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이 부족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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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원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2월 2일 (월) 19:3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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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그 구성이 빈약한 편이다. 정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원래 두 쌍이 있어야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한 쌍밖에 배치되어있지 않다. 과연 왜 그런 것일까?


본문

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그 구성이 빈약한 편이다. 정릉에는 난간석이 없고, 원래 두 쌍이 있어야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한 쌍밖에 배치되어있지 않다. 과연 정릉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정릉은 조선의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자,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방번, 방석, 경순공주를 낳았다. 이성계는 자신이 지방 출신의 인물이라는 것에 한계를 느껴 세력을 늘리고자 그녀와 정략적인 결혼을 맺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조선 개국에 큰 공헌을 하고, 대담한 지략을 구상하여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심지어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주기까지 한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달라는 신덕왕후의 요청을 들어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후에 왕이 되면서 방원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마침내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 방석, 정도전, 남은등을 살해하였고, 즉위한 이후에는 신덕왕후의 제례를 폐하고 무덤의 석조물을 훼손/유실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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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신덕왕후의 묘를 한양도성 안에 짓고, 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써 거대한 규모의 흥천사를 지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소생의 왕자인 방석(정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다른 왕자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태종 즉위 시기

태종은 신덕왕후의 지위를 왕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따라 정릉 역시 능에서 묘로 계급이 하락하였다.


현종 즉위 시기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의 상소로 인해 묘로 격하되었던 정릉이 다시 능으로 복원되고, 태종 때 사라졌던 일부 구조물들이 재구성되었다.

고종 즉위 시기

신덕왕후가 신덕고황후로 추존되고, 옛 표석을 갈아 대한신덕고황후정릉비를 세웠다.

현재

정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208호로 지정되었고, '조선왕릉'으로써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