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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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손님>은 2000년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소설을 단행본 출간을 위해 새로이 손본 것이다. 이 책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 지은이가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 베를린 장벽 붕괴를 목격하면서 부터 구상한 소설이다.

지은이는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데올로기(기독교와 맑스주의)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解怨)을 그려냈다.

제목이 뜻하는 손님이란 천연두를 뜻하는 민속적 별명이기도 하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17세기 서양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건너온 천연두는 병자호란 뒤부터는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다. 이후 마을 어귀에 세워진 장승이나 돌무더기 들은 이런 '손님 귀신'을 막고자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즉,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손님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손님 귀신'으로서, 막아내고자 하는 타자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소설 속에서 지은이가 규정한 손님은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타의에 의해 지니게 되었다고 판단되는 기독교와 맑스주의 이다.


목차

  1. 부정풀이 죽은 뒤에 남는 것
  2. 신을 받음 오늘은 어제 죽은 자의 내일
  3. 저승사자 망자와 역할 바꾸기
  4. 대내림 살아남은 자
  5. 맑은 혼 화해 전에 따져보기
  6. 베 가르기 신에게도 죄가 있다
  7. 생명돋움 이승에는 누가 살까
  8. 시왕 심판마당
  9. 길 가르기 이별
  10. 옷 태우기 매장
  11. 넋반 무엇이 될꼬 하니
  12. 뒤풀이 너두 먹구 물러가라


줄거리

미국에서 목사로 지내는 요섭은 분단 후 40년만에 이루어진 고향 방문에 기대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형 요한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요섭은 형이 마지막까지 품고 죽은 고향에서의 사건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북한 방문 후 특별히 고향과 친척을 방문할 생각이 없었던 요섭은 안내원의 강요와 일말의 기대감으로 고향에 남아 있던 친척을 방문하게 되고 요섭의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된 사건을 기억해 낸다. 요섭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떠오르고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귀신처럼 나타나 사건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방식은 굿이 진행되는 과정, 즉 굿의 진행에서 각 원혼들이 나타나 자신의 원한을 말하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황석영은 당시 신천 학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모두 들려준다. 요섭은 신천에서 중간 지주의 아들로 자랐다. 신천은 조선말에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지주를 중심으로 개종한, 기독교의 전통이 오래된 곳이었다. 요섭의 집안 역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러나 신천의 기독교 세력은 지주를 중심으로 한 소위 부르조아의 종교였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소작인과 하인들 중 다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설의 주요 대립 인물인 요한과 순남이 형은 이러한 신천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인물들이다. 요한은 모태신앙을 받은 기독교인이자 지주 계급의 아들로서 유산계급을 대표한 반면 순남이 아저씨는 소작인의 아들이고 일제시대 광산에서 맑스주의를 접해 해방과 함께 신천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무산계급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해방이후 북쪽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기독교와 지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일성 정권에 비협조적이었던 신천의 기독교 세력은 선거를 방해해서 탄압을 받게 되고 지주로서의 권리 역시 박탈당한다. 요섭의 집안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된다. 요섭의 집에서 머슴을 지내던 이찌로 아저씨는 해방 이후 사회주의 교육을 받게되고 지주 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작인들은 농지 개혁으로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 지주(기독교) 세력과 대립하게 된다. 한국 전쟁이 터지게 되고 미군의 개입으로 북한이 퇴각하게 되자 신천은 잠시 무정부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 와중에 산 속에 숨어있던 기독교 청년들이 무장 봉기해 신천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세력은 무자비한 학살을 실시한다. 당시 사회주의 동맹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광폭한 나날을 보낸다. 이들의 학살은 점점 대담해지고 급기야는 의견차이와 불안으로 서로 대립하게된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자 한국군과 미군은 다시 퇴각하게 된다. 이때 학살을 자행한 기독교 세력은 미군과 함께 신천을 빠져나왔고 요섭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신천에서 일어난 학살을 요섭에게 말해주던 혼령은 모두 함께 모여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형 요한의 혼령과 순남이 아저씨, 이찌로 아저씨의 혼령이 함께 사라지며 서로 화해했음을 암시해준다. 요섭은 요한의 뼛조각을 고향땅에 묻으며 신천에서 있었던 비극을 용서하고 화해를 빈다.[1]


작가의 말

『손님』은 내가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에 사실상 세계적인 냉전체제 해체의 시작이었던 장벽붕괴를 목격하면서 진작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다. 문체나 구성에 대해서 이른바 '객관성'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돌이켜보며 반성하던 무렵이었다. 당시의 내 창작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 된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어들이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역사와 개인의 꿈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나는 거기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가본 적도 없지만 아버지가 소년기에 만주로 떠나기 전에 살았던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한 적이 있다. 89년의 방북시기에 그곳을 안내 받아 갔었다. 물론 외가인 평양과는 달리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났던 아버지의 친척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호적상 나의 원적은, 黃海道 信川郡 溫川面 溫井里 103番地이다. 신천에는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이 있었고 나는 당연히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진상'이 있지 않을까 하며 의심하는 버릇은 작가로서의 천성이기도 했다. 나중에 뉴욕에 체류하면서 류아무개 목사를 만나 그의 소년시절의 목격담을 듣고서야 의문이 풀려갔다. 그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친구의 모친에게서 우연히 전쟁 당시의 황해도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자료와 목격담을 모아나가다가 귀국해서 투옥되면서 작업을 중단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훨씬 다행이었다. 옥방에서 나의 구상이 좀더 무르익을 때까지 이러저러한 형식들을 적용해볼 수 있었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실들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었으므로 북이나 남의 어떤 부류들이 매우 싫어할 내용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도에 비해 희박했던 북선 지방은 이 두 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한국전쟁 50주년이던 작년 6월부터 『손님』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또한 작년은 남북정상회담이며 이산가족 상봉 등의 사건으로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서구에서 냉전이 사라진 지 십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변방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실상 무서운 '손님 마마님'은 아직도 미국이 아닌가.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 여기서는 굿판에서처럼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고 그들의 회상과 이야기도 제각각이다. 나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하나의 씨줄과,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을 모자이끄처럼 총체화하는 '구전담화'라는 날줄을 서로 엮어서 한폭의 베를 짜듯 구성하였다. 지노귀굿은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전국적인 형식의 '넋굿'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진오귀, 오구, 지노귀 등으로 불린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황석영[2]


작품 해설

[작가가 작가에게] 황석영의‘손님’속 갈등

 어린 시절, 명절이면 만날 수 있던 고모며 삼촌들은 모두들 거세고 퉁명스런 이북 사투리를 썼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려 이제는 얼굴 모습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지만, 작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동안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씨는 내 아버지 핏줄들의 낯익은 목소리로 되살아나 귓가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코미디에서 가끔 들을 수 있을까,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일지라도 주위에 그런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던 세대는 아마도 내 또래들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

‘손님’은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학살의 주도자이기도 했던 형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는 재미교포 목사의 행적을 따라 가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같이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지내던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증오의 진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드러냄은 한을 품은 망자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에게 맺힌 매듭을 푸는,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 일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천도굿의 형식이다.

작가가 보는 학살사건의 진상은, 서양에서 온 ‘손님’일 따름인 기독교와 공산주의,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종교와 돈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 그 두 믿음을 철저히 신봉하던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나 공산주의나 둘 다 너무나 옳은 말씀들이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에 전쟁이나 불평등, 증오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상하게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던 적이 많다.

아마도 이원론적인 서양 문명에서 비롯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둘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궁극적으로는 ‘밖’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도록 확장해나가는 게 목적인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모든 분쟁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적대감에 의해 편을 가르는’ 본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의 또 다른 면, 그러니까 긍정적이고 밝은 면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손님’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보이는 소메 삼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무슨 뜻이 있거나 가까운 데서 잘해얀다구 기랬디. 늘 보넌 식구들과 동니 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문 덫을 놓아 먹구 살게 되넌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

‘덫을 놓아 먹고 산다’니 정말 중심을 꿰뚫는 표현이다. 비단 우리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어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만 모르는 것과 다름없이 뒤로 젖혀놓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일깨워주는 말들이 아닌가. 마침 소설을 읽는 내내 매스컴에서는 8·15 방북단에 대한 보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소설가, 부희령[3]


작품 연구


수상

  • 2001년 제9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작품평

도정일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요한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돌아가지 못한다. 고향에 남아 있던 삼촌의 말대로 그들 모두는 저희 태가 묻힌 땅을 피로 물들이고 꿈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떠도는 혼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를 따라다니는 그 많은 검은 유령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섭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50년 만에 그야말로 ‘손님’의 자격으로 고향을 찾아간다. 이 땅에 있었던 기이한 번제(燔祭)와 광기, 상처와 모욕의 기억들로부터 놓여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외없이 당신과 나는, 떠도는 유령이며 손님이다. 이 작품에는 세 종류의 손님이 있다. 우리가 밖에서 틈입한 마마귀신 같은 ‘손님’이어야 하는가? 『손님』은 한국의 큰 작가만이, 어쩌면 황석영만이 쓸 수 있는 한국인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오래오래 읽힐 것이며 당연히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오를 것이다.
임규찬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황석영이기에 가능한 또 한번의 처절한 영매술이다. 신들린 사람처럼 그가 불러낸 귀기의 허깨비들은 기실 역사의 산 귀신이었으니, 책장을 덮자 방금 긴 악몽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너무도 생생한 분단 반세기의 처절한 영혼이 여기 숨쉬고 있다. 황석영이기에 가능한 또 한번의 큰 현실이다. 반쪽 섬에 갇혀 또다른 반쪽을 철저히 적대시했던 사시(斜視)의 망막을 걷어내고 철조망을 훌쩍 넘던 그 발걸음으로 북녘의 숨은 역사까지 끌어안으니, 화해와 통일을 향한 ‘우리화’된 민족현실의 큰 악수가 여기 숨쉬고 있다. 황석영이기에 가능한 또 한번의 멋진 문학적 뒤집기이다. 손쉬운 현실배제의 유희주의·기법주의로 치닫는 최근의 경향 속에서 낯익은 리얼리즘으로부터 이탈하면서도 그것을 더 큰 리얼리즘으로 일구어내는 우리네 옛 기법의 멋진 서사적 성채가 여기 숨쉬고 있다.



작품 배경

신천군 사건

피카소(Pablo Ruiz Picasso)의 1951년作-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학살을 접한 피카소가 그린 작품. 그림에 그려진 인물이 누구를 표현하는 것인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로서 미국에 반대했다는 점을 들어, 미국에 의한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1950)을 표현했다는 설과 황해도 신천군에서 5천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던 신천 양민 학살사건(1950)이라는 설이 있다. 대량학살이 가능하게 한 현대무기와 현대의 전쟁을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4]


신천군 사건(信川郡 事件)은 한국 전쟁이 벌어진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신천 학살 혹은 신천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른다.

민간인 학살의 존재 여부는 확신할 수 있지만, 학살의 주체를 두고서 북한 정부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대한민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상이하다. 북한 정부는 신천군 사건의 주체를 미군으로 지목하며, 학살 현장에 신천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신천군 사건 소개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위원회는 북한 정부의 요청으로 북한 땅을 방문, 평안도와 황해도, 강원도 등 북한 지역을 돌며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조사위원회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의 이른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을 증거수집에 천착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고, 1952년 3월 31일에 작성한 보고서의 ‘제4장 대량학살, 살해 및 기타 잔혹행위’에서 이들은 황해도 신천의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7일,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해리슨(신천 미 점령군사령관)은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했다. ‘남아 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그는 모든 ‘빨갱이’ 지지자들을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인민군 병사의 가족들과 부역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다. 건물 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밀어냈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지만 한 아이는 도망쳤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작성한 해당 보고서를 들어 북한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미군이 점령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 예하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신천군 한 군에서만)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1/4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음을 주장한다.


북한측 주장의 의문점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에 의한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6.25 동란)은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조선인민군)을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패퇴를 거듭했었다. 국군과 유엔군, 특히 미군 각 부대는 이 과정에서 북한 정권의 본거지 평양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고 덕분에 정작 신천군에는 그리 오래 주둔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을 주도한 미군의 지휘관으로 지목하는 '해리슨'이라는 미군 중위가 실제 당시의 미군 명단에서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부터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 주도에 의한 학살설은 근거가 흔들린다.

당시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신천군 사건을 주도, 감독한 것으로 지목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미8군 부사령관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윌리엄 켈리 해리슨으로, 보고서는 그가 신천군에서의 학살을 주도했으며 그것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도록 명령했다고 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고, 윌리엄 켈리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본인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정작 신천군 사건 당시에는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좌우대립으로 인한 학살
신천군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 정황상 근거가 부족한 북한측의 미군 주도설을 배제하고, 현재까지 확인된 증언과 연구 성과를 통해 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신천군 사건의 본질이 북한의 주장처럼 미군의 개입이나 일부 우파가 증언하는 것과 같은 북한 정권의 조작(남한에 대한 책임 전가 같은), 내지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자유주의 투쟁으로써보다는 해방 공간이라는 특수성, 그리고 전쟁이라는 대혼란 속에 격화된 좌우 대립으로 빚어진 동족간 학살이라는 것이다. 2004년에 한국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서는 신천군 사건은 미군의 학살 개입과는 상관없이 신천군 내의 기독교 우파 세력과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당시의 공산 좌파 세력간의 알력이 북한 정권에서 시행한 토지개혁을 매개로 격화, 파멸적인 비극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당시 황해도 지역의 복잡한 역학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신천군을 비롯해 평야 지대인 황해도 지역은 대표적 곡창 지대의 하나로써 광복 직후 지주와 소작인, 좌우익간의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났고,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면서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과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공산주의적 원칙을 내세운 조선공산당의 토지개혁 과정에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월남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앞두고 선발대로 고향에 복귀했고, 신천군에 남아있던 좌익 활동가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정치적인 의사와 상관없이 남아있었을 뿐인 민간인들마저 부역자로 몰려 무차별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손님》에서의 신천군 사건

손님에서는 신천군 사건을 기독교 우파와 좌파간의 사상 대립과 대결이 폭력으로 악화된 끝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평양을 내놓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청년단과 치안대 사람들은 후퇴할 준비를 했다. 그동안 가담 정도가 미미해서 그냥 관찰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나 단순히 여맹이나 직맹이나 민청 정도에 들었던 사람의 가족들과 군인 가족들을 잡아들였다. …원암리 창고의 참사도 저수지와 다리에서의 살육도 모두 십이월 초이레에서 이삼일 동안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243쪽)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손님》에서 재해석한 장면이다.


황석영의 《손님》에서 신천군 사건은 미군의 학살 사건이 아닌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한 동족학살 사건이다. 황석영은 실제 황해도 신천 출신의 유태영 목사(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공동의장, 재미동포전국연합 부의장)의 경험담을 토대로 《손님》을 집필하였다. 유태영 목사는 《손님》의 류요섭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유태영 목사는 말한다.

 "그런데 내가 황석영 씨에게 말했던 것은 제가 직접 겪었던 우리 동네, 부종리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많아야 몇백 명이 죽은 작은 시골동네 이야기이지 3만 5천여 명이 죽은 신천군 전체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당시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 나는 아는 바도 없고 얘기한 일도 없어요. 우리의 화제는 미군의 신천 학살 문제가 아니었고 제가 말한 우리 동네 이야기가 신천군 전체에서 미군의 학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유태영 목사는, "나를 아는 사람이 《손님》을 읽는다면 누구나 주인공 류요섭이 나를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황석영 씨가 그 류요섭의 입을 빌려 신천을 이야기하고 미군 학살을 부정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전했다.


진오기굿

진오기굿(镇恶鬼巫祭), 진혼귀굿, 지노귀굿, 지로귀굿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의 경기지역과 황해도 등지에서 강신무에 의하여 전승되는 사령굿 형태의 무속의례. 사령굿. 지노귀새남·진 오귀굿이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천도(薦度)시키기 위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씻김굿·오구굿 등과 그 기능이 같다.


유래
진오기굿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고 진오기굿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진혼귀(鎭魂鬼)로 보아 죽은 영혼을 달랜다고 보기도 하고, 지노귀(指路鬼)로 보아 혼령이 가는 길을 알려준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의 죽음의례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고려하면 진오기굿의 역사도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만 문헌에서는 전거를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의 공저로 1937년에 간행된 『조선무속의 연구』에서 경성 무녀 배경으로 바리공주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의례로 거행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령(死靈)굿에서 구연되는 서사무가로 전국적으로 전승되며, 일명 ‘바리데기’·‘오구풀이’·‘칠공주’·‘무조전설(巫祖傳說)’이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베풀어지는 ‘지노귀굿’·‘씨끔굿’·‘오구굿’·‘망묵이굿’ 등의 무속 의식에서 구연된다. 바리공주는 약 20여 편이 채록되었는바, 각 편의 내용은 전승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구연자에 따라서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내용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천도(薦度)시키기 위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씻김굿·오구굿 등과 그 기능이 같다.

사람이 죽어 매장한 뒤 곧바로 하는 진 지노귀와 탈상 무렵 또는 몇 년 후에 날을 받아서 행하는 마른 지노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지노귀굿이라는 명칭을 사용해도 서울·경기지역과 황해도의 지노귀굿은 그 절차 및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먼저 서울·경기지역의 마른 지노귀굿의 절차를 보면 일반적인 재수굿에 망인천도 내용이 첨가된다. 즉, 부정(不淨)·청배(請陪)·가망·말명·상산(上山)마누라·별상·영실·대감(大監)·제석(帝釋)·창부(倡夫)·뒷전 등이 먼저 행해지는데, 이는 영실만 제외하고는 재수굿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영실은 무당에게 망인의 넋이 실려 넋두리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보는 굿이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망인을 위한 굿이 다시 시작되는데, 뜬대왕(시왕가망)·중디청배(시왕중디)·아린말명(시왕말명)·사제삼성·말미·도령돌기·뒷영실·다리가르기·지노귀뒷전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저승을 관장하는 열시왕〔十大王〕을 모시고 조상(말명)을 모셔들인 다음, 망인을 저승으로 데려갈 사재〔使者〕를 청한다. 말미는 저승에 가서 약물을 구하여 와 부모를 살린 효녀 바리공주의 일대기를 창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바리공주는 무조신(巫祖神)으로 신앙된다. 도령은 바리공주가 망인을 모시고 저승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모의하는 굿이다. 마지막으로 망인의 넋두리와 가족과의 작별인 뒷 영실을 하고, 무녀가 무명과 베를 몸으로 가르는 것으로 저승으로 가는 길을 갈라준다. 다리가르기는 저승 가는 길을 똑바로 인도해준다는 의미 외에 이승과 저승을 확연히 갈라 이제부터 망자는 이승에 머물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의미도 가진다. 끝에는 지노귀뒷전으로 굿을 마친다.

이상 지노귀굿 특유의 내용을 요약하면 영실·시왕·사재·말미·도령·다리가르기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황해도 지노귀굿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황해도 진지노귀굿은 초부정·수왕제석·사재·넋대내림·맑은혼맞기·시왕가르기·뒷전으로 진행된다. 초부정굿에서는 조상과 망인의 넋을 모셔들인다. 수왕제석은 열시왕을 모시는 굿이고, 사재는 사재삼성과 동일하다.

넋대내림과 맑은혼맞기는 황해도 지노귀굿 특유의 것인데, 가족이나 친지가 대를 잡아 망인의 넋을 받는 것이다. 서울·경기지역의 영실과 비슷하지만 무당이 아닌 일반인에 의하여 넋두리가 행하여진다는 점이 다르다. 넋두리와 한풀이로 깨끗해진 혼을 맞아들인 다음 저승으로 천도하는데, 시왕가르기는 다리가르기와 동일한 의례이다. 그러나 황해도지역에는 바리공주무가가 전승되지 않고 있다.




RDF 및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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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AIN(A) RANGE(B) RELATION 설명
황석영 손님 창작하다 A는 B를 창작했다.
신천군 사건 손님 배경이다 A는 B의 배경이다.
창작과비평사 손님 출간하다 A는 B를 출간했다.
류요섭 손님 등장하다 A는 B에 등장한다.
유태영 류요섭 모델이다 A는 B의 모델이다.
진오기굿 손님 소재이다 A는 B의 소재이다.
손님 대산문학상 수상하다 A로 B를 수상했다.


네트워크 그래프

중앙




참고자료



출처

  1. 교보문고 북로그 리뷰
  2. 황석영. 2001. 손님. 경기:파주
  3. 경향신문-작가가 작가에게
  4. 그림이 읽어주는 인문학 전쟁의 슬픔: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작성자 및 기여자

인문정보콘텐츠(2020) 강의의 일환으로 송지선(1611138)이 2020년 6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