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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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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즉위 전'''==
 
1699년(숙종 25)연잉군(延礽君)에
 
 
 
=='''즉위 후'''==
 
=='''즉위 후'''==
 
===환국 정치===
 
===환국 정치===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삼복의 옥|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조선 경종|왕자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서궁 (西宮: 경운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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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붕당을 누르기 위해 [[환국]]을 자주 했다. 전대 왕들은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를 바꿨다. 이로 인해 [[남인]]과 [[서인]]이 자주 돌아가며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야당이 소리를 내면서 여당과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 [[숙종]] 1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의 정국을 [[남인]]이 차지했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환국]]이 일어났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이 [[남인]] [[허적]] 조부의 시호를 맞이한 잔치에 유악을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고, 그리하여 [[남인]]의 군권이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서인]]은 [[남인]]을 탄압하고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무너트리며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 이번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권력을 잡았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고 [[남인]]은 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고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복위 운동|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남인]]은 반대했고 화를 입었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의 행동이 방자해지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거듭되어 [[숙종]]의 마음은 [[인현 왕후]]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인]]의 [[폐비 복위 운동]]을 [[숙정]]이 지지하여 [[남인]]을 제거했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결국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희빈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희빈 장씨 처소인 취선당에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한 것을 이유로,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그녀를 사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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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5%"|재위 시기||style:"width:10"|정권||style:"width:55"|주요 사건||style:"width:55"|사건 내용
이때 [[소론]]은 세자 윤에 대한 옹호여론으로, [[노론]]은 비판여론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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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년 (1675년)||남인||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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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6년 (1680년)||서인||[[경신환국]]||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윤휴를 비롯한 남인은 실각했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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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5년 (1689년)||남인||[[기사환국]]||장희빈의 아들(경종)에 대한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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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20년 (1694년)||서인||[[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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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 (조선 문신)|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 (조선 문신)|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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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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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숙종어필 칠언시.jpg|400px|'숙종어필 칠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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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어필 칠언시'(肅宗御筆七言詩)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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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이경석]](李景奭)문집인 『[[백헌집]]』은 1700년([[숙종]] 26) 간행되었다. [[숙종]]이 『[[백헌집]]』을 본 후의 느낌을 숙종어필 칠언시로 지었다. 칠언시의 내용은 “어렵게 입수한 문집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종일토록 보았다. [[이경석]]의 충성심을 칭송하고 선대왕들도 [[이경석]]을 총애하여 예우하였으며 송나라의 명재상 [[문정공]]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라고 표현하였다. 2010년 1월 4일 보물 제1630호로 지정되었으며, 소장자는 [[이경석]]의 후손이고,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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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숙종 어필오언구.jpg|400px|숙종 '어필오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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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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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충절에 감동하여 오언시의 어필을 남겼다. 어필오언구는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한 [[채미정]] 경모각에 야은 초상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 경상북도 구미에 창건되었다.
===붕당정치와 왕권 강화===
 
===통상정책===
 
===장희빈 사사 전후===
 
===이이명과 독대===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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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과 추모'''=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br/>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br/>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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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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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숙종(조선) (2018년 12월 17일) https://namu.wiki/w/%EC%88%99%EC%A2%85(%EC%A1%B0%EC%84%A0)
 
*나무위키 숙종(조선) (2018년 12월 17일) https://namu.wiki/w/%EC%88%99%EC%A2%85(%EC%A1%B0%EC%84%A0)
 
*네이버 지식백과 숙종 (2018년 12월 17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309&cid=59015&categoryId=59015
 
*네이버 지식백과 숙종 (2018년 12월 17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309&cid=59015&categoryId=59015
*유투브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vkEoAxb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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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숙종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21i7Uq9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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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GgqrC4e4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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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8일 (화) 15:28 기준 최신판


요약

조선의 제19대 왕. 현종(顯宗)과 명성황후(明聖王后) 외아들로, 휘는 이순(李焞)이고, 자는 명보(明普)이며, 아명은 용상(龍祥)이다.

숙종은 1661년 10월 7일에 경덕궁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74년 만 12세의 나이로 창덕궁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그 당시 가장 긴 기간의 재위 46년 되던 해 1720년 7월 12일 경덕궁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비는 인경황후(仁敬王后), 계비는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 계비는 인원왕후(仁元王后)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생애

즉위 후

환국 정치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붕당을 누르기 위해 환국을 자주 했다. 전대 왕들은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를 바꿨다. 이로 인해 남인서인이 자주 돌아가며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야당이 소리를 내면서 여당과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황이 되었다. 1675년 숙종 1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의 정국을 남인이 차지했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환국이 일어났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남인 허적 조부의 시호를 맞이한 잔치에 유악을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고, 그리하여 남인의 군권이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서인남인을 탄압하고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를 무너트리며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 이번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권력을 잡았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숙종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고 남인은 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다.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고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남인은 반대했고 화를 입었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의 행동이 방자해지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거듭되어 숙종의 마음은 인현 왕후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인폐비 복위 운동숙정이 지지하여 남인을 제거했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결국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재위 시기 정권 주요 사건 사건 내용
재위 1년 (1675년) 남인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재위 6년 (1680년) 서인 경신환국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윤휴를 비롯한 남인은 실각했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재위 15년 (1689년) 남인 기사환국 장희빈의 아들(경종)에 대한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재위 20년 (1694년) 서인 갑술환국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숙종의 어필

'숙종어필 칠언시' '숙종어필 칠언시'(肅宗御筆七言詩)

숙종이경석(李景奭)의 문집인 『백헌집』은 1700년(숙종 26) 간행되었다. 숙종이 『백헌집』을 본 후의 느낌을 숙종어필 칠언시로 지었다. 칠언시의 내용은 “어렵게 입수한 문집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종일토록 보았다. 이경석의 충성심을 칭송하고 선대왕들도 이경석을 총애하여 예우하였으며 송나라의 명재상 문정공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라고 표현하였다. 2010년 1월 4일 보물 제1630호로 지정되었으며, 소장자는 이경석의 후손이고,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숙종 '어필오언구' 숙종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

숙종이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충절에 감동하여 오언시의 어필을 남겼다. 어필오언구는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한 채미정 경모각에 야은 초상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채미정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 경상북도 구미에 창건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관련 영상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