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이 부족한 무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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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후에 왕이 되면서 방원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95%88%EB%8C%80%EA%B5%B0 방번], [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95%88%EB%8C%80%EA%B5%B0_(1382%EB%85%84) 방석],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8F%84%EC%A0%84 정도전],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D%80 남은 ]살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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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후에 왕이 되면서 방원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95%88%EB%8C%80%EA%B5%B0 방번], [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95%88%EB%8C%80%EA%B5%B0_(1382%EB%85%84) 방석],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8F%84%EC%A0%84 정도전],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D%80 남은]등을 살해하고 정종 이후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신덕왕후의 제례를 폐하고 무덤의 석조물을 훼손/유실시켰다.  
 
 
 
 
정종 이후 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덕왕후의 제례를 폐하고,
 
 
 
 
 
 
 
 
 
 
 
 
 
 
 
 
 
 
 
. 정도전과 합세하여 둘째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396년 8월 13일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되어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1398년 왕위를 노리는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 방석(왕세자)과 사위, 반대파 정도전, 남은 등이 살해되었다.
 
 
 
처음에는 도성 안 황화방(皇華坊) 북원(현 영국대사관 )에 묻혔으나 태조 이성계 사망 후 이듬해인 1409년 2월 강씨의 묘를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으로 이장하였다.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의 공사끝에 170여 간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조선 태종)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묘를 이장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왕비로 복위되고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덕왕후 [神德王后]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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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일 (월) 19:24 판


개요

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그 구성이 빈약한 편이다. 정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원래 두 쌍이 있어야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한 쌍밖에 배치되어있지 않다. 과연 왜 그런 것일까?


본문

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그 구성이 빈약한 편이다. 정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원래 두 쌍이 있어야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한 쌍밖에 배치되어있지 않다. 과연 정릉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정릉은 조선의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자,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방번, 방석, 경순공주를 낳았다. 이성계는 자신이 지방 출신의 인물이라는 것에 한계를 느껴 세력을 늘리고자 그녀와 정략적인 결혼을 맺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조선 개국에 큰 공헌을 하고, 대담한 지략을 구상하여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심지어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주기까지 한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달라는 신덕왕후의 요청을 들어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후에 왕이 되면서 방원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 방석, 정도전, 남은등을 살해하고 정종 이후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신덕왕후의 제례를 폐하고 무덤의 석조물을 훼손/유실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