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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달 작품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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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을 입에 댄 나부」[1937]·「등을 보이고 있는 나부」[1938] 등은 일본여성을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일본 미술계를 풍미했던 [[야수파적]] 경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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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을 입에 댄 나부」'''[1937]·'''「등을 보이고 있는 나부」'''[1938] 등은 일본여성을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일본 미술계를 풍미했던 [[야수파적]]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대상에 충실하면서도 강한 붓 자국과 명암 대비를 잘 표현하였다.특히 서진달은 [[나체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대상에 충실하면서도 강한 붓 자국과 명암 대비를 잘 표현하였다.특히 서진달은 [[나체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2018년 6월 18일 (월) 20:54 판




서진달(1908~1947)

서진달은 화가이며, 변종하에게 서양화를 가르쳤다.

생애

서진달(徐鎭達)[1908~1947]은 190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이고 호는 도풍(稻風)이다. 부산으로 와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미술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5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고바야시등에게 인상주의아카데미즘이 절충된 조형어법을 배웠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1940년 제3회 재동경 미술 협회전에 9점을 출품하였다.1941년부터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면서 변종하·김창락·추연근·백태호·김우조 등을 가르쳤다. 방랑벽이 심하였지만 미술반 제자들의 교육은 철저하고 열성적이었다. 이후 인천의 소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42년 중국 둥베이로 가서 하얼빈공과대학 강사를 지내면서, 1943년 개인전을 열었다. 8·15 해방 후에는 부산에 정착하여 미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하지만 가정 파탄으로 인하여 독신으로 지내게 되었고 무질서한 생활 속에 방황하다가, 이로 인해 1947년 결핵에 걸려 4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1948년 대구 공회당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작품세계 (활동내역)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시장의 일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미술 연구소와 미술 학교 재학 중에 조선 미술 전람회에 여섯 차례나 출품하여 「소녀 탄주도(彈奏圖)」·「인물」·「나부(裸婦)」·「스토브」 등이 입선하였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1940년 제3회 재동경 미술 협회전에 「정물 A」·「나부」 등 9점을 출품하였다

서진달의 작품

  • 나부


  • 인물
  • 정물,풍경

서진달 작품의 특징

  • 「왼손을 입에 댄 나부」[1937]·「등을 보이고 있는 나부」[1938] 등은 일본여성을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일본 미술계를 풍미했던 야수파적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대상에 충실하면서도 강한 붓 자국과 명암 대비를 잘 표현하였다.특히 서진달은 나체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 그의 작품세계는 재학 때부터 심취하였던 세잔(Cezanne, P.)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대담한 구도와 활달한 붓질이 두드러진 풍경과 정물에서도 세잔의 조형요소를 도입한 그의 작품세계가 잘 나타나 있지만, 특히 인물화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대담한 구도와 힘이 넘치는 거친 터치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강하게 대비시킴으로써 화면을 역동감 있게 처리하고 볼륨이 강한 인체의 면처리 등이 그의 인물화에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서진달 변종하 서진달변종하의 스승이다.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데이터진흥원]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조아현 기여자: 김진형, 김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