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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호는 비록 50면의 얄팍한 지면이지만, 당시의 정치문제부터 수필·소설 등 문예작품까지를 함께 실은 종합지의 성격이다. 제2호에는 김동인(金東仁)의 〈송첨지(宋僉知)〉, 제3호에는 채만식(蔡萬植)의 〈맹순사(孟巡査)〉, 제4호에는 정비석(鄭飛石)의 〈동여기(童女記)〉 제5호에는 이무영(李無影)의 〈굉장소전(宏壯小傳)〉, 제6호에는 김동리(金東里)의 〈미수(未遂)〉, 김송(金松)의 〈무기(武器)없는 민족(民族)〉 등 무게 있는 작품을 싣다가 제7호(1947. 3)에 ‘민족문학’을 특집함으로써 순수 문예지로 내용을 바꾸었다. 편집은 초창기때부터 종간호까지 소설가 박연희(朴淵禧)가 했다.
 
* 창간호는 비록 50면의 얄팍한 지면이지만, 당시의 정치문제부터 수필·소설 등 문예작품까지를 함께 실은 종합지의 성격이다. 제2호에는 김동인(金東仁)의 〈송첨지(宋僉知)〉, 제3호에는 채만식(蔡萬植)의 〈맹순사(孟巡査)〉, 제4호에는 정비석(鄭飛石)의 〈동여기(童女記)〉 제5호에는 이무영(李無影)의 〈굉장소전(宏壯小傳)〉, 제6호에는 김동리(金東里)의 〈미수(未遂)〉, 김송(金松)의 〈무기(武器)없는 민족(民族)〉 등 무게 있는 작품을 싣다가 제7호(1947. 3)에 ‘민족문학’을 특집함으로써 순수 문예지로 내용을 바꾸었다. 편집은 초창기때부터 종간호까지 소설가 박연희(朴淵禧)가 했다.
  
해방의 감격을 담은 창간사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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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민]은 1947년 3월 제7호에 ‘민족문학’을 특집하면서 그 성격을 본격적인 문학잡지로 바꾸었다
  
“포악무비(暴惡無比)한 인류의 적(敵)은 동서에서 보기 좋게 패망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 3천리 강산에는 자유의 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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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백민의 인기를 보자면 김송이 쓴 〈백민시대〉(김진호 엮음 《한국문단이면사》 깊은샘, 1999)에서 몇 대목을 옮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횡포(橫暴)한 검열의 제재로 맘놓고 잡지 편집을 할 수 없었으며, 찢기우고 깎이워서 병신만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놈들은 이 땅에서 지배권을 잃고 떼거지로 몰려갔습니다. 맘놓고 쓰시오, 자유의 노래를 부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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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을 통해 문단에 진출한 시인·작가·평론가는 적지 않았다. 소설에 손소희(孫素熙) 박연희(朴淵禧) 유주현(柳周鉉) 홍구범(洪九範) 유호(兪湖) 윤금숙(尹金淑), 시에 김윤성(金潤成) 공중인(孔仲仁) 이인석(李仁石) 김종문(金宗文) 오영수(吳永壽, 후에 소설을 썼음) 등이 나왔다. 그리하여 《백민》은 ‘시인 특집’·‘평론 특집’·‘소설 특집’을 내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고 발행부수도 늘고 늘었다. 그렇게 되자 편집진을 더욱 정돈하고 김광섭(金珖燮)을 주간으로 모시고, 박연희(朴淵禧)를 편집장으로, 편집부에는 유주현(柳周鉉) 전병순(田炳淳) 등을 두고 나는 편집고문 겸 발행인으로 있었다.
  
《백민》은 대중의 식탁입니다. 문화에 굶주린 독자여, 맘껏 배불리 잡수시오. 쓰는 것도 자유, 읽는 것도 자유, 모든 것이 자유 해방이외다. 그러나 이 자유는 조선의 독립과 건설의 노선(路線)에서만 베풀어진 것입니다. 계급이 없는 민족의 평등과 전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 땅의 문화는 자유스러이 발전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달성키 위해 《백민》이 미력이나마 피나 살이 되기를 바라면서 창간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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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 23호를 통해 가장 발행부수가 많고 날개 돋친 듯이 팔린 것은 《백민 창작 33인집》(제20호)이었다. 이것은 발매한 지 24시간 만에 초판이 다 팔리고 재판을 냈는데, 총판을 맡았던 서울역전 서점에는 장사진을 이루고 교통이 마비되어 순경이 교통 정리를 했던 것이다. 〈하략〉”
  
이어서 창간호의 목차를 보면, 〈해방 후 지도자의 연설〉 ‘전국민은 통일하라’ ··· 이승만(李承晩) 선생의 귀국 제1성/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의 경위’ ··· 여운형(呂運亨)/ ‘민족통일정부를’ ···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朴憲永)/ ‘대중 공생(共生)의 이념,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 및 ‘국민당의 정강’ ··· 안재홍(安在鴻)/ ‘연합국에 보낸 3천만의 결의문’, 〈사화〉 ‘예술가 솔거(率居)’ ··· 윤승한(尹昇漢)/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의 건국(建國)’ ··· 신채호(申采浩), 〈특별기재〉 ‘국사연표(國史年表)’, 〈수필〉 ‘신경역두(新京驛頭)의 태극기(太極旗)’ ··· 왕명(王明)/ ‘대합실의 주(主)예수’ ··· 임서하(任西河), 〈소설〉 ‘만세(萬歲)’ ··· 김송(金松), 〈연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 ··· 신정언(申鼎言) 등으로 짜였다. 김송의 소설 〈만세〉는 70장 가량의 단편인데 ‘1945. 9. 2.’ 탈고한 것으로 적혀 있으니, 해방의 기쁨을 안고 바로 붓을 든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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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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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의 기쁨을 표현한 창간사를 포함하여  창간호의 목차를 보면, 〈해방 후 지도자의 연설〉 ‘전국민은 통일하라’ ··· 이승만(李承晩) 선생의 귀국 제1성/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의 경위’....(이하생략)로 적혀 있으니, 해방의 기쁨을 안고 바로 붓을 든 작품이라 하겠다.
  
잡지 앞머리에는 ‘해방 정국’의 주역인 이승만(李承晩)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안재홍(安在鴻) 등의 연설과 각 정당의 성명서·결의문·정강·정책 등이 실려 있다. 이 지도자들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그 몇 구절씩을 옮긴다. 김구(金九)는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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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앞머리에는 ‘해방 정국’의 주역인 이승만(李承晩)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안재홍(安在鴻) 등의 연설과 각 정당의 성명서·결의문·정강·정책 등이 실려 있다. 이 지도자들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그 몇 구절씩을 옮긴다. 김구(金九)는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볼 수 없다.
  
〈이승만의 귀국 제1성〉 ··· (오랜 망명생활에서 10월 16일 귀국하여 10월 17일에 방송을 했다.) “36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운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무량하다. 나의 가슴은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형편에 감상담을 말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우리 앞에는 바야흐로 길이 탁 트였다. 40년 동안 막혔던 우리 앞길이 인제는 열린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이 지극히 크다. 이 일을 잘 해내고 못 해내는 것이 오직 우리의 손에 달렸다. 밖의 사람들(세계 각국을 가리킴)이 지금 우리에게서 알고자 하는 점은, 40년 동안 남의 나라의 압박과 천대를 받아오던 조선민족이 과연 저이들끼리 능히 자주독립국가를 세워 나갈 수 있나 없나 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조선에 와서 미국사람들(군정청 간부들)을 대해 보니, 그 염원하는 바는 조선민족이 어서 빨리 한 덩어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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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제1성〉“36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운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무량하다. 나의 가슴은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형편에 감상담을 말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우리 앞에는 바야흐로 길이 탁 트였다. 40년 동안 막혔던 우리 앞길이 인제는 열린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이 지극히 크다. 이 일을 잘 해내고 못 해내는 것이 오직 우리의 손에 달렸다. 밖의 사람들(세계 각국을 가리킴)이 지금 우리에게서 알고자 하는 점은, 40년 동안 남의 나라의 압박과 천대를 받아오던 조선민족이 과연 저이들끼리 능히 자주독립국가를 세워 나갈 수 있나 없나 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조선에 와서 미국사람들(군정청 간부들)을 대해 보니, 그 염원하는 바는 조선민족이 어서 빨리 한 덩어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美洲)를 떠나 하와이·괌·일본 동경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이야기해 본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중략〉
 
 
내가 여기에서 분명히 말해 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平民)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대표도 아니요, 외교부 책임자의 자격으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 이곳 군정청과 무슨 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여기에 오는 길을 열어 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하략〉”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발족 연설〉 ··· 건준(建準)에서는 9월 6일 하오 7시에 경기고녀 강당에서 각계 각층을 망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 참석인사 약 1천여명, 회의는 밤 1시까지 진행되어,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 ······ 이날 의장에 선출된 여운형의 연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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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발족 연설〉 ··· 건준(建準)에서는 9월 6일 하오 7시에 경기고녀 강당에서 각계 각층을 망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 참석인사 약 1천여명, 회의는 밤 1시까지 진행되어,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 ······ 이날 의장에 선출된 여운형의 연설이다.
 
“······ 급히 전국인민대표회의를 개최한 데 대하여 여러분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나는 사과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을 위한 비상시이니 비상조치로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출된 인민위원은 각계 각층을 망라하였다고는 하나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고, 이제부터 국민 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 위원이라고 볼 수 있다.
 
“······ 급히 전국인민대표회의를 개최한 데 대하여 여러분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나는 사과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을 위한 비상시이니 비상조치로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출된 인민위원은 각계 각층을 망라하였다고는 하나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고, 이제부터 국민 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 위원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건국의 대업(大業)은 어렵다. 로마가 하루에 된 것이 아니듯이 건국이 일조(一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군의 진주(進駐)가 금명일 중에 있을 것이요,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될 ‘전국대표의회(議會)’를 개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앞으로 사태의 진전에 따라서는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사무가 종료될 것이니 ······ 〈중략〉
 
말할 것도 없이 건국의 대업(大業)은 어렵다. 로마가 하루에 된 것이 아니듯이 건국이 일조(一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군의 진주(進駐)가 금명일 중에 있을 것이요,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될 ‘전국대표의회(議會)’를 개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앞으로 사태의 진전에 따라서는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사무가 종료될 것이니 ······ 〈중략〉
  
또 우리는 두 분의 손님(미국과 소련)을 맞이하게 되어 난처한 것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과거 5백년 동안 우리의 치욕(恥辱)이고 통폐(通弊)인 사대(事大)사상만은 단호히 버려야 한다. 민족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여러 위원들은 민중의 진두에 서서 민중 지도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조선의 특수 조건을 참작하여 건국 대업에 가장 공고한 기초를 세워야 할 것이다. 〈하략〉”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나는 사과한다”고 한 이 한마디를 두고 후일 여러 가지 설이 나왔는데, 그 중 한 평자의 의견은 이렇다. “이 회의는 미리 준비되었던 것이 아니고,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부랴사랴 서둘러 개최한 것이다.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수립해 놓으면 미군이 진주하더라도 기정 사실로 인정하게 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기성 단체로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라고 했다. 또 국호도 처음 복안은 ‘조선민주공화국’이던 것을 좌파가 우세한 회의 현장에서 ‘인민공화국’으로 고쳐 선포했다고 한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우리 해방 정국의 한 장면이라 하겠다. (앞에 나온 《선구(先驅)》 창간호의 〈각 정당 소개〉 중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시라.)
 
 
〈박헌영의 ‘민족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성명〉
 
  
“우리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정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焦眉)의 선결문제다. 그것은 물론 전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고 전 인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를 말함이다. 편협(偏狹)한 계급의 이익이나 편협한 당파의 지배를 말함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의사와 이익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그것이다. 조선을 계급적으로 본다면 노동자와 농민과 일반 근로계급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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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민족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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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정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焦眉)의 선결문제다. 그것은 물론 전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고 전 인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를 말함이다. 편협(偏狹)한 계급의 이익이나 편협한 당파의 지배를 말함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의사와 이익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그것이다. 조선을 계급적으로 본다면 노동자와 농민과 일반 근로계급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중략〉
······ 오늘날 우리 눈앞에는 수많은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정치운동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정치운동이란 없었다. 일본의 압박 아래 합법적 범위 내에서는 그들의 정치운동이란 그림자도 냄새도 보여 주지 않았다. 다만 용감한 혁명적 계급에서만 비합법적인 정치투쟁이 계속되어 왔다. ······ 이러다가 저 8월 15일 조선이 합법적으로 해방되자 모든 계급들이 정치운동을 하려고 나선 것이다. 공산당으로서는 조선사람으로서 민족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 손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친일파라거나 민족반역자는 이 정권 수립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중략〉
 
 
 
민주주의 혁명에는 두가지 과제가 있다. ······ 혁명적 해결을 요하는 토지문제다. 토지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농민에 주어야 하고 경작 이외의 토지는 국유화한다. 이는 하루아침에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또 노동자를 위하여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근로자의 비참한 생활을 급진적으로 향상 개선시켜야 한다. 〈하략〉”
 
 
 
〈안재홍의 국민당과 ‘신민주주의론’〉 ··· 9월 24일 조선민주당·사회민주당·자유당·공화당·협찬(協贊)동지회 등 5개 정당이 발전적으로 해산, ‘국민당’을 창당했는데 위원장 안재홍(安在鴻), 부위원장 명제세(明濟世) 박용의(朴容義), 그 무렵 안재홍은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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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의 국민당과 ‘신민주주의론’〉 ··· 9월 24일 조선민주당·사회민주당·자유당·공화당·협찬(協贊)동지회 등 5개 정당이 발전적으로 해산, ‘국민당’을 창당했는데 위원장 안재홍(安在鴻), 부위원장 명제세(明濟世) 박용의(朴容義), 그 무렵 안재홍은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사람은 ‘사름’이라, 인류공존의 홍대(洪大)한 이념을 함축함인데, 나라는 ‘나로라’의 자아의식의 강연(强然)한 배격(排擊)에서 결성(結成)된 것이다. 밖으로 인류대동(大同)의 이념에 적응하고 안으로 민족자존(自存)의 의도에서 집결 맹진(猛進)함을 요청하는 것은 현대 열국(列國) 인민들이 각각 냉엄하게 체험한 바이다. 〈중략〉
 
“사람은 ‘사름’이라, 인류공존의 홍대(洪大)한 이념을 함축함인데, 나라는 ‘나로라’의 자아의식의 강연(强然)한 배격(排擊)에서 결성(結成)된 것이다. 밖으로 인류대동(大同)의 이념에 적응하고 안으로 민족자존(自存)의 의도에서 집결 맹진(猛進)함을 요청하는 것은 현대 열국(列國) 인민들이 각각 냉엄하게 체험한 바이다. 〈중략〉
 
우리는 최근 40년간에는 영맹(獰猛)한 일본제국주의의 기반(羈絆) 밑에서 온갖 악조건을 배제하면서 꾸준히 해방의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그러다가 간신히 해방을 맞이한 우리에게는 ‘통일민족국가’의 창건이 엄숙한 과제인데, 지도층은 좌우에 허덕이고 대중은 거취(去就)에 헤매고 있지 않은가. 〈중략〉
 
 
정치는 ‘다사리’이다. ‘다사리’는 그 방법에서 전 민족의 총의를 골고루 표백(表白)케 함이요, 그 목적에서 각계층의 너와 나를 ‘다 살리게’하여 유루(遺漏)와 차등(差等)없이 함이나니, ‘나라와 겨레와 다사리’는 즉 하나의 통일민족국가의 지도이념이다. 〈중략〉 우리는 초계급적 통합국가 건설이 역사적 약속 아래 있으므로, 지주·자본가·농민·노동자 등을 통합한 신민족주의 국가를 창업하여 만민 개로(皆勞) 및 대중 공생(共生)을 이념으로 삼는, 계급독재를 지양(止揚)시킨 신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한 정치적 문화적 신기원(紀元)의 역사를 개창(開創)하여야 한다. 〈하략〉”
 
 
《백민》 발행인 김송
 
《백민》 발행인 김송
 
《백민》은 1947년 3월 제7호에 ‘민족문학’을 특집하면서 그 성격을 본격적인 문학잡지로 바꾸었다. 그 목차를 본다. 〈창작(소설)〉 ‘망국인기(亡國人記)’ ··· 김동인(金東仁)/ ‘운명(運命)’ ··· 정비석(鄭飛石)/ ‘행렬(行列)’ ··· 김영수(金永壽)/ ‘고향(故鄕)없는 사람’ ··· 박영준(朴榮濬)/ ‘사과’ ··· 최태응(崔泰應)/ ‘신념(信念)’(희곡) ··· 진우촌(秦雨村)/ ‘진눈깨비’(추천) ··· 유호(兪湖)/ ‘고향(故鄕)이야기’ ··· 김송(金松)/ ‘인간적(人間的)’ ··· 계용묵(桂鎔默)/ ‘혈거부족(穴居部族)’ ··· 김동리(金東里)/ ‘황조가(黃鳥歌)’ ··· 정인택(鄭人澤), 〈평론〉 ‘한양조(漢陽朝) 초기(初期)의 작품(作品)’ ··· 박종화(朴鍾和)/ ‘문학시평(文學時評)’ ··· 백철(白鐵)/ ‘순수시(純粹詩)의 지향(志向)’ ··· 조지훈(趙芝薰), 〈시단〉 ‘물레’ ··· 김안서(金岸曙)/ ‘기다림’ ··· 임병철(林炳哲)/ ‘바다로’ ··· 박두진(朴斗鎭)/ ‘비파(琵琶)’ ··· 이흡(李洽)/ ‘감각파(感覺派)’ ··· 허윤석(許允碩)/ ‘산(山)을 바라보며’ ··· 박목월(朴木月)/ ‘이슥한 아침’ ··· 김용호(金容浩)/ ‘호화스런 족속(族屬)들’ ··· 유치환(柳致環)/ ‘밀어(密語)’ ··· 서정주(徐廷柱), 〈사화〉 ‘나당문학가(羅唐文學家) 최고운(崔孤雲)’ ··· 윤승한(尹昇漢), 〈시사〉 ‘미소(美蘇)는 싸울 것인가?’ ··· 에드가 스노오·왕명(王明) 역, 〈영화 씨나리오〉 ‘청춘(靑春)’ ··· 최영수(崔永秀) 등으로 짜였다.
 
 
발행인이 쓴 〈편집후기〉를 보면 당시의 실정을 알게 한다.
 
 
“매양 ‘편집후기’를 쓸 때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집필자의 면모들이다. 핼쑥하고 여윈 얼굴빛,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고민하는 그 상(相), 해방 후에도 그들의 표정에는 암담한 그림자가 남았으니 이 어쩐 일인고? ······
 
 
본지는 햇수로 3년, 호수론 7호, 온전히 다 나의 사재(私財)를 기울여서 발행했다. 밀국수를 먹으며 집을 저당하여 이 일을 함은 무슨 이윤지 나도 알 수 없다. 고달프고 짐이 벅찬 이 일, 때로는 낙망도 한다. 그러나 여러 동인과 사회에서 열렬히 응원해 주니 내 맘은 든든하고 포부도 커진다. 〈하략〉”
 
 
김송이 쓴 〈백민시대〉(김진호 엮음 《한국문단이면사》 깊은샘, 1999)에서 몇 대목을 옮긴다.
 
 
“《백민》을 통해 문단에 진출한 시인·작가·평론가는 적지 않았다. 소설에 손소희(孫素熙) 박연희(朴淵禧) 유주현(柳周鉉) 홍구범(洪九範) 유호(兪湖) 윤금숙(尹金淑), 시에 김윤성(金潤成) 공중인(孔仲仁) 이인석(李仁石) 김종문(金宗文) 오영수(吳永壽, 후에 소설을 썼음) 등이 나왔다. 그리하여 《백민》은 ‘시인 특집’·‘평론 특집’·‘소설 특집’을 내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고 발행부수도 늘고 늘었다. 그렇게 되자 편집진을 더욱 정돈하고 김광섭(金珖燮)을 주간으로 모시고, 박연희(朴淵禧)를 편집장으로, 편집부에는 유주현(柳周鉉) 전병순(田炳淳) 등을 두고 나는 편집고문 겸 발행인으로 있었다.
 
 
《백민》 23호를 통해 가장 발행부수가 많고 날개 돋친 듯이 팔린 것은 《백민 창작 33인집》(제20호)이었다. 이것은 발매한 지 24시간 만에 초판이 다 팔리고 재판을 냈는데, 총판을 맡았던 서울역전 서점에는 장사진을 이루고 교통이 마비되어 순경이 교통 정리를 했던 것이다. 〈하략〉”
 
  
 
==백민 창작 33인==
 
==백민 창작 33인==

2019년 6월 12일 (수) 00:22 판


제목


개요

  • 1945년 12월 작가 김현송(金玄松)에 의하여 창간된 문예지로서 종합교양지의 성격도 갖추고 있었다. 판형은 A5판으로 처음에는 격월간으로 발행하다가 월간으로 바꾸어 발행하였다. 소설가 김현송은 일제하에서 문화에 굶주렸던 국민들에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문화의 식탁 구실을 하고자 이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의 백민문화사(白民文化社)에서 고전·평론·수필·소설·교양 등의 읽을거리를 담은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던 이 잡지는 1948년 1월호까지 통권 21호를 발간하였으나 경영의 어려움으로 잠시 자취를 감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6월에 세종로의 중앙문화협회(中央文化協會)가 제호를 『문학(文學)』으로 바꾸어 속간하게 되었다. 이때는 시인인 김광섭(金珖燮)이 발행인이 되어 편집, 발행하였으나 제22호와 제23호의 2호만이 나왔을 뿐 곧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는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상세 설명

  • 창간호는 비록 50면의 얄팍한 지면이지만, 당시의 정치문제부터 수필·소설 등 문예작품까지를 함께 실은 종합지의 성격이다. 제2호에는 김동인(金東仁)의 〈송첨지(宋僉知)〉, 제3호에는 채만식(蔡萬植)의 〈맹순사(孟巡査)〉, 제4호에는 정비석(鄭飛石)의 〈동여기(童女記)〉 제5호에는 이무영(李無影)의 〈굉장소전(宏壯小傳)〉, 제6호에는 김동리(金東里)의 〈미수(未遂)〉, 김송(金松)의 〈무기(武器)없는 민족(民族)〉 등 무게 있는 작품을 싣다가 제7호(1947. 3)에 ‘민족문학’을 특집함으로써 순수 문예지로 내용을 바꾸었다. 편집은 초창기때부터 종간호까지 소설가 박연희(朴淵禧)가 했다.
  • [백민]은 1947년 3월 제7호에 ‘민족문학’을 특집하면서 그 성격을 본격적인 문학잡지로 바꾸었다
  • 또한 백민의 인기를 보자면 김송이 쓴 〈백민시대〉(김진호 엮음 《한국문단이면사》 깊은샘, 1999)에서 몇 대목을 옮긴다.
  • “《백민》을 통해 문단에 진출한 시인·작가·평론가는 적지 않았다. 소설에 손소희(孫素熙) 박연희(朴淵禧) 유주현(柳周鉉) 홍구범(洪九範) 유호(兪湖) 윤금숙(尹金淑), 시에 김윤성(金潤成) 공중인(孔仲仁) 이인석(李仁石) 김종문(金宗文) 오영수(吳永壽, 후에 소설을 썼음) 등이 나왔다. 그리하여 《백민》은 ‘시인 특집’·‘평론 특집’·‘소설 특집’을 내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고 발행부수도 늘고 늘었다. 그렇게 되자 편집진을 더욱 정돈하고 김광섭(金珖燮)을 주간으로 모시고, 박연희(朴淵禧)를 편집장으로, 편집부에는 유주현(柳周鉉) 전병순(田炳淳) 등을 두고 나는 편집고문 겸 발행인으로 있었다.

《백민》 23호를 통해 가장 발행부수가 많고 날개 돋친 듯이 팔린 것은 《백민 창작 33인집》(제20호)이었다. 이것은 발매한 지 24시간 만에 초판이 다 팔리고 재판을 냈는데, 총판을 맡았던 서울역전 서점에는 장사진을 이루고 교통이 마비되어 순경이 교통 정리를 했던 것이다. 〈하략〉”

창간 당시

  • 독립의 기쁨을 표현한 창간사를 포함하여 창간호의 목차를 보면, 〈해방 후 지도자의 연설〉 ‘전국민은 통일하라’ ··· 이승만(李承晩) 선생의 귀국 제1성/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의 경위’....(이하생략)로 적혀 있으니, 해방의 기쁨을 안고 바로 붓을 든 작품이라 하겠다.
  • 잡지 앞머리에는 ‘해방 정국’의 주역인 이승만(李承晩)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안재홍(安在鴻) 등의 연설과 각 정당의 성명서·결의문·정강·정책 등이 실려 있다. 이 지도자들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그 몇 구절씩을 옮긴다. 김구(金九)는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볼 수 없다.
  • 〈이승만의 귀국 제1성〉“36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운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무량하다. 나의 가슴은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형편에 감상담을 말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우리 앞에는 바야흐로 길이 탁 트였다. 40년 동안 막혔던 우리 앞길이 인제는 열린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이 지극히 크다. 이 일을 잘 해내고 못 해내는 것이 오직 우리의 손에 달렸다. 밖의 사람들(세계 각국을 가리킴)이 지금 우리에게서 알고자 하는 점은, 40년 동안 남의 나라의 압박과 천대를 받아오던 조선민족이 과연 저이들끼리 능히 자주독립국가를 세워 나갈 수 있나 없나 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조선에 와서 미국사람들(군정청 간부들)을 대해 보니, 그 염원하는 바는 조선민족이 어서 빨리 한 덩어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중략〉


  •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발족 연설〉 ··· 건준(建準)에서는 9월 6일 하오 7시에 경기고녀 강당에서 각계 각층을 망라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 참석인사 약 1천여명, 회의는 밤 1시까지 진행되어,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 ······ 이날 의장에 선출된 여운형의 연설이다.

“······ 급히 전국인민대표회의를 개최한 데 대하여 여러분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나는 사과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을 위한 비상시이니 비상조치로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출된 인민위원은 각계 각층을 망라하였다고는 하나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고, 이제부터 국민 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 위원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건국의 대업(大業)은 어렵다. 로마가 하루에 된 것이 아니듯이 건국이 일조(一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군의 진주(進駐)가 금명일 중에 있을 것이요,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될 ‘전국대표의회(議會)’를 개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앞으로 사태의 진전에 따라서는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사무가 종료될 것이니 ······ 〈중략〉


  • 〈박헌영의 ‘민족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성명〉

“우리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정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焦眉)의 선결문제다. 그것은 물론 전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고 전 인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를 말함이다. 편협(偏狹)한 계급의 이익이나 편협한 당파의 지배를 말함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의사와 이익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그것이다. 조선을 계급적으로 본다면 노동자와 농민과 일반 근로계급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중략〉

  • 〈안재홍의 국민당과 ‘신민주주의론’〉 ··· 9월 24일 조선민주당·사회민주당·자유당·공화당·협찬(協贊)동지회 등 5개 정당이 발전적으로 해산, ‘국민당’을 창당했는데 위원장 안재홍(安在鴻), 부위원장 명제세(明濟世) 박용의(朴容義), 그 무렵 안재홍은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사람은 ‘사름’이라, 인류공존의 홍대(洪大)한 이념을 함축함인데, 나라는 ‘나로라’의 자아의식의 강연(强然)한 배격(排擊)에서 결성(結成)된 것이다. 밖으로 인류대동(大同)의 이념에 적응하고 안으로 민족자존(自存)의 의도에서 집결 맹진(猛進)함을 요청하는 것은 현대 열국(列國) 인민들이 각각 냉엄하게 체험한 바이다. 〈중략〉

백민 창작 33인

  • 백민 창작 33인의 작가로는 염상섭(廉想涉) 전영택(田榮澤) 최독견(崔獨鵑) 이무영(李無影) 정비석(鄭飛石) 엄일마 곽하신(郭夏信) 안수길(安壽吉) 최인욱(崔仁旭) 장덕조(張德祚) 윤금숙(尹金淑) 임옥인(林玉仁) 유치진(柳致眞) 이석훈(李石薰) 유주현(柳周鉉) 이봉구(李鳳九) 김진수(金鎭壽) 이성표 홍구범(洪九範) 강노향(姜鷺鄕) 이선구(李璇求) 최요안(崔要安) 박계주(朴啓周) 최태응(崔泰應) 황순원(黃順元) 진우촌(秦雨村) 박연희(朴淵禧) 이 익 김광주(金光洲) 임서하(任西河) 김영수(金永壽) 박영준(朴榮濬) 김 송(金 松) 등이 있다.

김동리

  • 소설가, 시인으로 알려진 김동리는 잡지를 통해서 비평가로 활동했다.
    • 김동리,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백민』,1948년, 3월

김동리는 여기서 문학하는 것을 구경적 생의 형식이라 했으며, 구경적 삶이란 작가가 지닌 무한한 자아 추구이며, 또한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을 찾고 구하는 것이며 문학을 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과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의 글 중에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잘 정리한 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글도 마찬가지로 구경적 생의 형식을 추구하는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순환의 논리 속에서 계속해서 얼버무려지고 있다.

    • 김동리, 「민족문학과 경향문학-문학의 각태」, 『백민』 3권 5호, 1947

김동리가 말하고자 하는 순수문학, 본격문학, 민족문학의 연쇄고리를 논하였다.

    • 김동리,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문학의 내용적 기초를 위하여」, 『백민』 4권 2호, 1948

제3휴머니즘의 내용적 사상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하여 정연한 의미체계를 완성한 글이다. 민족의 사상성에 대한 탐구 또한 다루었다.

    • 김동리, 「문학과 자유의 옹호」, 『백민』, 1947. 7

조선문학가동맹을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의 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했다.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산동 백민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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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출판 정보

*공연: 2017.10.25- 2017.10.29 국립극장해오름극장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백민 [정치문제] A는 B를 담았다
백민 [수필] A는 B를 담았다
백민 [소설] A는 B를 담았다
백민 [시] A는 B를 담았다
백민 [비평] A는 B를 담았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백의민족을 당당하게 표방한 백민 - 1945. 12 (한국잡지백년3, 2004. 5. 15., 최덕교)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