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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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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붕당을 누르기 위해 [[환국]]을 자주 했다. 전대 왕들은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를 바꿨다. 이로 인해 [[남인]]과 [[서인]]이 자주 돌아가며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야당이 소리를 내면서 여당과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 [[숙종]] 1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의 정국을 [[남인]]이 차지했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환국]]이 일어났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이 [[남인]] [[허적]] 조부의 시호를 맞이한 잔치에 유악을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고, 그리하여 [[남인]]의 군권이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서인]]은 [[남인]]을 탄압하고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를 무너트리며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 이번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권력을 잡았다. [[숙종]]의 계비 [[인현 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고 [[남인]]은 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고 [[인현 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씨([[인현 왕후]]) 복위 운동을 [[남인]]은 반대했고 화를 입었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의 행동이 방자해지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거듭되어 [[숙종]]의 마음은 [[인현 왕후]]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인]]의 [[폐비 복위 운동]]을 [[숙정]]이 지지하여 [[남인]]을 제거했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인현 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결국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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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붕당을 누르기 위해 [[환국]]을 자주 했다. 전대 왕들은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를 바꿨다. 이로 인해 [[남인]]과 [[서인]]이 자주 돌아가며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야당이 소리를 내면서 여당과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 [[숙종]] 1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의 정국을 [[남인]]이 차지했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환국]]이 일어났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이 [[남인]] [[허적]] 조부의 시호를 맞이한 잔치에 유악을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고, 그리하여 [[남인]]의 군권이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서인]]은 [[남인]]을 탄압하고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를 무너트리며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 이번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권력을 잡았다. [[숙종]]의 계비 [[인현 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고 [[남인]]은 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고 [[인현 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복위 운동|폐비 민씨(인현 왕후) 복위 운동]][[남인]]은 반대했고 화를 입었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의 행동이 방자해지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거듭되어 [[숙종]]의 마음은 [[인현 왕후]]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인]]의 [[폐비 복위 운동]]을 [[숙정]]이 지지하여 [[남인]]을 제거했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인현 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결국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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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8일 (화) 03:05 판


요약

조선의 제19대 왕. 현종(顯宗)과 명성황후(明聖王后) 외아들로, 휘는 이순(李焞)이고, 자는 명보(明普)이며, 아명은 용상(龍祥)이다.

숙종은 1661년 10월 7일에 경덕궁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74년 만 12세의 나이로 창덕궁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그 당시 가장 긴 기간의 재위 46년 되던 해 1720년 7월 12일 경덕궁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비는 인경황후(仁敬王后), 계비는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 계비는 인원왕후(仁元王后)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생애

즉위 후

환국 정치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붕당을 누르기 위해 환국을 자주 했다. 전대 왕들은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를 바꿨다. 이로 인해 남인서인이 자주 돌아가며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야당이 소리를 내면서 여당과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 숙종 1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의 정국을 남인이 차지했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환국이 일어났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남인 허적 조부의 시호를 맞이한 잔치에 유악을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고, 그리하여 남인의 군권이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서인남인을 탄압하고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를 무너트리며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 이번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권력을 잡았다. 숙종의 계비 인현 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숙종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고 남인은 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고 인현 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씨(인현 왕후) 복위 운동남인은 반대했고 화를 입었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의 행동이 방자해지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거듭되어 숙종의 마음은 인현 왕후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인폐비 복위 운동숙정이 지지하여 남인을 제거했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인현 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결국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재위 시기 정권 주요 사건 사건 내용
재위 1년 (1675년) 남인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재위 6년 (1680년) 서인 경신환국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윤휴를 비롯한 남인은 실각했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재위 15년 (1689년) 남인 기사환국 장희빈의 아들(경종)에 대한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재위 20년 (1694년) 서인 갑술환국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상훈과 추모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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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관련 영상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