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애사와 성북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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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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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2일 (월) 20:44 판



생애사


1961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유복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사춘시 시절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가족들은 고양시로 이주했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과 학업을 위해 친지 댁을 전전하면서 성북구를 지켰다. 장남의 무게감을 버티기 위해 노력했으나 돈암동, 성북동, 삼선동을 전전하며 자연스레 학창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했고 졸업 후 취업보다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과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운 좋게 지금까지 회사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지내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절 누비고 다녔던 성북구 일대의 과거 모습을 추억해 본다.


삼선교 복개천

"지금 이제 다 복개를 해서 음,, 복개천 흐르는 그,, 복개천에는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많지는 않았던 맨션 아파트가,, 5층짜리? 뭐 이런 맨션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던 기억도 있는데,," - 녹취문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나폴레옹 제과점

독립운동

  • 3.1 만세운동과 투옥
  • 신간회 창설
  • 반일 강연 활동


시 등 저서활동

  • 『조선불교유신론』
  • 『님의 침묵』


서울시 전차

한용운 한국 위키피디아 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작성자 및 출처

  • 작성자 :이강현
  • 출처 : 우리 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