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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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1월 29일 (금) 19:26 판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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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시대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생애

독일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교회 음악가이다. 1685년 3월 독일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바이올린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3월 23일에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요한 파헬벨의 제자이자 큰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2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바흐는 18살에 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졸업을 한 뒤에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어 1703년 4월부터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해 8월에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77)의 작품과 오르간 곡에 많은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아 바흐의 개성과 기초 양식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바흐의 감독자 입장인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게 되어 아르슈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그만두고 같은 독일의 도시인 뮐하우젠으로 가게 된다. 뮐 하우젠에 가서 교회 음악중 한 종류인 칸타타라는 장르에 힘을 쓰게 되고 제 71번, 제 106번, 제 131번 등 유명한 명작을 작곡하게 되었고 이때 바흐의 가장 유명한 곡중 하나인 <토카타와 푸가> (BWV 565)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던 중 뮐하우젠에서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1년만에 떠나게 된다. 이후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오르가니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1708년도부터 1717년도 사이에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타의 불허를 추종하는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거듭나게 되어 그의 이름이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매달 1곡씩 교회 칸타타라는 장를 작곡을 하게 되었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기존에는 없었던 비발디와 같은 새로운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이러한 곡들을 연구를 한 끝에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을 개발하게 되고 이것은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에 대하여 관심이 많고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사서, 이례적(異例的)인 대우를 제공하였다. 쾨텐의 궁정은 칼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흐의 주된 직무는 귀족이나 영주들을 위한 세속적인 합주곡이나 실내악을 작곡하는 업무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와 같은 곡을 작곡하였고 바흐의 세속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기악곡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작곡이 되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1707년, 바흐는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 7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쾨텐 시대인 1720년에 이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연하인 소프라노 테너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더 가지게 된다. 총 20명의 자녀중에서 절반가까이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가 되었다. 쾨텐 시대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듣고 찾아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바흐는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유로 인하여 라이프치히로 떠나게 되었다. 독일 바로크의 핵심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합창장을 맡게 되었다. 1750년에 사망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시대의 창작물의 대표적인 예는 <마태오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 음악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기의 이상을 굳건히 주장하고 수호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이라는 장르에 점점 열정이 식어 의지를 잃은 것 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작곡은 갑작스럽게 수요가 줄게 되고, 그에 반하여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된 장르를 맡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수정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여 묶기도 하였으며, 혹은 곡집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시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적 헌정>(BWV1079)이다.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바흐의 최후의 걸작인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쓰러진 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750년 7월 28일, 사망하게 된다.

주요 작품목록

Bach <toccata and fugue> (BWV 565) / 바흐 <토카타와 푸가> (바흐 작품번호 565번) / CC BY SA by Top Classical Music

Bach cantata 35 (BWV35) / 바흐 칸타타 35번 1악장(바흐 작품번호 35번) / CC BY SA by Classical Inspiration

Bach invention no.4 D minor (BWV775) / 바흐 인벤션 4번 라단조 (바흐 작품번호 775번) / CC BY SA by Pianow

헨델



음악의 어머니,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생애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과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경기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가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여[2],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의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시의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3]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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