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애사와 성북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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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2일 (월) 22:16 판



생애사


1961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유복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사춘시 시절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가족들은 고양시로 이주했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과 학업을 위해 친지 댁을 전전하면서 성북구를 지켰다. 장남의 무게감을 버티기 위해 노력했으나 돈암동, 성북동, 삼선동을 전전하며 자연스레 학창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했고 졸업 후 취업보다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과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운 좋게 지금까지 회사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지내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절 누비고 다녔던 성북구 일대의 과거 모습을 추억해 본다.


삼선교 복개천


"지금 이제 다 복개를 해서 음,, 복개천 흐르는 그,, 복개천에는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많지는 않았던 맨션 아파트가,, 5층짜리? 뭐 이런 맨션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던 기억도 있는데,," - 녹취문


복개천: 자연적으로 흐르는 하천을 매립 혹은 지상 인프라를 이용해 숨긴 것으로 주로 도시화과정에서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사이에 대부분의 하천이 복개되었다.

하천을 복개하는 이유는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도로 부지에 있는 건물과 각종 시설들을 매입하고 철거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런데 하천은 그냥 덮기만 하면 도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든다. 또 하천은 자연적으로 동네 구획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도로 자리로 딱이다. 적은 비용으로 적절한 위치에 도로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복개된 것. 하천을 복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수도로 쓰기 위해서이다. 상하수도 설치와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1970년대 이전에는 생활하수를 동네 개천에 그냥 버리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모든 도심 속 하천에선 악취가 진동했고, 모기와 쥐 등 각종 유해동물들이 창궐했다. 거기다 홍수라도 한 번 나면 온 동네에 똥물이 넘쳐흘렀다. 하천이 공원처럼 쓰이는 지금과 달리 그 때의 하천은 혐오시설이었던 것.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복개해서 악취나 범람만이라도 막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 삼선교 복개 전 모습

복개전.jpg
복개전2.png 복개 전 삼선교 위에 상가형 아파트가 있는 모습.
출처: 나무위키

  • 복개 공사 중인 모습

복개천.jpg
파일:공사중1.jpg
파일:공사중2.jpg




  • 성북구 삼선교 복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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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제과점

독립운동

  • 3.1 만세운동과 투옥
  • 신간회 창설
  • 반일 강연 활동


시 등 저서활동

  • 『조선불교유신론』
  • 『님의 침묵』


서울시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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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출처

  • 작성자 :이강현
  • 출처 : 우리 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