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된 감상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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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심야(深夜) 악가(樂歌)처럼 만사(萬事)를 잊고 곤(困)한 춘몽(春夢)에 잠겼을 때 돌연(突然)히 옆으로서 잠잠한 밤을 깨트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벼락같이 난다.
 
이러한 심야(深夜) 악가(樂歌)처럼 만사(萬事)를 잊고 곤(困)한 춘몽(春夢)에 잠겼을 때 돌연(突然)히 옆으로서 잠잠한 밤을 깨트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벼락같이 난다.
  
이때에 나의 영혼(靈魂)은 꽃밭에서 동모(同侔*동무)들과 끊임없이 웃어가며 평화(平和)의 노래를 부르다가 참혹(慘酷)히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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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나의 영혼(靈魂)은 꽃밭에서 동모(同侔*동무)들과 끊임없이 웃어가며 평화(平和)의 노래를 부르다가 참혹(慘酷)히 쫓겨났다.
  
나는 벌써 만(萬) 일개(一個)년간(年間)을 두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每日) 밤에 이러한 곤경(困境)을 당(當)하여 옴으로 이렇게 “으아”하는 첫소리가 들리자 “아이구, 또”하는 말이 부지불각(不知不覺) 중(中) 나오며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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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써 만(萬) 일개(一個)년간(年間)을 두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每日) 밤에 이러한 곤경(困境)을 당(當)하여 옴으로 이렇게 “으아”하는 첫소리가 들리자 “아이구, 또”하는 말이 부지불각(不知不覺) 중(中) 나오며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어서 속(速)히 면(免)하려고 신식(新式)차려 정(定)하는 규칙(規則)도 집어치우고 젖을 대주었다. 유아(幼兒)는 몇 모금 꿀떡꿀떡 넘기다가 젖꼭지를 스르르 놓고 쌕쌕하며 깊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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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서 속(速)히 면(免)하려고 신식(新式)차려 정(定)하는 규칙(規則)도 집어치우고 젖을 대주었다. 유아(幼兒)는 몇 모금 꿀떡꿀떡 넘기다가 젖꼭지를 스르르 놓고 쌕쌕하며 깊이 잠이 들었다.
  
나는 비로소 시원해서 돌아누우나 나의 잠은 벌써 서천서역국(西天西域國)으로 속거천리(速去千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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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로소 시원해서 돌아누우나 나의 잠은 벌써 서천서역국(西天西域國)으로 속거천리(速去千里)하였다.
  
그리하여 다만 방(房) 한 가운데에 늘어져 환히 켜 있는 전등(電燈)을 향(向)하여 눈방울을 자주 굴릴 따름, 과거(過去)의 학창시대(學窓時代)로부터 현재(現在)의 가정생활(家庭生活), 또 미래(未來)는 어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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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다만 방(房) 한 가운데에 늘어져 환히 켜 있는 전등(電燈)을 향(向)하여 눈방울을 자주 굴릴 따름, 과거(過去)의 학창시대(學窓時代)로부터 현재(現在)의 가정생활(家庭生活), 또 미래(未來)는 어찌 될까!
  
이렇게 인생(人生)에 대(對)한 큰 의문(疑問), 그것에 대(對)한 나의 무식(無識)한 대답(對答), 고(苦)로부터 시작(始作)하였으나 필경(畢竟)은 자미(滋味)롭게 밤을 새우는 것이 병적(病的)으로 습관성(習慣性)이 되다시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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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생(人生)에 대(對)한 큰 의문(疑問), 그것에 대(對)한 나의 무식(無識)한 대답(對答), 고(苦)로부터 시작(始作)하였으나 필경(畢竟)은 자미(滋味)롭게 밤을 새우는 것이 병적(病的)으로 습관성(習慣性)이 되다시피 하였다.
  
정직(正直)히 자백(自白)하면 내가 전(前)에 생각하든 바와 지금(只今) 당(當)하는 사실(事實)중(中)에 모순(矛盾)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어느 틈에 내가 처(妻)가 되고 모(母)가 되었나? 생각하면 확실(確實)히 꿈 속 일이다. 내가 때때로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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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正直)히 자백(自白)하면 내가 전(前)에 생각하든 바와 지금(只今) 당(當)하는 사실(事實)중(中)에 모순(矛盾)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어느 틈에 내가 처(妻)가 되고 모(母)가 되었나? 생각하면 확실(確實)히 꿈 속 일이다. 내가 때때로 말하는
  
「공상(空想)도 분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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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空想)도 분수가 있지!」
  
하는 간단(簡單)한 경탄어(驚歎語)가 만(滿)이(二)개년(個年)간(間) 사회(社會)에 대(對)한 가정(家庭)에 대(對)한 다소(多少)의 쓴맛 단맛을 맛본 나머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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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간단(簡單)한 경탄어(驚歎語)가 만(滿)이(二)개년(個年)간(間) 사회(社會)에 대(對)한 가정(家庭)에 대(對)한 다소(多少)의 쓴맛 단맛을 맛본 나머지의 말이다.
  
실(實)로 나는 짜릿짜릿하고 부르르 떨리며 달고 열(熱)나는 소위(所謂) 사랑의 꿈은 꾸고 있었을지언정 그 생활(生活)에 비장(秘藏)된 반찬 걱정, 옷 걱정, 쌀 걱정, 나무 걱정, 더럽고 게으르고 속이기 좋아하는 하인(下人)과 싸움으로부터 접객(接客)에 대(對)한 범절(凡節), 친척(親戚)에 대(對)한 의리(義利), 일언일동(一言一動)이 모두 남을 위(爲)하여 살아야 할 소위(所謂) 가정(家庭)이란 것이 있는 줄 뉘 알았겠으며 더구나 빨아댈 새 없이 적셔 내놓는 기저귀며 주야(晝夜)불문(不問)하고 단조(單調)로운 목소리로 쌕쌕 우는 소위(所謂) 자식(子息)이라는 것이 생기어 내 몸이 쇠약(衰弱)해지고 내 정신(精神)이 혼미(昏迷)하여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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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實)로 나는 짜릿짜릿하고 부르르 떨리며 달고 열(熱)나는 소위(所謂) 사랑의 꿈은 꾸고 있었을지언정 그 생활(生活)에 비장(秘藏)된 반찬 걱정, 옷 걱정, 쌀 걱정, 나무 걱정, 더럽고 게으르고 속이기 좋아하는 하인(下人)과 싸움으로부터 접객(接客)에 대(對)한 범절(凡節), 친척(親戚)에 대(對)한 의리(義利), 일언일동(一言一動)이 모두 남을 위(爲)하여 살아야 할 소위(所謂) 가정(家庭)이란 것이 있는 줄 뉘 알았겠으며 더구나 빨아댈 새 없이 적셔 내놓는 기저귀며 주야(晝夜)불문(不問)하고 단조(單調)로운 목소리로 쌕쌕 우는 소위(所謂) 자식(子息)이라는 것이 생기어 내 몸이 쇠약(衰弱)해지고 내 정신(精神)이 혼미(昏迷)하여져서
  
「내 평생(平生) 소원(所願)은 잠이나 실컷 자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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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平生) 소원(所願)은 잠이나 실컷 자보았으면.」
  
하게 될 줄이야 뉘라서 상상(想像)이나 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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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될 줄이야 뉘라서 상상(想像)이나 하였으랴.
  
그러나 불평(不平)을 말하고 싶은 것보다 인생(人生)에 대(對)하야 의문(疑問)이 자라가며, 후회(後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한 가지 맛을 봄을 행복(幸福)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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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평(不平)을 말하고 싶은 것보다 인생(人生)에 대(對)하야 의문(疑問)이 자라가며, 후회(後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한 가지 맛을 봄을 행복(幸福)으로 안다.
  
그리하여 내 앞에는 장차(將次) 더한 고통(苦痛), 더한 희망(希望), 더한 낙담(落膽)이 있기를 바라며 그것에 지지 않을 만한 수양(修養)과 노력(努力)을 일삼아 가려는 동시(同時)에 정월(晶月)의 대명사(代名詞)인 나열(羅悅)의 모(母)는, 모(母)될 때로 모(母)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異常)한 심리(心理) 중(中)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新式) 모(母)님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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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내 앞에는 장차(將次) 더한 고통(苦痛), 더한 희망(希望), 더한 낙담(落膽)이 있기를 바라며 그것에 지지 않을 만한 수양(修養)과 노력(努力)을 일삼아 가려는 동시(同時)에 정월(晶月)의 대명사(代名詞)인 나열(羅悅)의 모(母)는, 모(母)될 때로 모(母)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異常)한 심리(心理) 중(中)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新式) 모(母)님들께
  
「그러지 않습니까. 아니, 그랬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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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습니까. 아니, 그랬었지요.」
  
라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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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묻고 싶다.
  
재작년(再昨年) 즉(卽) 일천구백이십 년(一千九百二十年) 구월(九月) 중순(中旬) 경(頃)이었다. 그때 나는 경성(京城) 인사동(人寺洞) 자택(自宅) 이층(二層)에 와석(臥席)하여 내객(來客)을 사절(謝絶)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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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再昨年) 즉(卽) 일천구백이십 년(一千九百二十年) 구월(九月) 중순(中旬) 경(頃)이었다. 그때 나는 경성(京城) 인사동(人寺洞) 자택(自宅) 이층(二層)에 와석(臥席)하여 내객(來客)을 사절(謝絶)하였었다.
  
나는 원래(元來) 평시(平時)부터 호흡불순(呼吸不順)과 소화불량(消化不良)병(病)이 있음으로 별(別)로 걱정할 것도 없었으나, 이상(異常)스럽게 구토증(嘔吐症)이 생(生)기고 촉감(觸感)이 예민(銳敏)해지며 식욕(食慾)이 부진(不進)할 뿐 아니라, 싫고 좋은 식물(食物)선택(選擇) 구별(區別)이 너무 정확(精確)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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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元來) 평시(平時)부터 호흡불순(呼吸不順)과 소화불량(消化不良)병(病)이 있음으로 별(別)로 걱정할 것도 없었으나, 이상(異常)스럽게 구토증(嘔吐症)이 생(生)기고 촉감(觸感)이 예민(銳敏)해지며 식욕(食慾)이 부진(不進)할 뿐 아니라, 싫고 좋은 식물(食物)선택(選擇) 구별(區別)이 너무 정확(精確)해졌다.
  
그래서 언젠지 철없이 고만 불쑥 증세(症勢)를 말했더니 옆에 있던 경험(經驗)있는 부인(夫人)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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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젠지 철없이 고만 불쑥 증세(症勢)를 말했더니 옆에 있던 경험(經驗)있는 부인(夫人)이
  
 
‘그것은 태기(胎氣)요’
 
‘그것은 태기(胎氣)요’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내놓은 말을 다시 주워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果然)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요, 몰랐던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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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내놓은 말을 다시 주워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果然)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요, 몰랐던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나는 먹을 수 없는 밥도 먹고 할 수 없는 일도 하여 참을 수 있는 대로 참아가며 그 후(後)로는 ‘그 말’은 일절(一切)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어찌하면 그네들로 의심(疑心)을 풀게 할까 하는 것이 유일(唯一)의 심려(心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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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로부터 나는 먹을 수 없는 밥도 먹고 할 수 없는 일도 하여 참을 수 있는 대로 참아가며 그 후(後)로는 ‘그 말’은 일절(一切)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어찌하면 그네들로 의심(疑心)을 풀게 할까 하는 것이 유일(唯一)의 심려(心慮)이었다.
  
그러나 증세(症勢)는 점점(漸漸) 심(甚)하여져서 인제는 참을 수도 없으려니와 참고 말 아니 하는 것으로만 도저히 그네들의 입을 틀어 막을 방패가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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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증세(症勢)는 점점(漸漸) 심(甚)하여져서 인제는 참을 수도 없으려니와 참고 말 아니 하는 것으로만 도저히 그네들의 입을 틀어 막을 방패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싫다. 한 사람 더 알아질수록 정말 싫다. 마치 내 마음으로 ‘그런 듯’하게 몽상(夢想)하는 것을 그네들 입으로 ‘그렇게’ 구체화(具體化)하려고 하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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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래도 싫다. 한 사람 더 알아질수록 정말 싫다. 마치 내 마음으로 ‘그런 듯’하게 몽상(夢想)하는 것을 그네들 입으로 ‘그렇게’ 구체화(具體化)하려고 하는 듯싶었다.
  
어쩌면 그다지도 몹시 밉고 싫고 원망(怨望)스러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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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다지도 몹시 밉고 싫고 원망(怨望)스러웠던지!
  
그리하여 이것이 혹시(或是) 꿈 속 일이나 되었으면! 언제나 속(速)히 이 꿈이 반짝 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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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것이 혹시(或是) 꿈 속 일이나 되었으면! 언제나 속(速)히 이 꿈이 반짝 깨어
  
「도무지 그런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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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그런 일 없다.」
  
하여질꼬? 아니 그럴 때가 꼭 있겠지 하며 바랄 뿐 아니라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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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질꼬? 아니 그럴 때가 꼭 있겠지 하며 바랄 뿐 아니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미구(未久)에 믿던 바 꿈이 조금 씩(式) 깨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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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구(未久)에 믿던 바 꿈이 조금 씩(式) 깨어져왔다.
  
「도무지 그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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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그럴 리 없다.」
  
고 고집을 세울 용기(勇氣)는 없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해(兒孩)다, 태기(胎氣)다, 임신(妊娠)이다, 라고 꼭 집어내기는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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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집을 세울 용기(勇氣)는 없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해(兒孩)다, 태기(胎氣)다, 임신(妊娠)이다, 라고 꼭 집어내기는 싫었다.
  
그런 중(中)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始作)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으쓱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宛然)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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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중(中)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始作)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으쓱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宛然)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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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모든 사람의 말은 나를 저주(咀呪)하는 것 같고 바람에 날려 들리는 웃음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탕탕 부딪고 엉엉 울고도 싶었고 내 살을 꼬집어 뜯어 줄줄 흐르는 빨간 피를 또렷또렷 보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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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말은 나를 저주(咀呪)하는 것 같고 바람에 날려 들리는 웃음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탕탕 부딪고 엉엉 울고도 싶었고 내 살을 꼬집어 뜯어 줄줄 흐르는 빨간 피를 또렷또렷 보고도 싶었다.
  
아아, 기쁘기커녕 수심(愁心)에 싸일 뿐이오, 우습기커녕 부쩍부쩍 가슴을 태울 뿐이었다. 책임(責任) 면(免)하려고 시집가라 강권(强勸)하던 형제(兄弟)들의 소위(所謂)가 괘씸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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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기쁘기커녕 수심(愁心)에 싸일 뿐이오, 우습기커녕 부쩍부쩍 가슴을 태울 뿐이었다. 책임(責任) 면(免)하려고 시집가라 강권(强勸)하던 형제(兄弟)들의 소위(所謂)가 괘씸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너 아니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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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니면 죽겠다’
  
하여 결국(結局) 제 성욕(性慾)을 만족(滿足)케 하던 남편은 원망스럽고 한 사람이라도 어서 속(速)히 생활(生活)이 안정(安定)되기를 희망(希望)하던 친구(親舊)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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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결국(結局) 제 성욕(性慾)을 만족(滿足)케 하던 남편은 원망스럽고 한 사람이라도 어서 속(速)히 생활(生活)이 안정(安定)되기를 희망(希望)하던 친구(親舊)님네,
  
「내 몸 보니, 속 시원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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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보니, 속 시원하겠소.」
  
하며 들이대고 싶으니만치 악(惡)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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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들이대고 싶으니만치 악(惡)만 났다.
  
그때에 나의 둔(鈍)한 뇌(腦)로 어찌 능(能)히 장차(將次) 닥쳐오는 고통(苦痛)과 속박(束縛)을 추측(推測)하였을까. 나는 다만 여러 부인(夫人)들께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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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나의 둔(鈍)한 뇌(腦)로 어찌 능(能)히 장차(將次) 닥쳐오는 고통(苦痛)과 속박(束縛)을 추측(推測)하였을까. 나는 다만 여러 부인(夫人)들께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왔을 뿐이었다.
  
「여자(女子)가 공부(工夫)는 해서 무엇 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나면 볼 일 다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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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女子)가 공부(工夫)는 해서 무엇 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나면 볼 일 다 보았지!」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든지 코웃음으로 대답(對答)할 뿐이오, 들을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理) 만무(萬無)하다는 신념(信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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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든지 코웃음으로 대답(對答)할 뿐이오, 들을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理) 만무(萬無)하다는 신념(信念)이 있었다.
  
이것은 공상(空想)이 아니라 구미(歐米)각국(各國) 부인(婦人)들의 활동(活動)을 보던지, 또 제일(第一) 가까운 일본(日本)에도 여사야 정자(與謝野 晶子*요사노 아키코)는 십여(十餘) 인(人)의 모(母)로서 매삭(每朔) 논문(論文)과 시가(詩歌)창작(創作)으로부터 그의 독서(讀書)하는 것을 보면 확실(確實)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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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공상(空想)이 아니라 구미(歐米)각국(各國) 부인(婦人)들의 활동(活動)을 보던지, 또 제일(第一) 가까운 일본(日本)에도 여사야 정자(與謝野 晶子*요사노 아키코)는 십여(十餘) 인(人)의 모(母)로서 매삭(每朔) 논문(論文)과 시가(詩歌)창작(創作)으로부터 그의 독서(讀書)하는 것을 보면 확실(確實)히
  
「아니하려니까 그렇지? 다 같은 사람 다 같은 여자(女子)로 하필(何必) 그 사람에게만 이런 능력(能力)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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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하려니까 그렇지? 다 같은 사람 다 같은 여자(女子)로 하필(何必) 그 사람에게만 이런 능력(能力)이 있으랴」
  
싶은 마음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잘 생각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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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마음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잘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런 말을 하는 부인(夫人)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욱 절대(絶對)로 부인(否認)하고 결국(結局) 나는 그네들 이상(以上)의 능력(能力)이 있는 자(者)로 자처(自處)하면서도 언제든지 꺼림직한 숙제(宿題)가 내 뇌(腦) 속에 횡행(橫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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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런 말을 하는 부인(夫人)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욱 절대(絶對)로 부인(否認)하고 결국(結局) 나는 그네들 이상(以上)의 능력(能力)이 있는 자(者)로 자처(自處)하면서도 언제든지 꺼림직한 숙제(宿題)가 내 뇌(腦) 속에 횡행(橫行)했었다.
  
그러나 그 부인(夫人)들은 이구동언(異口同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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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부인(夫人)들은 이구동언(異口同言)으로,
  
「네 생각은 결국(結局) 공상(空想)이다. 오냐, 당(當)해 보아라. 너도 별(別)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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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생각은 결국(結局) 공상(空想)이다. 오냐, 당(當)해 보아라. 너도 별(別) 수 없지」
  
하며 나의 의견(意見)을 부인(否認)하였다. 과연(果然) 연전(年前)까지 나와 같이 앉아서 부인(夫人)네들을 비난(非難)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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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의 의견(意見)을 부인(否認)하였다. 과연(果然) 연전(年前)까지 나와 같이 앉아서 부인(夫人)네들을 비난(非難)하며
  
「나는 그렇게 아니 살 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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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아니 살 터이야.」
  
하던 고등교육(高等敎育) 받은 신여자(新女子)들을 보아도 별(別) 다른 것 보이지 아닐 뿐이라. 구식(舊式) 부인(夫人)들과 같은 살림으로 일 년(一年) 이 년(二年) 예사(例事)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무리 전(前)에 말하던 구식(舊式) 부인(夫人)들은 신용(信用)할 수 없더라도 이 신부인(新夫人)의 가정(家庭)만은 신용(信用)하고 싶었었다. 그것은 결(決)코 개선(改善)할만한 능력(能力)과 지식(知識)과 용기(勇氣)가 없지 않다. 그러면 누구든지 시집가고 아이 낳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되지 않고는 아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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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고등교육(高等敎育) 받은 신여자(新女子)들을 보아도 별(別) 다른 것 보이지 아닐 뿐이라. 구식(舊式) 부인(夫人)들과 같은 살림으로 일 년(一年) 이 년(二年) 예사(例事)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무리 전(前)에 말하던 구식(舊式) 부인(夫人)들은 신용(信用)할 수 없더라도 이 신부인(新夫人)의 가정(家庭)만은 신용(信用)하고 싶었었다. 그것은 결(決)코 개선(改善)할만한 능력(能力)과 지식(知識)과 용기(勇氣)가 없지 않다. 그러면 누구든지 시집가고 아이 낳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되지 않고는 아니 되나?
  
그러면 나는 그 고뇌(苦惱)에 빠지는 초보(初步)에 있다. 마치 눈 뜨고 물에 빠지는 격(格)이었다. 실(實)로 앞이 캄캄하여 올 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하여 세상(世上) 일을 잊고 단잠에 잠겼을 때라도 누가 곁에서 바늘 끝으로 찌르는 것 같이 별안간(間) 깜짝 놀라 깨어졌다. 이러한 때는 체온(體溫)이 차졌다 더워졌다 말랐다 땀이 흘렀다 하여 조바심이 나서 마치 저울에 물건(物件)을 달 때 접시에 담긴 것이 쑥 내려지고 추(錘)가 훨씬 오르는 것 같이 내 몸은 부쩍 공중(空中)으로 떠오르고 머리는 천근만근(千斤萬斤)으로 무거워 축 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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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그 고뇌(苦惱)에 빠지는 초보(初步)에 있다. 마치 눈 뜨고 물에 빠지는 격(格)이었다. 실(實)로 앞이 캄캄하여 올 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하여 세상(世上) 일을 잊고 단잠에 잠겼을 때라도 누가 곁에서 바늘 끝으로 찌르는 것 같이 별안간(間) 깜짝 놀라 깨어졌다. 이러한 때는 체온(體溫)이 차졌다 더워졌다 말랐다 땀이 흘렀다 하여 조바심이 나서 마치 저울에 물건(物件)을 달 때 접시에 담긴 것이 쑥 내려지고 추(錘)가 훨씬 오르는 것 같이 내 몸은 부쩍 공중(空中)으로 떠오르고 머리는 천근만근(千斤萬斤)으로 무거워 축 처져버렸다.
  
너무나 억울하였다. 자연(自然)이 광풍(狂風)을 보내서 겨우 방긋한 꽃봉올리를 참혹(慘酷)히 꺾어버린다 하면 다시 뉘게 애소(哀素)할 곳이 있으리오마는 그래도 설마 자연(自然)만은 그럴 리(理) 없을 듯하여! 애원(哀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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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억울하였다. 자연(自然)이 광풍(狂風)을 보내서 겨우 방긋한 꽃봉올리를 참혹(慘酷)히 꺾어버린다 하면 다시 뉘게 애소(哀素)할 곳이 있으리오마는 그래도 설마 자연(自然)만은 그럴 리(理) 없을 듯하여! 애원(哀願)하고 싶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도 또 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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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도 또 있겠느냐?」고.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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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떼려고 하는 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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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떼려고 하는 때이었다.
  
예술(藝術)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人生)인지 조선(朝鮮)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女子)는 이리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決)코 타인(他人)에게 미룰 것이 아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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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藝術)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人生)인지 조선(朝鮮)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女子)는 이리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決)코 타인(他人)에게 미룰 것이 아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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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7일 (화) 22:51 판

원문

1

이러한 심야(深夜) 악가(樂歌)처럼 만사(萬事)를 잊고 곤(困)한 춘몽(春夢)에 잠겼을 때 돌연(突然)히 옆으로서 잠잠한 밤을 깨트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벼락같이 난다.

이때에 나의 영혼(靈魂)은 꽃밭에서 동모(同侔*동무)들과 끊임없이 웃어가며 평화(平和)의 노래를 부르다가 참혹(慘酷)히 쫓겨났다.

나는 벌써 만(萬) 일개(一個)년간(年間)을 두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每日) 밤에 이러한 곤경(困境)을 당(當)하여 옴으로 이렇게 “으아”하는 첫소리가 들리자 “아이구, 또”하는 말이 부지불각(不知不覺) 중(中) 나오며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어서 속(速)히 면(免)하려고 신식(新式)차려 정(定)하는 규칙(規則)도 집어치우고 젖을 대주었다. 유아(幼兒)는 몇 모금 꿀떡꿀떡 넘기다가 젖꼭지를 스르르 놓고 쌕쌕하며 깊이 잠이 들었다.

나는 비로소 시원해서 돌아누우나 나의 잠은 벌써 서천서역국(西天西域國)으로 속거천리(速去千里)하였다.

그리하여 다만 방(房) 한 가운데에 늘어져 환히 켜 있는 전등(電燈)을 향(向)하여 눈방울을 자주 굴릴 따름, 과거(過去)의 학창시대(學窓時代)로부터 현재(現在)의 가정생활(家庭生活), 또 미래(未來)는 어찌 될까!

이렇게 인생(人生)에 대(對)한 큰 의문(疑問), 그것에 대(對)한 나의 무식(無識)한 대답(對答), 고(苦)로부터 시작(始作)하였으나 필경(畢竟)은 자미(滋味)롭게 밤을 새우는 것이 병적(病的)으로 습관성(習慣性)이 되다시피 하였다.

정직(正直)히 자백(自白)하면 내가 전(前)에 생각하든 바와 지금(只今) 당(當)하는 사실(事實)중(中)에 모순(矛盾)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어느 틈에 내가 처(妻)가 되고 모(母)가 되었나? 생각하면 확실(確實)히 꿈 속 일이다. 내가 때때로 말하는

「공상(空想)도 분수가 있지!」

하는 간단(簡單)한 경탄어(驚歎語)가 만(滿)이(二)개년(個年)간(間) 사회(社會)에 대(對)한 가정(家庭)에 대(對)한 다소(多少)의 쓴맛 단맛을 맛본 나머지의 말이다.

실(實)로 나는 짜릿짜릿하고 부르르 떨리며 달고 열(熱)나는 소위(所謂) 사랑의 꿈은 꾸고 있었을지언정 그 생활(生活)에 비장(秘藏)된 반찬 걱정, 옷 걱정, 쌀 걱정, 나무 걱정, 더럽고 게으르고 속이기 좋아하는 하인(下人)과 싸움으로부터 접객(接客)에 대(對)한 범절(凡節), 친척(親戚)에 대(對)한 의리(義利), 일언일동(一言一動)이 모두 남을 위(爲)하여 살아야 할 소위(所謂) 가정(家庭)이란 것이 있는 줄 뉘 알았겠으며 더구나 빨아댈 새 없이 적셔 내놓는 기저귀며 주야(晝夜)불문(不問)하고 단조(單調)로운 목소리로 쌕쌕 우는 소위(所謂) 자식(子息)이라는 것이 생기어 내 몸이 쇠약(衰弱)해지고 내 정신(精神)이 혼미(昏迷)하여져서

「내 평생(平生) 소원(所願)은 잠이나 실컷 자보았으면.」

하게 될 줄이야 뉘라서 상상(想像)이나 하였으랴.

그러나 불평(不平)을 말하고 싶은 것보다 인생(人生)에 대(對)하야 의문(疑問)이 자라가며, 후회(後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한 가지 맛을 봄을 행복(幸福)으로 안다.

그리하여 내 앞에는 장차(將次) 더한 고통(苦痛), 더한 희망(希望), 더한 낙담(落膽)이 있기를 바라며 그것에 지지 않을 만한 수양(修養)과 노력(努力)을 일삼아 가려는 동시(同時)에 정월(晶月)의 대명사(代名詞)인 나열(羅悅)의 모(母)는, 모(母)될 때로 모(母)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異常)한 심리(心理) 중(中)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新式) 모(母)님들께

「그러지 않습니까. 아니, 그랬었지요.」

라고 묻고 싶다.

재작년(再昨年) 즉(卽) 일천구백이십 년(一千九百二十年) 구월(九月) 중순(中旬) 경(頃)이었다. 그때 나는 경성(京城) 인사동(人寺洞) 자택(自宅) 이층(二層)에 와석(臥席)하여 내객(來客)을 사절(謝絶)하였었다.

나는 원래(元來) 평시(平時)부터 호흡불순(呼吸不順)과 소화불량(消化不良)병(病)이 있음으로 별(別)로 걱정할 것도 없었으나, 이상(異常)스럽게 구토증(嘔吐症)이 생(生)기고 촉감(觸感)이 예민(銳敏)해지며 식욕(食慾)이 부진(不進)할 뿐 아니라, 싫고 좋은 식물(食物)선택(選擇) 구별(區別)이 너무 정확(精確)해졌다.

그래서 언젠지 철없이 고만 불쑥 증세(症勢)를 말했더니 옆에 있던 경험(經驗)있는 부인(夫人)이

‘그것은 태기(胎氣)요’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내놓은 말을 다시 주워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果然)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요, 몰랐던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나는 먹을 수 없는 밥도 먹고 할 수 없는 일도 하여 참을 수 있는 대로 참아가며 그 후(後)로는 ‘그 말’은 일절(一切)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어찌하면 그네들로 의심(疑心)을 풀게 할까 하는 것이 유일(唯一)의 심려(心慮)이었다.

그러나 증세(症勢)는 점점(漸漸) 심(甚)하여져서 인제는 참을 수도 없으려니와 참고 말 아니 하는 것으로만 도저히 그네들의 입을 틀어 막을 방패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싫다. 한 사람 더 알아질수록 정말 싫다. 마치 내 마음으로 ‘그런 듯’하게 몽상(夢想)하는 것을 그네들 입으로 ‘그렇게’ 구체화(具體化)하려고 하는 듯싶었다.

어쩌면 그다지도 몹시 밉고 싫고 원망(怨望)스러웠던지!

그리하여 이것이 혹시(或是) 꿈 속 일이나 되었으면! 언제나 속(速)히 이 꿈이 반짝 깨어

「도무지 그런 일 없다.」

하여질꼬? 아니 그럴 때가 꼭 있겠지 하며 바랄 뿐 아니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미구(未久)에 믿던 바 꿈이 조금 씩(式) 깨어져왔다.

「도무지 그럴 리 없다.」

고 고집을 세울 용기(勇氣)는 없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해(兒孩)다, 태기(胎氣)다, 임신(妊娠)이다, 라고 꼭 집어내기는 싫었다.

그런 중(中)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始作)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으쓱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宛然)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모든 사람의 말은 나를 저주(咀呪)하는 것 같고 바람에 날려 들리는 웃음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탕탕 부딪고 엉엉 울고도 싶었고 내 살을 꼬집어 뜯어 줄줄 흐르는 빨간 피를 또렷또렷 보고도 싶었다.

아아, 기쁘기커녕 수심(愁心)에 싸일 뿐이오, 우습기커녕 부쩍부쩍 가슴을 태울 뿐이었다. 책임(責任) 면(免)하려고 시집가라 강권(强勸)하던 형제(兄弟)들의 소위(所謂)가 괘씸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너 아니면 죽겠다’

하여 결국(結局) 제 성욕(性慾)을 만족(滿足)케 하던 남편은 원망스럽고 한 사람이라도 어서 속(速)히 생활(生活)이 안정(安定)되기를 희망(希望)하던 친구(親舊)님네,

「내 몸 보니, 속 시원하겠소.」

하며 들이대고 싶으니만치 악(惡)만 났다.

그때에 나의 둔(鈍)한 뇌(腦)로 어찌 능(能)히 장차(將次) 닥쳐오는 고통(苦痛)과 속박(束縛)을 추측(推測)하였을까. 나는 다만 여러 부인(夫人)들께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왔을 뿐이었다.

「여자(女子)가 공부(工夫)는 해서 무엇 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나면 볼 일 다 보았지!」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든지 코웃음으로 대답(對答)할 뿐이오, 들을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理) 만무(萬無)하다는 신념(信念)이 있었다.

이것은 공상(空想)이 아니라 구미(歐米)각국(各國) 부인(婦人)들의 활동(活動)을 보던지, 또 제일(第一) 가까운 일본(日本)에도 여사야 정자(與謝野 晶子*요사노 아키코)는 십여(十餘) 인(人)의 모(母)로서 매삭(每朔) 논문(論文)과 시가(詩歌)창작(創作)으로부터 그의 독서(讀書)하는 것을 보면 확실(確實)히

「아니하려니까 그렇지? 다 같은 사람 다 같은 여자(女子)로 하필(何必) 그 사람에게만 이런 능력(能力)이 있으랴」

싶은 마음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잘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런 말을 하는 부인(夫人)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욱 절대(絶對)로 부인(否認)하고 결국(結局) 나는 그네들 이상(以上)의 능력(能力)이 있는 자(者)로 자처(自處)하면서도 언제든지 꺼림직한 숙제(宿題)가 내 뇌(腦) 속에 횡행(橫行)했었다.

그러나 그 부인(夫人)들은 이구동언(異口同言)으로,

「네 생각은 결국(結局) 공상(空想)이다. 오냐, 당(當)해 보아라. 너도 별(別) 수 없지」

하며 나의 의견(意見)을 부인(否認)하였다. 과연(果然) 연전(年前)까지 나와 같이 앉아서 부인(夫人)네들을 비난(非難)하며

「나는 그렇게 아니 살 터이야.」

하던 고등교육(高等敎育) 받은 신여자(新女子)들을 보아도 별(別) 다른 것 보이지 아닐 뿐이라. 구식(舊式) 부인(夫人)들과 같은 살림으로 일 년(一年) 이 년(二年) 예사(例事)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무리 전(前)에 말하던 구식(舊式) 부인(夫人)들은 신용(信用)할 수 없더라도 이 신부인(新夫人)의 가정(家庭)만은 신용(信用)하고 싶었었다. 그것은 결(決)코 개선(改善)할만한 능력(能力)과 지식(知識)과 용기(勇氣)가 없지 않다. 그러면 누구든지 시집가고 아이 낳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되지 않고는 아니 되나?

그러면 나는 그 고뇌(苦惱)에 빠지는 초보(初步)에 있다. 마치 눈 뜨고 물에 빠지는 격(格)이었다. 실(實)로 앞이 캄캄하여 올 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하여 세상(世上) 일을 잊고 단잠에 잠겼을 때라도 누가 곁에서 바늘 끝으로 찌르는 것 같이 별안간(間) 깜짝 놀라 깨어졌다. 이러한 때는 체온(體溫)이 차졌다 더워졌다 말랐다 땀이 흘렀다 하여 조바심이 나서 마치 저울에 물건(物件)을 달 때 접시에 담긴 것이 쑥 내려지고 추(錘)가 훨씬 오르는 것 같이 내 몸은 부쩍 공중(空中)으로 떠오르고 머리는 천근만근(千斤萬斤)으로 무거워 축 처져버렸다.

너무나 억울하였다. 자연(自然)이 광풍(狂風)을 보내서 겨우 방긋한 꽃봉올리를 참혹(慘酷)히 꺾어버린다 하면 다시 뉘게 애소(哀素)할 곳이 있으리오마는 그래도 설마 자연(自然)만은 그럴 리(理) 없을 듯하여! 애원(哀願)하고 싶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도 또 있겠느냐?」고.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떼려고 하는 때이었다.

예술(藝術)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人生)인지 조선(朝鮮)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女子)는 이리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決)코 타인(他人)에게 미룰 것이 아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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