸하는 편으로 실제 본인은 책을 많이 독파하는 독서광이라고 한다. 그것도 원어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해외여행도 하는 편으로 특히 인도를 방문하였던 때가 많았다. 탤런트 김혜자와도 친분이 있어서 함께 인도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김혜자 역시 류시화의 시를 좋아해서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들리는 여담으로는 같은 학교 선배의 본명을 허락받고 빌려 쓴 것이라고 한다. 그 선배는 '류시화'라는 이름이 이렇게 유명해질 줄 몰랐다고.

필생의 역작으로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인디언 연설문집이 있다. 무려 페이지가 1000쪽 가까이 되는 백과사전급의 책이다. 류시화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1958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재찬이다. 대광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고 1980년 <아침>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1980년-1982년까지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에 《시운동》에서 50여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시인은 전쟁이 나도 다락방에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1983년에 활동을 중단한다. 이 후 그는 안재찬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류시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또한 1988년부터 미국과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고 인도여행을 통해 명상가를 자처하기 시작, 인도 대표 명상가인 라즈니쉬의 주요서적들을 번역한다. 그는 1년에 약 100권의 명상서적을 원서로 읽는 독서광이라고 전해지며, 16년 동안 겨울이 오면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가이다. 1991년 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1996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펴냈다. 2012년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출간했다. 류시화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1958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재찬이다. 대광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고 1980년 <아침>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1980년-1982년까지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에 《시운동》에서 50여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시인은 전쟁이 나도 다락방에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1983년에 활동을 중단한다. 이 후 그는 안재찬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류시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또한 1988년부터 미국과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고 인도여행을 통해 명상가를 자처하기 시작, 인도 대표 명상가인 라즈니쉬의 주요서적들을 번역한다. 그는 1년에 약 100권의 명상서적을 원서로 읽는 독서광이라고 전해지며, 16년 동안 겨울이 오면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가이다. 1991년 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1996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펴냈다. 2012년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출간했다. 류시화(1958년, 충청북도 옥천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번역가이며 본명은 안재찬이다. 대광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는 서울 명륜동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함태민(咸兌旼, 1996~, 경기도 성남시) 1996년 성남에서 출생, 초등학교 4학년까지 성남에서 지내다가 경기도 광주로 이사하여 현재까지 지내고있음. 어렸을 때부터 게임과 스포츠를 즐기며 성장함. 현재는 한성대학교 에 재학중임. 혹자는 류시화의 시를 <입으로 순화된 시>라고 표현한다. 그는 시를 입으로 수백번 되뇌면서 결국, 독자들에게 낭송되어 쉬운 시를 만들어낸다. 시인 류시화가 되고 난 후 명상서적 번역을 시작했고 1988년부터 시작한 미국, 인도의 명상센터 생활과 인도여행을 통해 그는 명상가가 된다. 그는 2009년으로 16번째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가이기도 하다. 1980년 ~ 1983년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류시화는 대중적인 인기와 문단에서의 평가가 극과극으로 나뉘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때문에 문학지나 문예지에서는 류시화의 작품은 단 한 곳도 연재하지 않았던 편. 작가 본인은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세상과 단절하여 살아와서 폐쇄적인 성향이 짙다는 이유 등을 들어서 주류 문인들이 그의 시를 평가절하 하였다고 주장했다.

옥천

지도를 불러오는 중...

학력

학력
구분 학교명 비고
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경희대학교 졸업


작가 한 마디

2020년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中 "우리는 떠나게 되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다. 이 지구별에서는 우리가 얻은 어떤 물질도, 어떤 명성도 영원한 것일 수 없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다.또한 떠날 때는 그 모든 것을 놓고 빈손으로 가야 한다. 가혹한 규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규칙은 규칙이다. 그리고 이 우주의 더욱 가혹한 규칙은, 만일 우리가 여행의 목적을 잊어 버리고 여행지에 집착한다면 그 집착이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다시 그 장소에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YES24 작가 한 마디

작품

세계관

류시화 시인의 작품은 문단과 문예지에도 외면을 당하기도 했는데 안재찬으로 활동했을 당시,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로 인해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외계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민중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의 문단에서 현실 도피의 소지를 제공한다며 비난을 받았으며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고 세속적 욕망에 맞춰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 이문재씨는 류시화의 시가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세계를 유지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20여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큰 변화 못지 않은 견딤이라 평가하기도 하였다. 류시화의 시는 일상 언어들을 사용해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어, 걸림없이 마음에 걸어들어오면서 결코 쉽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무게로 삶을 잡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낯익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낯설음의 세계를 재발견하는 시세계를 한껏 선사해왔다

작품목록

시집

번역서

명상집

수필집

평가

문단의 평가

누구(어떤 직업)ㅁㄴㅇㅁㄴㅇㅁㄴㅇ[어떤 책. 누구. 출판사. 시기2020] 안재찬으로 활동했을 당시, 류시화는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를 선보였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평론집 <바벨탑의 언어> 를 통해 류시화 시인의 시 세계를 특정하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이렇게 언급한다. "안재찬(류시화)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상상력의 움직임은 외부로 확산하려는 힘과 내부로 수렴하려는 두 힘의 갈등이며, 그 중 항상 후자가 전자보다 우위에 있다. 그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민중주의자들에게 현실 도피라는 비난을 받을 수지를 안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앞만 바라보며 바빠 나아가는 이때, '온 곳으로 되돌아가며'라고 노래하는 그의 낮은 음성 속엔 우리가 경청할 만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그이지만 문단과 언론에는 인정받지 못한 시인이기도 하다. 문단 시인들은 류시화의 시같이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고 세속적 욕망에 맞춰 쓴 것은 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시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글이 아닌 대중이 노력하여 다가가야 하는 장르인데, 류시화 시인의 글은 전자에 속한다고 비판한다.

류시화 시인의 작품은 문단과 문예지에도 외면당한다. 1997년 <죽비소리>에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은 "저급함도 역겨움도 모르는 외눈박이 독자들에게나 매혹적인 시집"이라 혹평한다.

류시화와 경희대학교 동문인 시인 이문재는 이례적으로 류시화 시인의 작품과 당시 문단이 바라보는 류시화 시인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의 시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얼핏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가 세상과 격절된 상태로 20대 중후반을 지내왔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댈 수도 있지만, 저 들끓던 80년대에서 자기를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변화 못지 않은 견딤으로 본다. (중략) 일상언어들의 직조를 통해, 어렵지 않은 보통의 구문으로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그의 시의 주요한 미덕이다. 낯익음 속에 감춰져 있는 낯설음의 세계를 발견해내는 것이 시의 가장 큰 역할은 아닐까. 그의 시를 비롯 시운동 초기의 시편들은 당시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참담했는데, 돌을 던지는 그들의 관점은 그의 시가 '발명품'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발명이 아닌 발견이다."


대중의 평가

류시화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1989년~1998년 동안 21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는 《시로 여는 세상》 2002년 여름호에서 대학생 53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이름을 올렸으며 명지대학교 김재윤 교수의 논문 설문조사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10위, 21세기 주목해야할 시인 1위,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윤동주 시인 다음으로 지목된다. 또한 류시화의 시는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낭송되는 시이기도 하다.[출처 필요](저작권협회 집계) 독자층에서는 필력이 좋은 평가를 받는, 대학생 및 젊은층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서점가에서 류시화의 시집은 물론 번역물까지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도 많다. 교보문고에서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시집 판매 순위를 집계한 결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2005)이 1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1998)이 2위,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2012)가 5위에 올랐다.


동료 작가의 평가

연구자의 평가

류시화의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숭실대학교 이옥순 박사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서에서 '우리 작가들이 인도를 보는 눈이 100년 전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인도를 바라보는 눈과 놀랍도록 똑같다'고 하며 류시화 시인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에 대해 '다 명상가 같고 철학자 같은 하층민들을 만나지만 인도를 단일한 세계, 작은 마을로 단순화하는 맹점을 보인다. 절대적 빈곤상태의 하층민들은 정말 가난해도 행복한가?'라고 비판한다. 류시화가 '평가절하 되었다' 라는 표현은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일단 80년대에 류시화의 시가 주목받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문단의 취향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문학사를 잠시만 공부해 보면 알 수 있지만 80년대 한국 문단의 최대 관심사는 정치적 문제, 즉 막바지에 이른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고, 개인의 내면에 천착하는 경향이 강한 류시화의 시는 당시의 경향과 거리가 멀었다. 류시화의 활동 이력을 보면, 80~82년까지 '시운동'지를 통해 50여편의 시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83년부터 명상서적 번역을 시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80년대 류시화의 작품이 왜 문예지에 실리거나 평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가능하다. 활동이 없으니 평가도 없다.

안재찬은 1988년부터 '류시화'라는 이름으로 주로 외국 명상서적을 번역하면서 다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류시화가 다시 문학 창작 영역에 복귀한 것은 1991년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출판한 뒤로, 류시화의 창작활동은 자신이 쓴 시를 출판사에 그대로 넘겨서 출판하는 스타일이었다. 즉, 문예지를 통해 시를 발표하고, 이에 대한 비평활동을 거친 후 시집을 출판하는 통상적인 시작 활동이 아니었다. 따라서, 90년대 이후 문예지들이 류시화의 작품을 게재하지 않은 이유 역시 간단하다. 류시화가 자기 시를 문예지에 기고하지 않았다.(...) 문학 잡지는 작가가 기고한 시를 싣는 잡지지 이미 출판된 시를 가져다 싣는 잡지가 아니다. 90년대 이후 류시화의 창작활동에 대한 전문 문학평론가들의 평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은 문예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저작권 등의 이유로 류시화의 작품은 문예지에서 비평하기가 어렵다. 류시화의 시 자체가 비유나 은폐를 중시하는 근현대 시의 기술적 흐름과는 많이 동떨어지기 때문에 류시화 시를 문학비평하는 평론가가 별로 없다고 보는 사람 또한 많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류시화가 문학계를 떠나 새로운 자기 자리를 잡은 것이지, 문단이 류시화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한 것이 아니다.


수상 내역

  • 제25회 경희문인회 경희문학상
  • 제3회 한국저축은행 제비꽃시인상



관련 자료

관련 웹사이트

트위터[3] 페이스북[4]


관련 기사/칼럼자료

  • 4월호 커버 스토리 - 류시화 “덜 움츠리고 덜 비난하고 더 많이 예찬하라" 채널 예스[5]
  • 25회 경희문학상에 극작가 신봉승·시인 류시화[6]


학술논문

  • 유성호. "류시화 시의 대중문학적 속성" 대중서사연구 VOL.- NO.29 (2013):117-139
  • 정효구,Jeong Hyo-Gu.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읽고" 출판저널 VOL.223 NO.- (1997):17-17
  • 신연옥(서평자). "삶을 사람, 공감, 소통, 성찰, 고독으로 채우다 :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특수교육논총 VOL.35 NO.3 (2019):251-257

평가

  • 이경철. “80·90년대의 대중시 읽기” [동국대 한국문학연구 20 (1998.3) pp.83-104]


관련 영상자료

  • 시로납치하다 - 시인의 삶과 시(류시화 해설)

[7]

  • [문학]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https://youtu.be/0gL9dhCRC1U

관계도

네트워크 그래프

중앙


RDF

DOMAIN(A) RANGE(B) RELATION 설명
류시화 충청남도 옥천 태어나다 A는 B에서 태어났다.
류시화 대표시 창작하다 A는 B를 창작했다.
류시화 대표수필 창작하다 A는 B를 창작했다.
류시화 대표명상 창작하다 A는 B를 창작했다.
류시화 대표번역 번역하다 A는 B를 번역했다.
류시화 안재찬 필명 A는 B의 필명이다.
경희문학상 수상하다 A는 B를 수상했다.
류시화 동인 동아리 활동하다 A는 B에 활동했다.


출처

  • 네이버 인물검색 류시화[8]
  • 위키백과 류시화[9]
  • 한국현대문학대사전[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