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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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호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2일 (월) 19: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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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년시절

1968년 우리 어머니 임효심 여사는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에서 1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 당시에 의료상황이 안 좋았던 것일까? 특이하게도 어머니는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자택에서 산파가 도와줘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형제들과 사이좋게 자랐다고 한다. 7남매 중 둘째라 동생들을 많이 돌봐 줬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5년 어머니는 국민학교 현재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6년 동안 공부도 제법 잘하며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그에 대한 증거로 3학년 때는 도서부장 4학년 때는 음악부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5학년 6학년 때 반장 또한 했다. 중학교는 함평여자 중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까지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녔다. 고등학교는 함평여자중학교 인근 함평 여자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자택과 멀어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엄마의 청년시절

1987년 목포에 있는 목포대학교 원예학과를 입학했다. 재학 중에 1988년 학교 동아리에서 운명적인 사랑인 아빠를 처음 만났다. 둘은 사랑했고 연애를 했다. 그러던 중 1990년 재학 중에 전라남도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쳐 합격했다. 졸업 후에 1990년경에 임용되었다. 공무원으로 1년 반 정도 재직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대검찰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전업 주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에 1994년 우리 형과 1996년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는 육아에 전념했다. 육아도 하며 운전면허 시험공부도 하고. 결국, 노력의 산물로 2000년도에 어머니는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따게 된다. 운전면허가 그리 대단한 시험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삶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돌보면서 갑상선 항진증을 앓게 되어 몸이 많이 쇠약해 졌다. 하지만 이런 힘들었던 상황인데 도와주는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혼자서 오로지 육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그때 많이 힘이 들었다. 그 당시 저와 형은 신생아와 두 세 살 먹은 아이였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몸이 체력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다. 나와 형이 아프고 아플 때 밤새 보채고 잠을 안 자고 열이 나고 그럴 때는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자식이니깐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어머니로서 뿌듯한 점은 2001년도쯤에 시장을 보러 가는 길에 어머니가 시장을 보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제가 그때 왜 그러세요. 아저씨하고 했을 때 내 편을 들어주는 자식이 있구나! 그렇게 어려도 내 편을 들어주는 자식이 있어서 아주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에 지금까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육아에 소홀했던 것에 대해 아직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경력 단절 여성의 직업 변천과 도전기

일을 그만둔 어머니는 무료했던 것일까? 어머니는 육아도 하며 직업을 갖기 위해 공인중개사 시험도 공부했다. 2002년도에는 공부하던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게 되어 그 해부터 구로구 개봉동에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취직하게 된다. 일은 재미있었고 적성에 맞았지만 당시에 형과 내가 나이가 어려 혼자 두기 무서웠던 어머니는 2005년경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그만두게 된다. 퇴사 이후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 틈틈이 주택관리사 시험을 공부해 주택관리사에 합격한다. 그 이후 주택관리 관련된 직업을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경력도 없고 자격증만 겨우 있는 기혼 여성을 써주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도 전업주부로 삶을 이어가다가 형과 내가 사리분별 정도는 할 때쯤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또 공인중개사로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부동산 경기불황의 여파로 인해 공인중개사의 삶은 짧게 끝나게 된다. 그 이후 2013년 어머니는 집 근처에서 부품품질검수 일을 시작하게 된다. 일은 재미없었지만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아 직장 생활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직업을 다른 직업들과 달리 꽤 오래 이어 나갔다. 하지만 경기불황여파로 고용주의 자금 사정으로 인해 어머니는 결국 2019년 부품품질검수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어머니는 또 잠깐의 공백기를 가지며 전업주부의 삶을 이어 간다. 이후 형이 집에서 분가하고 내가 말레이시아로 교환학생을 떠나고 공허함을 느꼈던 어머니는 또 직장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싶어 했다. 하지만 50대 기혼여성의 일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 나라에서는 이런 경력단절여성들을 위한 국비지원 교육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취업을 하기 위해 국비지원을 받으며 2019년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엑셀, 파워포인트, 아래아 한글 그리고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어머니는 다시 취업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력서를 내는 족족 어머니는 떨어졌다. 어머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이력서를 지원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 홍보를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영등포 당산동에 있는 아파트의 경리로 들어가게 되고 지금 현재까지도 근무하고 있다. 향후에 어머니는 경력을 쌓고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기위해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다.

약력

1968년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출생- 1남 6녀중 둘째

1975년 국민학교 입학

1977년 국민학교 3학년 도서부장

1978년 국민학교 4학년 음악부장

1979년 국민학교 5학년 반장

1980년 국민학교 6학년 반장

1981년 함평여자중학교 입학

1984년 함평여자고등학교 입학

1987년 목포대학교 원예학과 입학

1988년 동아리에서 아빠 처음 만남.

1990년 전라남도 지방직 공무원 합격

1991년 목포대학교 졸업

1991년 전라남도 고흥군 공무원

1993년 아버지와 결혼과 동시에 상경

1994년 우리 형 출생

1996년 나 출생

2000년 운전면허 자격증 취득 1종 보통

2002년 공인중개사 자격증 취득

2002년 공인중개사무소 입사

2005년 퇴사

2006년 주택관리사 취득

2012년 공인중개사무소 입사

2013년 경기불황으로 퇴사

2013년 부품품질검수 시작

2019년 부품품질검수 퇴사

2019년 컴퓨터 자격증 취득 (엑셀,한글, 파워포인트, 컴퓨터 활용능력 2급)

2020년 아파트 경리 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