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애사와 성북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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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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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사춘시 시절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가족들은 고양시로 이주했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과 학업을 위해 친지 댁을 전전하면서 성북구를 지켰다. 장남의 무게감을 버티기 위해 노력했으나 돈암동, 성북동, 삼선동을 전전하며 자연스레 학창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하였고 졸업 후 취업보다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과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운 좋게 지금까지 회사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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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질풍노도의 시절 누비고 다녔던 성북구 일대의 과거 모습을 추억해 본다.
  
1961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사춘시 시절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가족들은 고양시로 이주했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과 학업을 위해 친지 댁을 전전하면서 성북구를 지켰다. 장남의 무게감을 버티기 위해 노력했으나 돈암동, 성북동, 삼선동을 전전하며 자연스레 학창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하였고 졸업 후 취업보다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과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운 좋게 지금까지 회사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지내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절 누비고 다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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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교 복개천==
 
==삼선교 복개천==

2020년 6월 22일 (월) 20:11 판



생애사


1961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사춘시 시절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가족들은 고양시로 이주했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과 학업을 위해 친지 댁을 전전하면서 성북구를 지켰다. 장남의 무게감을 버티기 위해 노력했으나 돈암동, 성북동, 삼선동을 전전하며 자연스레 학창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하였고 졸업 후 취업보다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과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운 좋게 지금까지 회사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지내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절 누비고 다녔던 성북구 일대의 과거 모습을 추억해 본다.



삼선교 복개천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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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제과점

독립운동

  • 3.1 만세운동과 투옥
  • 신간회 창설
  • 반일 강연 활동


시 등 저서활동

  • 『조선불교유신론』
  • 『님의 침묵』


서울시 전차

한용운 한국 위키피디아 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작성자 및 출처

  • 작성자 :이강현
  • 출처 : 우리 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