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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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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향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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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 형식이 갖추어지고, 고전파 이후 중요한 곡종(曲種)이 된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다악장형식의 악곡. 형식상으로는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이지만 피아노소나타 등 많은 악곡이 3악장으로 구성된 데 대해 교향곡은 현악4중주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보통 제1악장(소나타 형식의 빠른 악장. 이 앞에 장중한 서곡이 오는 경우도 많다), 제2악장(리트 형식의 완만한 악장), 제3악장(미뉴엣 또는 스케르초), 제4악장(론도 또는 소나타 형식의 매우 빠른 악장)으로 되어 있다. 베토벤은 생애 총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고전파를 대표하는 교향곡이라 할 수 있으며 고전파 다음 시기인 낭만파의 교향곡의 표본이 되는 교향곡이다. 중,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자주 들려주었던 베토벤의 곡들 중 '운명', '환희의 송가'라는 부제가 붙은 곡들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 곡들은 드라마나 영화의 ost뿐만 아니라 광고나 예능에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접하는 베토벤의 곡의 장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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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 형식이 갖추어지고, 고전파 이후 중요한 곡종(曲種)이 된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다악장형식의 악곡. 형식상으로는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이지만 피아노소나타 등 많은 악곡이 3악장으로 구성된 데 대해 교향곡은 현악4중주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보통 제1악장(소나타 형식의 빠른 악장. 이 앞에 장중한 서곡이 오는 경우도 많다), 제2악장(리트 형식의 완만한 악장), 제3악장(미뉴엣 또는 스케르초), 제4악장(론도 또는 소나타 형식의 매우 빠른 악장)으로 되어 있다. 베토벤은 생애 총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고전파를 대표하는 교향곡이라 할 수 있으며 고전파 다음 시기인 낭만파의 교향곡의 표본이 되는 교향곡이다. 중,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자주 들려주었던 베토벤의 곡들 중 '운명', '환희의 송가'라는 부제가 붙은 곡들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 곡들은 드라마나 영화의 ost뿐만 아니라 광고나 예능에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접하는 베토벤의 곡의 장르이다. 베토벤에 교향곡에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음원 CD는 직경 12cm에 74분 2초 분량의 자료를 담을 수 있는 용량을 표준으로 두고 있다. 원래는 60분 분량의 용량에 직경은 11.5cm였지만 음원 CD를 최초로 만들 때 자문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인 카라얀이라는 인물에게 구하였는데 대중에게 가장 익숙하고 잘 알려진 곡인 '환희의 송가'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인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의 길이에 맞추자는 의견을 수렴하여 현재 음원CD의 용량이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 협주곡 =====
 
===== 협주곡 =====

2019년 12월 1일 (일) 22:45 판

바로크시대 음악가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피아노가 개발되기 전이나 개발되고 있는 과도기에 걸쳐있어 주로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이용한 음악이 발달되어진 경향이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서양음악, 또는 클래식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형식적인 이론의 토대를 만든 시대이다. 이 시대의 음악가들은 기독교가 발전되는 시대의 사람들로 작곡하거나 연주하는 음악의 대부분이 교회음악인 경향을 보인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캐논으로 유명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 등이 있다. 위 문서에서는 이중에서 바흐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생애

독일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교회 음악가이다. 1685년 3월 독일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바이올린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3월 23일에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요한 파헬벨의 제자이자 큰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2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바흐는 18살에 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졸업을 한 뒤에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어 1703년 4월부터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해 8월에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77)의 작품과 오르간 곡에 많은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아 바흐의 개성과 기초 양식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바흐의 감독자 입장인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게 되어 아르슈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그만두고 같은 독일의 도시인 뮐하우젠으로 가게 된다.


뮐 하우젠에 가서 교회 음악중 한 종류인 칸타타라는 장르에 힘을 쓰게 되고 제 71번, 제 106번, 제 131번 등 유명한 명작을 작곡하게 되었고 이때 바흐의 가장 유명한 곡중 하나인 <토카타와 푸가> (BWV 565)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던 중 뮐하우젠에서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1년만에 떠나게 된다. 이후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오르가니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1708년도부터 1717년도 사이에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타의 불허를 추종하는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거듭나게 되어 그의 이름이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매달 1곡씩 교회 칸타타라는 장를 작곡을 하게 되었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기존에는 없었던 비발디와 같은 새로운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이러한 곡들을 연구를 한 끝에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을 개발하게 되고 이것은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에 대하여 관심이 많고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사서, 이례적(異例的)인 대우를 제공하였다. 쾨텐의 궁정은 칼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흐의 주된 직무는 귀족이나 영주들을 위한 세속적인 합주곡이나 실내악을 작곡하는 업무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와 같은 곡을 작곡하였고 바흐의 세속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기악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작곡이 되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1707년, 바흐는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 7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쾨텐 시대인 1720년에 이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연하인 소프라노 테너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더 가지게 된다. 총 20명의 자녀중에서 절반가까이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가 되었다. 쾨텐 시대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듣고 찾아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바흐는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유로 인하여 라이프치히로 떠나게 되었다.


독일 바로크의 핵심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합창장을 맡게 되었다. 1750년에 사망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시대의 창작물의 대표적인 예는 <마태오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 음악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기의 이상을 굳건히 주장하고 수호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이라는 장르에 점점 열정이 식어 의지를 잃은 것 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작곡은 갑작스럽게 수요가 줄게 되고, 그에 반하여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된 장르를 맡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수정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여 묶기도 하였으며, 혹은 곡집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시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적 헌정>(BWV1079)이다.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바흐의 최후의 걸작인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쓰러진 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750년 7월 28일, 사망하게 된다.

주요 작품목록

바흐의 작품은 타 음악가의 작품과는 다르게 BWV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타 음악가들의 작품에는 붙어있지 않는 이러한 표현이 낯설고 신기할텐데, BWV란 바흐 작품 목록이라는 뜻의 독일어인 Bach Werke Verzeichnis의 줄임말로 볼프강 슈미더가 붙인 바흐의 작품들의 번호이다. 바흐의 BWV는 칸타타로 시작하는 1번부터 1126번까지 존재한다. 바흐의 작품은 BWV가 존재하므로 악장이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으며 파트1이나 BWV00/0 이런식으로 붙인다. 예를들어 바흐 칸타타 35번 파트1은 35번 1악장이 아닌 BWV 35/1로 나타낸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2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로는 바흐가 작품번호를 매기지 않아서 정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바흐의 곡중 현존하는 곡들은 1번부터 1126번까지 BWV가 부여되었는데 일일히 종류별로 나눠 분류하기엔 양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푸가

푸가는 하나의 주제(때로는 2개 혹은 3개의 주제. 이 경우에는 2중푸가 혹은 3중푸가라고 한다)가 각 성부 혹은 각 악기에 장기적이며 규율적인 모방반복을 행하면서 특정된 조적(調的) 법칙을 지켜서 이루어지는 악곡이다.

이 푸가는 15세기경부터 시작이 되었지만 제대로된 체계화를 갖추지 못한 장르로 이러한 푸가를 바흐가 대위법을 통하여 형식의 틀을 다지게 되면서 음악의 체계가 과학적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을 만들게 된 바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대에서는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영상 자료

Bach <toccata and fugue> (BWV 565) / 바흐 <토카타와 푸가> (바흐 작품번호 565번) / CC BY SA by Top Classical Music

음원 자료

https://freesound.org/s/135883/ Bach fugue G minor/ 바흐 푸가 사단조 / CC BY by roby_caso
https://archive.org/details/HaroldSamuelBWV847#donate_dropdown Bach - Prelude & Fugue No. 2 in C Minor / 바흐 2번 전주곡 & 푸가 다단조 / public domain
칸타타

17세기 초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의 바로크시대에 가장 성행했던 성악곡의 형식으로 바흐가 만든 대부분의 교회 음악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바흐의 칸타타는 BWV1번부터 BWV224번까지 총 224개의 칸타타가 있으며 이 중에서 200번까지는 교회 음악인 칸타타이지만 201~224번까지는 교회음악에 회의감을 느끼고 만든 세속 칸타타이다.

영상 자료

Bach cantata 35 (BWV35) / 바흐 칸타타 35번 파트1(바흐 작품번호 35번) / CC BY SA by Classical Inspiration

Bach cantata 127 (BWV127) / 바흐 칸타타 127번 (바흐 작품번호 127번) / CC BY SA by History of Music

음원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JohannSebastianBachCantata196/5-01Sinfonia.mp3 Bach cantata (BWV196) / 바흐 칸타타 (바흐 작품 번호 196) / public domain
인벤션

인벤션(Invention)이란 악곡의 형식으로, 다성음악으로 된 즉흥곡이다 바흐는 푸가를 대위법을 사용하여 음악의 토대를 다진 것 처럼 인벤션을 통하여 화성학을 다졌다. 이러한 바흐의 모습을 보고 베토벤은 '바흐는 화성의 왕이다'라고 지칭하였다.

영상 자료

Bach Invention No.4 In D Minor (BWV775) / 바흐 인벤션 4번 라단조 (바흐 작품번호 775번) / CC BY SA by Pianow

음원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BachInventionNo.1 Bach Invention No.1 In C Major (BWV772) / 바흐 인벤션 1번 다장조 (바흐 작품번호 772번) / public domain
https://archive.org/details/BachInvention3  Bach Invention No.3 In D Major (BWV774) / 바흐 인벤션 2번 라장조 (바흐 작품번호 774번) / public domain

관련 사진

고전파 음악가

고전파는 음악가란 바로크시대 음악과 낭만파 사이의 중간지점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로크시대 음악이 음악의 기초를 다지는 성격이었다면, 고전파는 이를 완곡히 지켜 만드는 음악성을 띄고 있다.

이 시대에는 피아노를 대중적이게 접하게 된 시기로 피아노의 출현 하나로 음악계에는 혁명이 불게 된다.

고전파는 새롭게 탄생한 피아노라는 악기와 바로크시대에 완성된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소나타, 교향곡과 같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클래식을 시작한 시기로 이 시기부터 클래식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기존의 서양 음악이 교회 위주였다면 현재 대중음악과 같은 위치인 가곡이 발달하는 등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 음악이 발전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음악가로는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베르트,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는 모차르트, 음악의 악성이라고 불리는 베토벤 등이 있다. 위 문서에서는 이중에서 베토벤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베토벤




음악의 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

생애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 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으로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 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와 페슈트로 갔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인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과 연주를 계속하였다.1796년경에는 또한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과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다. 1801년에는 또한 청각이 들리지 않는것이 심해지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이렇게 청력을 잃게 된 베토벤은 결국 노쇄하게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목록

바로크시대에는 칸타타, 푸가와 같은 형식이 자주 연주되었다면 고전파 음악에서는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등이 많이 쓰였다. 이 곡들의 형식에 대하여 다루어볼 예정이다.


피아노 소나타

소나타(Sonata)는 기악을 위한 음악 형식의 하나로, 주로 노래가 동반되는 칸타타(cantata)에 대비되어 '연주'만 되는 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바로크시대 음악에도 사용한 장르이지만 대중화 되면서 메이저의 반열에 들은것은 고전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전파의 소나타는 빠르기나 성격이 완전히 다른 3~4악장의 구조로 이루어진 곡을 지칭한다. 서양 음악가들은 많은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그 중에서 베토벤의 소나타가 가장 유명하다. 베토벤은 주로 3악장의 형식의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이 소나타의 구조는 1악장 - allegro(빠르게), 2악장 - adagio(느리게), 3악장 - allegro(빠르게)로 이루어진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며 대표적인 소나타인 '월광 소나타'의 경우에는 1악장 - adagio(느리게), 2악장 minuet(4분의 3박자의 느린 춤곡 형식), 3악장 presto(매우빠르게)에 가까운 allegro(빠르게)로 이루어지고있다. 이러한 소나타 중에서 피아노 소나타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소나타이며 주로 베토벤의 피아노의 소나타를 자주 접하고 있다. 베토벤 소나타의 경우 한국에서는 예고나 음대의 피아노과 입시곡으로 자주 지정이 되기도 한다.

영상 자료

Beethoven Piano Sonata NO.8 'pathetique' 1st movement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부제 '비창' 1악장 / CC BY SA by tsukuru minowa

Beethoven Piano Sonata NO.14 'moonlight' 1st~3rd movement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부제 '월광' 1~3악장 / CC BY SA by LOVE JOURNEY

Beethoven Piano Sonata NO.23 'appassionata' 1st movement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부제 '열정' 1악장 / CC BY SA by Anastasia Huppmann 음원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PianoSonataNo.17 Beethoven Piano Sonata No.17 'tempest' 3rd movement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부제 '템페스트' 3악장 / public domain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는 위의 항목에 나와있는 피아노 소나타와 같이 소나타 형식을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곡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바이올린 소나타의 특징으로는 보통은 피아노 반주를 가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통 피아니스트들과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협주 무대(듀엣)에서 많이 사용된다.

교향곡

18세기 후반에 형식이 갖추어지고, 고전파 이후 중요한 곡종(曲種)이 된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다악장형식의 악곡. 형식상으로는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이지만 피아노소나타 등 많은 악곡이 3악장으로 구성된 데 대해 교향곡은 현악4중주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보통 제1악장(소나타 형식의 빠른 악장. 이 앞에 장중한 서곡이 오는 경우도 많다), 제2악장(리트 형식의 완만한 악장), 제3악장(미뉴엣 또는 스케르초), 제4악장(론도 또는 소나타 형식의 매우 빠른 악장)으로 되어 있다. 베토벤은 생애 총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고전파를 대표하는 교향곡이라 할 수 있으며 고전파 다음 시기인 낭만파의 교향곡의 표본이 되는 교향곡이다. 중,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자주 들려주었던 베토벤의 곡들 중 '운명', '환희의 송가'라는 부제가 붙은 곡들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 곡들은 드라마나 영화의 ost뿐만 아니라 광고나 예능에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접하는 베토벤의 곡의 장르이다. 베토벤에 교향곡에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음원 CD는 직경 12cm에 74분 2초 분량의 자료를 담을 수 있는 용량을 표준으로 두고 있다. 원래는 60분 분량의 용량에 직경은 11.5cm였지만 음원 CD를 최초로 만들 때 자문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인 카라얀이라는 인물에게 구하였는데 대중에게 가장 익숙하고 잘 알려진 곡인 '환희의 송가'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인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의 길이에 맞추자는 의견을 수렴하여 현재 음원CD의 용량이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협주곡

협주곡의 어원인 콘체르토는 ‘경합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의 동사 콘체르타레(concertare)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화려한 연주기교를 구사하는 독주악기(또는 독주악기군)와 관현악을 위해 작곡된 기악곡을 가리킨다. 콘체르타레의 뜻인 경합처럼 독주악기와 나머지 악기가 경합을 하거나 화합을 하는 구조의 진행으로 이루어지는 곡이다. 협주곡의 특징으로는 '카덴차'라고 불리는 파트가 나오는데 카덴차란 독주악기군과 나머지 악기군이 화합하여 협주를 진행하다 카덴차 부분이 되면 나머지 악기들은 연주를 멈추고 독주 악기만 연주를 진행을 하게 되는 부분이며 이때는 잔잔하거나 느린 풍의 곡이 아닌 기교를 부리며 빠른 템포를 유지하는 높은 난이도를 보여 곡의 긴장감을 올리는 음악의 요소이다. 이러한 협주곡의 대표적인 예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인 '사계'가 우리 생활속에 가장 익숙하다.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협주곡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피아노 협주곡,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베토벤의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점을 찾아본다면 고전파 이전인 바로크시대 음악가들은 피아노가 없었거나 피아노가 막 개발되는 과정의 과도기에 걸쳐있어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쓰이지 않았다. 피아노는 악기 하나로 반주부 주제부 화음부 3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혁명적인 악기였기 때문에 음악사는 피아노의 등장 전과 후로 나누기도 한다. 베토벤의 협주곡은 모차르트 협주곡과 같이 피아노라는 악기를 처음으로 쓰게 된 협주곡이라는 의의가 있으며 모차르트 협주곡보단 베토벤의 협주곡이 더욱 유명하고 많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다루려고 한다.

관련 사진

낭만파 음악가

쇼팽




피아노의 시인, 프레드리크 프랑수아 쇼팽

생애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édéric François Chopin, 문화어: 프레데리크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던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 크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쇼팽 자신과 가족은 쇼팽이 1810년 3월 1일에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 기록을 보면 2월 22일에 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을 근거로 쇼팽을 연구하는 사람의 3분의 2는 그의 생일이 2월 22일이 맞다고 보고 있다. 쇼팽의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그것이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였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8세 때에 공연을 가졌다.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보도되면서 귀족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자선공연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피아노 레슨은 1816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받게 되었는데,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폐결핵으로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è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ę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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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시계 제조공, 조세프 모리스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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