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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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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
 
=='''즉위 후'''==
 
===환국 정치===
 
===환국 정치===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삼복의 옥|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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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진면모는 바로 환국 정치의 창시자로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어지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녕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이 서인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않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 서당숙인 동평군 또 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가 되었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였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였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였고 둘째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원도 서인이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전개된 것.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조선 경종|왕자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서궁 (西宮: 경운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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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년(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사실 현종 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희빈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희빈 장씨 처소인 취선당에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한 것을 이유로,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그녀를 사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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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이때 [[소론]]은 세자 윤에 대한 옹호여론으로, [[노론]]은 비판여론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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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 (조선 문신)|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 (조선 문신)|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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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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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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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30%"|재위 시기||style:"width:70"|사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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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6년(1680년)||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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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5년(1689년)||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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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20년(1694년)||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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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환국 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여파로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충성을 강요하게끔 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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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21]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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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오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근데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 자체는 숙종이 최초로 제기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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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 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 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
  
 
===외교===
 
===외교===

2018년 12월 17일 (월) 23:53 판


요약

조선의 제19대 왕. 현종(顯宗)과 명성황후(明聖王后) 외아들로, 휘는 이순(李焞)이고, 자는 명보(明普)이며, 아명은 용상(龍祥)이다.

숙종은 1661년 10월 7일에 경덕궁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74년 만 12세의 나이로 창덕궁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그 당시 가장 긴 기간의 재위 46년 되던 해 1720년 7월 12일 경덕궁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비는 인경황후(仁敬王后), 계비는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 계비는 인원왕후(仁元王后)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생애

즉위 전

1699년(숙종 25)연잉군(延礽君)에

즉위 후

환국 정치

숙종의 진면모는 바로 환국 정치의 창시자로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어지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녕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이 서인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않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 서당숙인 동평군 또 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가 되었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였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였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였고 둘째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원도 서인이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전개된 것.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재위 1년(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사실 현종 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재위 시기 사건 내용
재위 1년(1675년) 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이러한 환국 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여파로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충성을 강요하게끔 한다.[20]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21]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오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근데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 자체는 숙종이 최초로 제기한 것.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 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 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 

외교

붕당정치와 왕권 강화

통상정책

장희빈 사사 전후

이이명과 독대

사후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관련 영상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