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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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2311031)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5월 17일 (수) 18: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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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타 복구했다. 화재 이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숭례문복구공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공사는 약 3년의 기간을 거친뒤 2013년 5월 4일 복구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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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편


  • 4호선 회현역 5번출구 도보 7분
  • 1호선 서울역 4번출구 도보 10분
  • 2호선 시청역 8번출구 도보 10분
  • 경의중앙선 서울역 2번 출구 도보 11분
  • 1호선 시청역 7번출구 도보 12분

버스 편


  • 숭례문 남산 방향

간선버스 402,405
도보 2분

  • 남대문시장 악세사리 전문상가

간선버스 402,405
순환버스 05
도보 3분

  • 프레이저 플레이스 남대문

공항버스 6005
도보 3분

  • 숭례문

직행버스: 1150, 5000A, 5000B, 5005, 5007, 5500-1, 5500-2, 7900, 9000, 9000-1, 9003, 9007, 9300, 9301
급행버스: 8100
광역버스: 9401, M4101, M4102
도보 4분

  • 신한은행 본점

일반버스: 790, 799
직행버스: 1000, 1100, 1200, 1900, 2000, 4108, 5000A, 5000B, 5005, 5500-1, 5500-2, 7900, 8800, 9000, 9000-1, 9007, 9710, 9710-1, G7111
광역버스:9401, 9703, 9709, 9714, M4108, M4130, M4137, M5107, M5115, M5121, M7106, M7111, M7119, M7129
도보 4분


  • 북창동. 남대문 시장

직행버스: 1150, 5007, 9003, 9300, 9301
급행버스: 8100
광역버스: M4101, M4102
도보 4분

이용안내

  • 전화번호: 042-481-4650
  • 휴무일: 매주 월요일
  • 관람시간: 09:00 ~ 18:00
    • 동절기 : 09:00~17:30 (11월-1월)
    • 하절기 : 09:00~ 18:30 (6월-8월)
  • 이용요금 : 무료

역사

서울 숭례문은 1396년(태조 5)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태조 7) 2월에 준공되었다.
그 뒤 1448년(세종 29) 개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98년(태조 7년) : 숭례문 완성
1447년 : 숭례문 신축 착공
1448년 : 숭례문 신축 완공
1478년 (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짐. 수리를 미룸
1479년 : 숭례문 중수 완공


1907년 :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림. 성관글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음.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 설치. 일반인들의 출입 금지.
1908년 :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이 훼철됨.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 초록을 간행.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음.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숭례문을 국보 제 1호로 재지정.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2003년 : 일제가 1907년 헐어버린 성곽을 숭례문 좌우 10m씩 복원.
2005년 :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2006년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 가능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석축과 1층 일부 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버림.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2013년 5월 4일 : 숭례문 공식 개방

전통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한국 성문 건물로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다.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숭례문 방화사건

숭례문 방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는 숭례문 2층 누각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소방차 32대와 소방관 128명이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전개하였으나 자정을 넘긴 오전 0시 25분경에 2층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고, 12시 58분경 2층이 붕괴한 뒤 1층까지 옮겨붙어 오전 1시 54분에는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축(石築) 부분만 남긴 채 전소하고 말았다.

방화 계기

방화범은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던 채종기로, 자신이 소유한 토지가 신축 아파트 건축부지로 수용되면서 토지보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범행을 벌였다. 2008년 4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선고된 뒤 그해 10월 9일 대법원에서 10년형이 확정되었다.

숭례문 복원

복원 방식

숭례문 화재 피해부재에 대한 피해상태 조사 연구가 추진되며 문화재 실측 전문가와 건축역사 분야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다. 연구를 통하여 화재 피해 부재를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리고, 피해 정도에 따라 4등급으로 구분하여 재사용이 가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부재를 구분하였고, 실측 결과를 도면으로 그려 넣어 주요 기둥과 대들보 등이 어떠한 상태로 화재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구축되었다.

한편 숭례문을 구성하고 있던 목재, 기와, 철물 등에 대한 긴급 보존처리가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기와는 1998년의 기와 교체 공사를 통해 현대 기와로 교체되기는 하였으나, 막새기와와 치미, 잡상 등 전통기와가 남아 있었기에, 파손된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 복구하였다. 또한 긴급한 보존처리를 필요로 하는 철물과 목재에 대한 보존처리가 함께 진행되었다.

2009년에는 단청 문양과 철물 제작 방안, 방재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단청 문양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연구에 참여한 단청장 홍창원은 조선 후기부터 화재 전까지 숭례문의 변화된 단청 문양 등을 고증하여 내었으며, 남은 부재와 지붕 속에서 발견된 옛 부재의 문양 등을 하나하나 확인하여, 복구 단청의 기본 문양을 제안하였다. 보존과학 전문가와 철물 제작 전문가가 참여한 철물 관련 연구에서는 문헌에 기록된 전통적인 제철 방식이 실제로도 적용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철물을 제작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방재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숭례문과 같은 특징을 가진 중층 목구조물의 화재 등의 재난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재 시스템을 도출하였다.

복원 재료

단청 안료와 교착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조선시대 문헌 분석 결과 뇌록(磊綠, 진한 녹색), 번주홍(燔朱紅, 진한 주홍), 주토(朱土, 또는 석간주, 적갈색), 정분(丁紛, 흰색)의 안료를 제외한 나머지 원색의 단청 안료는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되었음이 확인되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네팔, 부탄 등 국외 사례에 대한 조사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제작된 안료가 호분(胡粉, 조갯 가루)를 주 재료로 사용하는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거쳤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천연 원석을 수입하여 천연 안료를 생산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국내 안료 산지와 생산 업체에 대한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뇌록의 경우 산지는 확인하였으나, 현재 채굴이 불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안료를 정제하는 수비(水飛, 앙금짓기) 기법의 맥이 끊겨 안료 생산이 불가능하였다. 한편 국내 업체에 대한 조사를 거쳐 전남 담양에 위치한 석간주 생산 업체를 방문하여, 샘플을 확보하였다. 이들 단청 안료에 대해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분석 장비를 이용하여, 탈락과 변색 등에 대한 종합 분석을 실시하였다. 아교 연구팀은 단청에 사용될 아교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였는데, 재현에는 성공하였으나 단청에 사용될 수 있는 품질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결국 국산 안료는 석간주와 호분이 사용되었고, 나머지 색채와 아교는 품질이 우수하다고 판단된 일본산 안료를 사용하였다.

특징

현판

숭례문현판.jpg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손상되기 이전의 숭례문 현판. 
소나무로 만들었으며 검은색 흑칠을 한 바닥판에 양각으로 글씨를 돋을새김한 뒤 백분을 칠했다. 
조선시대 궁궐과 도성의 현판은 대부분 가로글씨이나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씌어있다. 
현판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에 대한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조선 초기 현판 글씨의 모범을 보여준다.

파수의식

  • 파수란 ?

도성을 수비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중요한 군례의식의 하나.
조선시대 도성을 수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을 겪으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파수의식은 도성 문을 열고 닫는 개폐의식과 순라의식등을 연결하는 조선시대 군례의식으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 숭례문 파수의식 행사 일정

일시: 연중상설 (매주 월요일 휴무 )
장소: 숭례문 광장 앞
시간
파수의식 : 10:00 ~ 12:00/13:00 ~ 15:40
수문군 교대 및 순라의식 : 11:40 ~ 11:46

  • 파수의식 관련영상

관련 영상

  • 다시보는 숭례문 600년 역사

  • 숭례문, 다시 서다

  • 숭례문 무너지던 날

  • 숭례문 복원, 질 좋은 국산 놓고 일본산 재료 썼다

  • 숭례문 복원을 가능하게 한 3D 스캔 기술

관련 사진

출처

http://korean.visitseoul.net/attractions/Sungnyemun_/22888 서울시 공식 관광정보 웹사이트 - 숭례문(남대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 숭례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010000,1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1278&cid=40942&categoryId=33383 두산백과 - 서울 숭례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16333&cid=40942&categoryId=31778 네이버 지식백과 - 숭례문방화사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6430&cid=58838&categoryId=58841 네이버 지식백과 - 숭례문 복구를 위한 노력

기여자

이지희

편집자

김정원 [2004년 출생], [파주 출생], [디지털인문트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