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이 부족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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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원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2월 2일 (월) 19: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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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그 구성이 빈약한 편이다. 정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원래 두 쌍이 있어야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한 쌍밖에 배치되어있지 않다. 과연 왜 그런 것일까?


본문

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그 구성이 빈약한 편이다. 정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원래 두 쌍이 있어야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한 쌍밖에 배치되어있지 않다. 과연 정릉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정릉은 조선의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자,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방번, 방석, 경순공주를 낳았다. 이성계는 자신이 지방 출신의 인물이라는 것에 한계를 느껴 세력을 늘리고자 그녀와 정략적인 결혼을 맺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조선 개국에 큰 공헌을 하고, 대담한 지략을 구상하여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심지어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주기까지 한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달라는 신덕왕후의 요청을 들어주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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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정종 1) 기일에 흥천사(興天寺)를 원당으로 삼아 제사할 때 태상왕(太上王: 태조)도 참례하였다. 태상왕이 사망한 뒤 1409년(태종 9) 2월에 묘를 사을한(沙乙閑)곡에 이장했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그 뒤 1412년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200여 년 뒤인 1581년(선조 14) 11월 먼저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 여만에 정파된 바가 있다.

이 때 중신들의 주장은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신의(神懿)·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에 칭송이 엄연한데 그 뜻과 달리 후대인들이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 등이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현종 대에 이르러 정통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이 강조되고 예론이 크게 일어나자 강씨의 부묘 문제는 다시 대두하였다.

즉,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은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로써 이 해 9월 강씨의 기신제가 8월 11일로 고정되어 200여 년만에 복구되었다. 그리고 추진 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하였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소생으로 왕자 이방번(李芳蕃)·이방석(李芳碩)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덕왕후 [神德王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방원과 갈등이 깊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덕왕후 [神德王后] (두산백과)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자 현비(顯妃)에 책봉되어 왕후가 되었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았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대담한 지략을 구상하였다. 이성계를 위험에서 구했으며 조선 개국의 지대한 공헌을 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방원과 갈등이 깊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둘째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396년 8월 13일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되어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1398년 왕위를 노리는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 방석(왕세자)과 사위, 반대파 정도전, 남은 등이 살해되었다.

처음에는 도성 안 황화방(皇華坊) 북원(현 영국대사관 )에 묻혔으나 태조 이성계 사망 후 이듬해인 1409년 2월 강씨의 묘를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으로 이장하였다.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의 공사끝에 170여 간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조선 태종)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묘를 이장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왕비로 복위되고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덕왕후 [神德王后]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