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의 관광명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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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9 차예빈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1일 (화) 03: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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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관광명소(1)

  • 성북구의 관광명소 소개


성북구 관광명소

성북구 지도.jpg

성북구에 위치한 역사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는 관광명소와 한번쯤은 꼭 가볼만 한 명소들을 표시해놓았다.

정릉동

정릉

정릉(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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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릉=태조의 계비 신덕왕후능

사적 제 208호 (1970.05.26 지정)

신덕왕후를 총애했던 이성계가 경복궁 인근에 신덕왕후의 무덤을 두고자 했기 때문에 4대문 안쪽 지역인 정동에 무덤을 뒀다.

그러나 1409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지금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옮겼다.


  • 역사적 비하인드 스토리


이성계 ❤ 신덕왕후 로맨스 스토리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급히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물바가지에 물을 뜬 후 버들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이성계가 그 연유를 묻자 처녀가 대답했다.

"갈증으루 급히 달려오신 것 같사온데, 물을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한 이성계는 빼어난 미색에 갸륵한 마음씨까지 갖춘 처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 처녀가 바로 신덕왕후이다.


성북동

만해한용운심우장

한용운 심우장.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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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제 550호 (2019.04.08 지정)

3.1운동 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보통의 한옥이 선호하는 남향과는 반대로 북향으로 되어있는 집인데 그 이유가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 때문에 반대인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집에 방향도 바꿀만큼 독립을 염원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서울 성북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구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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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등록문화재 제 655호 (2015.12.16일 지정)

한국 카톨릭 최초의 방인 남자수도회로 1953년에 설립된 한국순교복자성직자 수도회의 본원 건물이었고 한국인 신부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역사적, 종교적 가치를 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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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구성한 이 건축물은 후진 평면을 일반 성당의 반원형 대신 타원형으로 설계했다.

또 제단 상부 돔 역시 반원형이 아닌 타원형 반구로 조성하는 등 다른 성당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북동 별서(성락원)

성북구 별사.jpg 성락원 실내모습.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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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내에 유일하게 남은 조선 후기 전통정원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넘겨받아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으며 당시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쓰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는 서울 성북동 별서는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 위치한 몇 안되는 별서정원의 하나로 가치가 크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사유지여서 1년에 한두 차례 지역 행사 등을 위해서만 개방해 왔으나 2019년 4월 일반인 대상으로 처음 개방됐다.

  • 비하인드 스토리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2019년 별장의 원주인으로 알려진‘심상응’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 '성락원' 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두고 문화재 지정 해제 논쟁이 불거졌다. 하지만 결국 서울시에 몇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정원으로서의 가치 등을 인정받아 ‘서울 성북동 별서’라는 이름의 명승으로 재지정 되었다.


선잠단지

서울 선잠단지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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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제 82호 (1963.01.21 지정)

선잠제: 나라에서 직접 진행하는 제사 (누에 치기를 하는 양잠을 장려하는 행사) 이곳은 고려 성종 2년 (983년)에 처음 쌓았고, 단의 앞쪽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키우게 했던 제사 터인데 선농단이라고 불린다.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철폐되면서 땅도 개인 소유가 되었지만 1963년에 사적 제 83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것을 기초로 공사를 시작해 2020년 완공되었다.

  • 실제 선잠제 모습


삼선동

삼군부 총무당

19271935년경 총무당 전경.jpg 삼군부 총무당 최근 사진.jpg

 1900년대 초기 삼군부 총무당 모습                                현재 삼군부 총무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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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37호 (1978.12.18 지정)

삼군부는 조선 초기에 군정과 군령을 총괄하던 관서로, 정식 명칭은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였다. 태종 이후 군정 기능은 병조로, 군령 기능은 오위로 분할 및 귀속되며 사라졌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이 재설치했다.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설치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부기구였고, 정부기구의 중심 기구였다.

서울 돈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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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문화재 제91호 (2004.09.04 지정)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현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목조 팔작지붕의 한옥 본채 한 동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거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승만이 머물던 당시, 돈암장은 중요한 정치적 무대가 되었다. 이승만이 우익 진영의 최고지도자로 해방 공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정치가였던 만큼, 그가 거처한 돈암장 역시 핫플레이스가 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특히 1945년 말에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우익 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이승만이 그 중심에 서면서 돈암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 실제 돈암장 모습이 담긴 이승만의 영상


석관동

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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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제 204호 (1970.05.26일 지정)

조선후기 제20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 경종(1668~1724)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로 재위 기간 아들이 없어 이복동생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했다. 이 일로 노론과 소론이 격돌했고 두 차례의 피비린내나는 옥사(신축, 임인옥사)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경종은 너무 이른 3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역사적인 비하인드 스토리 (경종에 죽음에 대한 스토리)

경종의 이른 죽음에 소론측으로부터 연잉군을 앞세운 노론측의 '독살'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이후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등 영조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비만과 섭식장애를 가진 경종은 병약하였는데, 장에 안좋은 게장과 생감을 영조가 올리고 이로 인해 오한과 설사가 반복되었고, 병세가 악화되어 생사의 기로에 선 경종에게 영조와 우의정이 인삼과 부자의 처방을 주장해 경종이 죽었다'는 것이 '경종독살설'이다.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고 한다.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

의릉 구 강당 건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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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문화재 제 92호(2004.09.04 지정)

실제 1972년 7월 4일 이 장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이 남북 간의 합의를 통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철거가 예정되기도 하였지만, 냉전시대의 화해와 단합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남긴 현장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9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참고 설명

[1] 통일부 제공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과 7·4 남북공동성명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