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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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17일 (월) 23:55 판 (즉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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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의 제19대 왕. 현종(顯宗)과 명성황후(明聖王后) 외아들로, 휘는 이순(李焞)이고, 자는 명보(明普)이며, 아명은 용상(龍祥)이다.

숙종은 1661년 10월 7일에 경덕궁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74년 만 12세의 나이로 창덕궁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그 당시 가장 긴 기간의 재위 46년 되던 해 1720년 7월 12일 경덕궁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비는 인경황후(仁敬王后), 계비는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 계비는 인원왕후(仁元王后)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생애

즉위 전

1699년(숙종 25)연잉군(延礽君)에

즉위 후

환국 정치

숙종의 진면모는 바로 환국 정치의 창시자로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어지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녕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이 서인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않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 서당숙인 동평군 또 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가 되었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였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였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였고 둘째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원도 서인이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전개된 것.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재위 1년(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사실 현종 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재위 시기 사건 내용
재위 1년(1675년) 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재위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이러한 환국 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여파로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충성을 강요하게끔 한다.[20]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21]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오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근데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 자체는 숙종이 최초로 제기한 것.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 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 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 

사후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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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관련 영상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