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박한 섬사람 박창용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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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박창용(1967~,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여자리 출생, 장남이며 위로는 누나 한명 아래로는 남동생, 여동생이 한 명씩 있다.)

거주지

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동

지도를 불러오는 중...

가족관계

  • 본인
  • 아내 이향숙
  • 장남 박대일
  • 차남 박대현

콘텐츠 목적

집의 가장인 아버지의 생애를 아들 박대현의 시점에서 정리하여 만약 가족에게 고난이 생길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 가족간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목적으로 제작

28세까지의 삶

아버지의 학창시절

세번째 사진이 할아버지 댁




아버지는 전남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에 있는 달천마을에서 배를 타고 꼬박 30분을 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송여자도에서 자랐다. 당시 송여자도 인구는 40명가량이였으며 아버지의 가족은 위로 누나 한 명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 명씩 있다. 할아버지는 조업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5~7월엔 주로 낚지를 잡았고, 8~10월엔 전어를 잡았다. 지금도 설날이나 추석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면 낚지 와 전어뿐만 아니라 게, 새우등 많은 해산물을 먹어 볼 수 있다. 




물에빠진아이


아버지는 섬에 있는 율촌면 소라초등학교 신원분교에 다녔는데, 인구가 40명가량밖에 없는 만큼 학교 규모도 적어 학생 수가 17명에 불과했고, 그중 동년배는 3명이었다. 자연스럽게 동년배는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되었고,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년배들과 배를 타고 나가다가 빠져 죽을뻔한 것이다. 아버지는 어른들이 구해줘 겨우 살아났는데, 섬 동네라 그런지 사람이 빠지는 사고가 간간이 일어난다. 10년 전 2010년 즈음 설날에 송여자도에 갔을 때도 어린아이 한 명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손주를 잃고 망연자실한 할머니의 표정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정말 끔찍했다. 



율촌중학교
섬에는 중학교는 존재하지 않기에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부터 육지로 나와 율천면의 이모집에서 율천중학교를 다녔다. 이때 사귄 친구들이 현재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들이며 지금도 년에 2번정도 만난다. 고등학교는 순천에 시집간 누나 집에서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직장생활을 했다.


졸업 후의 삶

아버지와 어머니의 캐리커쳐



아버지의 첫일은 친척이 운영하는 가죽공장에서 가죽을 정제하는 작업이었다. 가죽공장을 다니면서 친구의 소개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1993년에 결혼해 그 해와 이듬해 아들 한 명씩을 낳았다. 결혼 후 가죽공장에서 8년 동안 모은 자금으로 서울에 유리가게 사업을 열었다.







고난의 시작

첫번째 고난

당시 신문기사


 사업 초기에는 사업에 순풍이 불어 할아버지 시골집도 새로 지어줄만큼 수입이 좋았는데, IMF로 인해 물품을 납품한 기업들이 부도를 맞아 아버지의 유리가게도 물품 대금을 받지 못해 연쇄 부도를 당했다. 이 일이 아버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28세에 가진 모든 재산을 잃고 한 살, 두 살배기 갓난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했다. 이때의 경험이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오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이후 건설업 등 여러 가지 일을 거치다가 현재는 용인에 있는 애경 물류센터에 다니고 있다.






두번째 고난


스티븐 호킹


IMF로 유리공장이 망한 것이 아버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힘들었던 일이라면, 첫 번째는 할아버지가 루게릭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할아버지는 70세의 나이에도 조업을 하며, 평소에 술과 담배를 많이 한다는 것 빼고는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 광주MBC에서 송여자도 취재를 왔을 때 방송 출연을 할 정도로 건강하셨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셨고, 병에 걸린지 1년 만에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아이스버킷 챌린지



지금은 아이스버킷 챌린지 등 루게릭병과 관련 있는 여러 기부행사 때문에 이름이 많이 알려진 상태지만 2011년도에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병이였다. 원래는 루게릭병인지도 모를뻔했는데 할아버지가 우연히 방송에서 루게릭병 환자 증상을 본 후 자신과 너무 똑같다고 생각하여 병원에서 루게릭 검사를 받고 난 후에 겨우 알게 되었다.
급성 루게릭병





할아버지는 급성 루게릭병으로 일년만에 상황이 매우 악화 되었고, 할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가 지어준 집 방에서 넘어져 돌아가셨다. 방바닥에 넘어졌는데, 근육이 마비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천천히 숨이 막혀 죽었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는 많이 슬퍼했다.



용인에서의 삶

전원주택

힘든 일도 다 지나가고 용인에 기반을 단단히 잡았을 무렵 우리 가족은 용인 시내 위쪽에 땅을 사 집을 짓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어머니가 전원주택에 대해 로망이 커서 결국 아버지가 뜻을 굽혔다. 아버지는 예전에 할아버지 집을 지어주고 건설업에 몸담은 적도 있는 만큼 집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 나는 업체 선정, 자재 구매 등의 역할을 하고, 아버지는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짚어주며, 평소에 발이 넓은 것을 활용하여 인맥을 동원해 집 짓는 것을 도왔다. 집은 6개월 만에 완성이 되었는데, 이렇게 가족들이 힘을 합쳐 집을 지으니 더욱 보람찼고,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도 정원을 가꾸며 내심 뿌듯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술

아버지의 용인에서의 삶은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일주일에 2번 정도 야근을 한다. 토요일에는 일이 오전 중에 끝나 어김없이 친구들과 술을 즐기러 간다. 할아버지도 일을 안 할 때는 항상 육지로 나가 지인들과 술상을 즐겼다는데, 이런 부분을 많이 닮은 것 같다. 심지어 구술채록을 하기 위해 인터뷰를 부탁한 날에도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진행하지 못했고, 두 번째 인터뷰는 술을 마셨지만, 다행히 조금 마셔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끔식 술을 절제하지 못 하는 것이 아버지의 흠이지만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고, 인간관계에 있어 배울 점도 많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 술을 먹고 왔을 때는 약간 화가 나기도 했지만, 역시 미워할 수 없는 우리집안의 가장이다.


관련자료

박창용 구술채록 계획, 질문지, 녹취문, 인터뷰, 면담일지, 구술자료 공개허가서, 관련사진, 콘텐츠 한글파일
구글 드라이브 박대현 링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