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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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6일 (일) 21:53 판


소개

개요

상세 내용

오죽헌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강원 강릉시 율곡로 3139번 길 24 (죽헌동)에 위치해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주거건축물 중 오래된 편에 속한다. 이곳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시대 여류 문인이자 화가, 서예가였던 신사임당과 정치와 학문에 큰 업적을 남긴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있으며, 이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본래 최응현의 집이었던 오죽헌은 조선전기의 결혼 제도였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그의 둘째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상속되었다. 이사온과 함께 살던 사위 신명화에게는 다섯 명의 딸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딸이 신사임당이다. 한편 용인 이씨는 이사온과 최 씨 사이의 무남독녀였다. 이사온은 신사임당의 어머니이자 신명화의 부인 용인 이씨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 용인 이씨는 외손자들 중 넷째 딸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와 둘째 딸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율곡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맡는 조건으로 서울의 기와집 한 채와 전답(田畓)을,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살피는 조건으로 이 집과 전답을 주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이 집 주변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무성해서 본인의 호(號)를 오죽헌(烏竹軒)이라고 지었는데, 이것이 후에 집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오죽헌은 권처균의 자손들이 관리해오다가 1975년부터 강릉시가 관리하게 되었고, 당해 오죽헌 정화사업 때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현재 오죽헌 일대의 모습은 1996년에 정부가 시행한 문화재 복원 계획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결과다.

오죽헌 소유권 변천사 (좌측부터)
최응현 이사온 용인 이씨 권서균 안동 권(權)씨 자손 강릉시

정면 3칸으로 지어진 오죽헌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 2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측 두 칸을 차지하는 마루방은 율곡 이이가 6세까지 생활하고 공부하던 곳이다. 우측의 온돌방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임신했을 때 동해에 사는 용이 집으로 들어와 방문 앞에 서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 점을 따 온돌방의 이름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지었다. 현재 몽룡실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연혁

시기 @@
조선 초기 최응현 소유
1504년 신사임당 출생
1536년 율곡 이이 출생
1788년 어제각 건립
1963년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
1975년 6월 30일 권(權)씨가로부터 관리 이전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사업
1987년 어제각 복원
1996년 문화재 복원 계획 시행

위치

강원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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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화재

  • 천연기념물 제484호 율곡매 (栗谷梅)

율곡매.jpg

 오죽헌이 건립된 시기인 1400년경에 심겨져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도 직접 가꾸었다고 하는 매화나무다.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율곡유품(벼루,토지양여서) (栗谷遺品(벼루,土地讓與書))

벼루.jpg 토지양여서.jpg

 율곡 이이가 실제로 사용하던 벼루와 토지양여서다.
 벼루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1788년 정조가 율곡 이이의 유품을 실제로 보고 작성한 글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이후 정조는 율곡 이이의 유품을 어제각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토지양여서는 1597년 율곡 이이가 친필로 작성했으며, 그의 소유 토지를 권처균에게 양여한다는 증서다.

관련 영상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