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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이렇게 청력을 잃게 된 베토벤은 결국 노쇄하게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이렇게 청력을 잃게 된 베토벤은 결국 노쇄하게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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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30일 (토) 23:23 판

바로크시대 음악가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피아노가 개발되기 전이나 개발되고 있는 과도기에 걸쳐있어 주로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이용한 음악이 발달되어진 경향이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서양음악, 또는 클래식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형식적인 이론의 토대를 만든 시대이다. 이 시대의 음악가들은 기독교가 발전되는 시대의 사람들로 작곡하거나 연주하는 음악의 대부분이 교회음악인 경향을 보인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캐논으로 유명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 등이 있다. 위 문서에서는 이중에서 바흐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생애

독일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교회 음악가이다. 1685년 3월 독일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바이올린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3월 23일에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요한 파헬벨의 제자이자 큰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2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바흐는 18살에 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졸업을 한 뒤에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어 1703년 4월부터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해 8월에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77)의 작품과 오르간 곡에 많은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아 바흐의 개성과 기초 양식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바흐의 감독자 입장인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게 되어 아르슈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그만두고 같은 독일의 도시인 뮐하우젠으로 가게 된다.

뮐 하우젠에 가서 교회 음악중 한 종류인 칸타타라는 장르에 힘을 쓰게 되고 제 71번, 제 106번, 제 131번 등 유명한 명작을 작곡하게 되었고 이때 바흐의 가장 유명한 곡중 하나인 <토카타와 푸가> (BWV 565)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던 중 뮐하우젠에서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1년만에 떠나게 된다. 이후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오르가니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1708년도부터 1717년도 사이에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타의 불허를 추종하는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거듭나게 되어 그의 이름이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매달 1곡씩 교회 칸타타라는 장를 작곡을 하게 되었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기존에는 없었던 비발디와 같은 새로운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이러한 곡들을 연구를 한 끝에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을 개발하게 되고 이것은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에 대하여 관심이 많고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사서, 이례적(異例的)인 대우를 제공하였다. 쾨텐의 궁정은 칼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흐의 주된 직무는 귀족이나 영주들을 위한 세속적인 합주곡이나 실내악을 작곡하는 업무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와 같은 곡을 작곡하였고 바흐의 세속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기악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작곡이 되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1707년, 바흐는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 7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쾨텐 시대인 1720년에 이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연하인 소프라노 테너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더 가지게 된다. 총 20명의 자녀중에서 절반가까이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가 되었다. 쾨텐 시대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듣고 찾아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바흐는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유로 인하여 라이프치히로 떠나게 되었다.

독일 바로크의 핵심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합창장을 맡게 되었다. 1750년에 사망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시대의 창작물의 대표적인 예는 <마태오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 음악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기의 이상을 굳건히 주장하고 수호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이라는 장르에 점점 열정이 식어 의지를 잃은 것 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작곡은 갑작스럽게 수요가 줄게 되고, 그에 반하여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된 장르를 맡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수정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여 묶기도 하였으며, 혹은 곡집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시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적 헌정>(BWV1079)이다.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바흐의 최후의 걸작인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쓰러진 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750년 7월 28일, 사망하게 된다.



주요 작품목록

바흐의 작품은 타 음악가의 작품과는 다르게 BWV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타 음악가들의 작품에는 붙어있지 않는 이러한 표현이 낯설고 신기할텐데, BWV란 바흐 작품 목록이라는 뜻의 독일어인 Bach Werke Verzeichnis의 줄임말로 볼프강 슈미더가 붙인 바흐의 작품들의 번호이다. 바흐의 BWV는 칸타타로 시작하는 1번부터 1126번까지 존재한다. 바흐의 작품은 BWV가 존재하므로 악장이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으며 파트1이나 BWV00/0 이런식으로 붙인다. 예를들어 바흐 칸타타 35번 파트1은 35번 1악장이 아닌 BWV 35/1로 나타낸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2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로는 바흐가 작품번호를 매기지 않아서 정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바흐의 곡중 현존하는 곡들은 1번부터 1126번까지 BWV가 부여되었는데 일일히 종류별로 나눠 분류하기엔 양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푸가

푸가는 하나의 주제(때로는 2개 혹은 3개의 주제. 이 경우에는 2중푸가 혹은 3중푸가라고 한다)가 각 성부 혹은 각 악기에 장기적이며 규율적인 모방반복을 행하면서 특정된 조적(調的) 법칙을 지켜서 이루어지는 악곡이다.

이 푸가는 15세기경부터 시작이 되었지만 제대로된 체계화를 갖추지 못한 장르로 이러한 푸가를 바흐가 대위법을 통하여 형식의 틀을 다지게 되면서 음악의 체계가 과학적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을 만들게 된 바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대에서는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유튜브 자료

Bach <toccata and fugue> (BWV 565) / 바흐 <토카타와 푸가> (바흐 작품번호 565번) / CC BY SA by Top Classical Music

음원 자료

https://freesound.org/s/135883/ Bach fugue G minor/ 바흐 푸가 사단조 / CC BY by roby_caso
https://archive.org/details/HaroldSamuelBWV847#donate_dropdown Bach - Prelude & Fugue No. 2 in C Minor / 바흐 2번 전주곡 & 푸가 다단조 / public domain
칸타타

17세기 초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의 바로크시대에 가장 성행했던 성악곡의 형식으로 바흐가 만든 대부분의 교회 음악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바흐의 칸타타는 BWV1번부터 BWV224번까지 총 224개의 칸타타가 있으며 이 중에서 200번까지는 교회 음악인 칸타타이지만 201~224번까지는 교회음악에 회의감을 느끼고 만든 세속 칸타타이다.

Bach cantata 35 (BWV35) / 바흐 칸타타 35번 파트1(바흐 작품번호 35번) / CC BY SA by Classical Inspiration

Bach cantata 127 (BWV127) / 바흐 칸타타 127번 (바흐 작품번호 127번) / CC BY SA by History of Music

음원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JohannSebastianBachCantata196/5-01Sinfonia.mp3 Bach cantata (BWV196) / 바흐 칸타타 (바흐 작품 번호 196) / public domain
인벤션

인벤션(Invention)이란 악곡의 형식으로, 다성음악으로 된 즉흥곡이다 바흐는 푸가를 대위법을 사용하여 음악의 토대를 다진 것 처럼 인벤션을 통하여 화성학을 다졌다. 이러한 바흐의 모습을 보고 베토벤은 '바흐는 화성의 왕이다'라고 지칭하였다.

Bach Invention No.4 In D Minor (BWV775) / 바흐 인벤션 4번 라단조 (바흐 작품번호 775번) / CC BY SA by Pianow

음원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BachInventionNo.1 Bach Invention No.1 In C Major (BWV772) / 바흐 인벤션 1번 다장조 (바흐 작품번호 772번) / public domain
https://archive.org/details/BachInvention3  Bach Invention No.3 In D Major (BWV774) / 바흐 인벤션 2번 라장조 (바흐 작품번호 774번) / public domain

관련 사진

고전파 음악가

고전파는 음악가란 바로크시대 음악과 낭만파 사이의 중간지점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로크시대 음악이 음악의 기초를 다지는 성격이었다면, 고전파는 이를 완곡히 지켜 만드는 음악성을 띄고 있다.

이 시대에는 피아노를 대중적이게 접하게 된 시기로 피아노의 출현 하나로 음악계에는 혁명이 불게 된다.

고전파는 새롭게 탄생한 피아노라는 악기와 바로크시대에 완성된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소나타, 교향곡과 같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클래식을 시작한 시기로 이 시기부터 클래식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기존의 서양 음악이 교회 위주였다면 현재 대중음악과 같은 위치인 가곡이 발달하는 등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 음악이 발전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음악가로는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베르트,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는 모차르트, 음악의 악성이라고 불리는 베토벤 등이 있다. 위 문서에서는 이중에서 베토벤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베토벤




음악의 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

생애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 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으로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 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와 페슈트로 갔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인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과 연주를 계속하였다.1796년경에는 또한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과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다. 1801년에는 또한 청각이 들리지 않는것이 심해지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이렇게 청력을 잃게 된 베토벤은 결국 노쇄하게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목록

바로크시대에는 칸타타, 푸가와 같은 형식이 자주 연주되었다면 고전파 음악에서는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등이 많이 쓰였다. 이 곡들의 형식에 대하여 다루어볼 예정이다.

피아노 소나타

소나타(Sonata)는 기악을 위한 음악 형식의 하나로, 주로 노래가 동반되는 칸타타(cantata)에 대비되어 '연주'만 되는 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바로크시대 음악에도 사용한 장르이지만 대중화 되면서 메이저의 반열에 들은것은 고전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전파의 소나타는 빠르기나 성격이 완전히 다른 3~4악장의 구조로 이루어진 곡을 지칭한다. 서양 음악가들은 많은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그 중에서 베토벤의 소나타가 가장 유명하다. 베토벤은 주로 3악장의 형식의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이 소나타의 구조는 1악장 - allegro(빠르게), 2악장 - adagio(느리게), 3악장 - allegro(빠르게)로 이루어진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며 대표적인 소나타인 '월광 소나타'의 경우에는 1악장 - adagio(느리게), 2악장 minuet(4분의 3박자의 느린 춤곡 형식), 3악장 presto(매우빠르게)에 가까운 allegro(빠르게)로 이루어지고있다. 이러한 소나타 중에서 피아노 소나타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소나타이며 주로 베토벤의 피아노의 소나타를 자주 접하고 있다. 베토벤 소나타의 경우 한국에서는 예고나 음대의 피아노과 입시곡으로 자주 지정이 되기도 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는 위의 항목에 나와있는 피아노 소나타와 같이 소나타 형식을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곡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바이올린 소나타의 특징으로는 보통은 피아노 반주를 가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통 피아니스트들과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협주 무대(듀오)에서 많이 사용된다.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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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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