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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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24일 (일) 22:45 판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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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 및 사망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난 후 1974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학적

1914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1921년 동경 도요야마(풍산) 중학교에 편입해서 1925년 졸업하였다. 다음 해인 1926년 동경 릿쿄대학 예과를 거쳐, 1927년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업적

1930년대

로망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하여, 1931년 7월 서항석(徐恒錫)·이헌구(李軒求)·이하윤(李河潤)·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김진섭(金晉燮)·함대훈(咸大勳)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했다. 고골리의 「검찰관」에 출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희곡·창작·연기·연출·평론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 극예술연구회를 주도하였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삼일극장에 「빈민가」를 공연하였고, 1935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공연극본으로 씌어진 작품「」가 일제의 검열로 상연되지 못하고,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의 창립공연으로 상연되었다.

극작가로 등단한 것은 희곡 「토막」부터였다. 이후 극예술연구회 시기(1931~1939)에 70여 편에 달하는 연극비평과 희곡비평, 시론, 연극계결산, 희곡창작법과 영화계에 대한 조언 등을 발표하였다. 희곡으로 「빈민가」(1935), 「」(1935) 등이 대표적인데, 이 가운데 농촌 현실과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다.

1940년대(해방전)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 이사에 취임하면서 일제에 협조하였다. 1941년 2월 부여신궁 조영공사에 근로봉사하였으며, 3월 조선연극협회 산하 극작가동호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7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로 양분된 공연예술단체를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연극문화협회에서 상임평의원에 임명되었고, 12월 영화기획심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941년 극단 현대극장을 창립하고, 「흑룡강」(1941), 「북진대」(1942), 「대추나무」(1942) 등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친일연극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임명되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조선문인보국회 주최한 결전소설과 희곡 공모 심사원으로 위촉되었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인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일어극 각본 공모 심사원으로 위촉되었다.

해방 후

해방 후 1947년 2월까지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그의 정치적 성향은 우파였고 그로인해 좌파의 성향을 가진 그의 제자 함세덕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특히 함세덕이 유치진의 작품인 자명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1947년 5월 18일자 독립신보에 실으면서 그 둘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면서 후에 이 것이 함세덕이 월북을 하게 된 가장 큰 역할을 하게된 인물로 평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48년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49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0년에는 초대 국립극장장에 취임함으로써 우리나라 연극계를 대표하게 된다. 1956년과 1957년 구미와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세계 연극 흐름을 시찰하였다. 1960년과 1961년 대외활동에 전념하여 동국대학교에 연극영화학과를 창설하여 초대 학과장을 맡고 전국극장단체협의회장과 문교부 대학교수자격심사위원에 위촉되었고, 동경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 국제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62년 드라마센터를 건립하여 한국연극연구소와 연극학교, 연극아카데미 등 부설기관을 만들었고, 같은 해 전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초대 회장과 예술원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63년 동경아세아영화제 국제심사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4년 극단 드라마센터를 창설하였다. 1971년 한국극작가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작품 및 저서

<토막> (1932)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1933)

<빈민가> (1934)

<> (1934)

<당나귀> (1935)

<제사> (1936)

<희곡 춘향전> (1936)

<마의태자> (1937)

<자매 1> (1938)

<부부> (1940)

<흑룡강> (1941)

<북진대> (1942)

<대추나무> (1942)

<조국> (1946)

<흔들리는 지축> (1946)

<자명고> (1947)

<남사당> (1947)

<며느리> (1947)

<별(星)> (1948)

<장벽> (1950)

<원술랑> (1950)

<까치의 죽음> (1950)

<통곡> (1951)

<가야금> (1952)

<처용의 노래> (1953)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53)

<푸른 성인> (1954)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1955)

<자매 2> (1955)

<사육신> (1955)

<논개> (1957)

<왜 싸워> (1957)

<한강은 흐른다> (1958)

<별승무> (1959)

<청개구리는 왜 날이 궂으면 우는가> (1964)

기타

경향파적 문학을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9인회(유치진이 속한 곳)는 처음 일종의 문학 친목 단체였다가 은연중 경향문학에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태도로 나왔다. 3-4년 동안 소극적이나마 순수문학 지향의 단체적인 활동을 지향했다.

그들은 1935년에 동인지의 성격을 띤 《시와 소설》을 간행했고, 3-4회의 문예 강연회를 가졌으나 얼마 후 동인간의 작품 경향의 불일치와 분열이 동기가 되어 결국 문학적으로 큰 공적은 남기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9인회는 순수문학 단체로서 등장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문단적으로 쟁쟁한 활동을 하던 문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극작가 함세덕의 스승이다.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서 친일적인 특성을 가진 연극을 많이 한 친일파이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예를 들어 1942년 발표한 〈북진대〉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생애를 찬양한 작품이다. 관제 연극 공연을 위한 현대극장을 주도했고, 현대극장 창립 작품으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룡강〉의 희곡을 썼으며, 함세덕, 조천석 등의 친일 작품을 연출하고 친일 수필도 발표한 기록이 있다. 조선연극협회, 조선문인협회의 간부를 지냈고, 1944년에는 어용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소설·희곡부 회장이 되었다.


민중예술론의 영향을 받아서 연극을 시작했다.

극문학갈래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 유치진의 극문학

조국〉(1946)/〈자명고〉(1946)/〈〉(1948)/〈흔들리는 지축〉(1949)/〈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1933)/ 〈빈민가〉(1935)/〈〉(1935) /〈토막〉/<북진대>/〈흑룡강


극예술연구회를 서항석, 홍해성, 윤백남과 같이 설립하였다.

우익성향을 가졌었고 반공통일연맹의 이사와 조선문인보국회의 소설·희곡부 회장을 맡았다.

유치진은 릿쿄대학 재학 시절 아일랜드 문학/연극운동에 심취했다. 이를 보아 현실을 희화화하는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와서 '브나로드'(민중속으로, 대중속으로) 연극을 구상했다.

유치진은 예술 지상주의적인 성격의 '극연'창립회원으로 가입을 했는데 식민지적 상황에서는 '극연'의 연극 노선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호 '동랑'을 따온 동랑 청소년 종합 예술제서울예술대학교에서 개최 중이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1940년대 국민연극과 친일협력의 논리 -유치진을 중심으로-


극작가 총서 3 함세덕편(자유를 향한 동경에서 닫힌 현실로|page7~50 저자:노제운)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