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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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선(1611138)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6일 (금) 03: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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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장길산(張吉山)>은 황석영이 지은 대하 역사소설로 1974년 7월 11일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한국일보』에 2,092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1984년 현암사에서 전 10권으로 완간되었다. 이후 출판사를 옮겨 199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재간행되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군사 독재 권력에 의해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억압을 받았던 시대이다. 작가는 이와 유사한 역사적 배경으로 18새기 숙종조를 설정하고, 여기에 실존 인물인 장길산을 등장시켜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민중들의 생명력을 표현함으로써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전4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 「광대」에서는 장길산이 여종의 몸에서 출생하여 광대의 손에 자라는 성장 과정과, 길산이 탈옥하여 용맹한 사공 우대용, 송도 거상의 행수 차인 박대근, 구월산 도적패의 부두령 마감동, 산채의 부두령 오만석, 선비 출신의 책사 김기, 광대장사 이갑송, 소금장수 강선홍 등의 동지들과 구월산 산채에서 의형제를 맺어 규합하는 과정, 그리고 애인 묘옥이 길산이 처형되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사당패에 투신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제2부 「군도(群盜)」에서는 묘옥이 자기를 사모하는 도장(陶匠) 이경순과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된다. 한편 의적이 된 강선홍과 우대용 등의 맹활약이 펼쳐지고, 수도를 마치고 금강산에서 돌아온 길산이 의형제들과 활빈행을 하기로 결의한다. 제3부 「잠행(潛行)」에서는 길산의 활빈도가 자비령에 분가한 뒤, 백성들을 선동하여 부자들의 양곡을 털어 나누어주는 쾌거를 그리고 있다. 특히 검계(劍契)의 일원인 산지니가 노비들의 비밀결사인 살주계(殺主契)와 접촉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조된다. 제4부 「역모」에서는 비밀결사의 잔여 세력과 활빈도, 승려 등에 의한 미륵도 포교 등이 반정입국(反正立國)의 계획으로 결집된다. 이 계획은 좌절되지만 활빈도의 활약이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가짜 장길산을 살해한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서사적 골격을 볼 때, 『장길산』은 조선시대 의적의 활약상을 그렸다는 것,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상정했다는 것, 그리고 당대의 사회상과 풍속 및 세태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점 등에서 문학사적으로 식민지시대 역사소설의 백미인 홍명희의 「임꺽정」과 비교된다. 이 작품은 단편소설이 창작과 비평의 주류를 이루던 문단에 있어서 1970년대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을 풍부하게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분단 이후 남한에서 창작된 역사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줄거리

장길산은 신분의 해체가 서서히 시작되던 조선조 효종 말, 도망하는 여비(女婢)의 몸에서 태어난다. 노상에서 길산을 낳자마자 그의 생모는 죽고, 구월산 광대들의 손에 기탁된 길산의 삶의 출발은 당시 유민계층이 천민세력의 핵심이 되어가는 시대의 박명과도 같은 상징이다. 광대로서 성장하는 길산은 같은 광대로 역사(力士)인 이갑송과 함께 해주 간상배 신복동 패를 혼내주고 송도 상인 박대근과 사귀게 된다. 한편, 흉년이 들어 색상에 팔려 창기(娼妓)가 되었던 묘옥(妙玉)은 재인말 총대 손돌 노인의 건짐을 받는데, 길산은 묘옥과 정분을 맺고 평생을 기약한다. 같은 도망 노비로서 봉산 자비령의 화적당 임태룡에게서 분가해 나온 마감동과 오만석이 구월산채의 두령노가를 등지고 장길산·박대근·이갑송과 손을 잡는다. 해주 상인 신복동은 선상 임유학을 모략에 의해 패망시키고 그의 충실한 도사공이었던 우대용은 살인죄로 투옥된다.

길산과 만나기로 했던 박대근은 신복동 패거리의 분풀이를 받게 되었고, 길산과 갑송이 그들을 징치한 후 달아나다가 길산이만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의 날을 기다린다. 때마침 길산은 해주 감영옥의 회자수 망나니로 전락하여 잔명을 붙이고 있는 우대용과 만나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출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길산이 탈옥에 성공하여 구월산에 당도해 보니, 묘옥은 간데 없고 그를 길러준 양부모는 누이동생처럼 자라온 봉순이와 혼인을 시키려 한다. 길산은 양부모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봉순을 아내로 맞고 갑송이 또한 성혼을 하는데, 이 기회를 빌어 뜻맞는 벗들이 형제의 의를 맺는다. 송상 박대근, 봉산의 선비 김기, 장길산, 이갑송, 해주 도사공 우대용, 구월산의 화적 마감동과 오만석, 그리고 장연의 소금장수 강선흥 등이었다. 길산은 마침내 생각하는 바가 있어, 풍열수님의 소개로 금강산에 은거하여 적국의 승려와 천민세력을 모으고 있는 운부대사를 찾아 떠난다. 한편, 안성의 사당패로 흘러간 묘옥은 모가비 고달근의 권유로 여주 도장(陶匠) 이경순을 알게 되고, 경순은 묘옥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묘옥은 송파 부근에서 자리를 잡고 주막을 차린다. 금강산에 들어간 길산은 운부의 지도를 받으며 산에다 화전 개간도 하고 역병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을 구호하여 새로운 뜻을 다진다. 길산은 차츰 백성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 하는 확실한 생각을 갖게 된다.

금강산에서 삼년 수도를 마친 길산은 생부의 종적을 찾아 묘향산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깨우쳐 운봉산에 들어가 다시 수도를 계속한다. 낭림산맥의 깊은 산중에서 그의 인간성과 정신은 더욱 성숙되고 깊어간다. 구월산으로 돌아온 길산은 선비 김기를 완전히 천민을 택한 사람이 되게끔 도와주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구월산 산채를 나누어 자비령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숙종 10년 봄부터 시작된 대기근이 전국을 덮치기 시작한다. 길 위에는 양식을 구하러 다니다 쓰러진 주검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역병까지 나돌게 되자 백성들의 울음은 곳곳마다에 가득 찬다. 이에 길산은 보다 너른 기민 구휼을 위해 자비령에다 그들의 세력 일부를 옮기려 한다. 관의 혹심한 수탈에 못 이겨 민변을 일으키고 도주해 온 자비령 산채의 두령 최흥복을 그의 수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그들은 구월산과 자비령을 중심으로 휘하의 모든 무리들에게 활빈에 나설 것을 명하고, 해서 곳곳에 출몰하여 관창과 부호를 털어 잡초처럼 버려진 기민들의 목숨을 건지기 시작한다. 이어 그들은 평안도에까지 그 세를 뻗쳐 나갔고 자연 장길산의 이름이 백설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급기야 감사 이세백은 출중한 무관들을 뽑아 토포에 나서나 실패하고 만다. 한편 한양 조정에서는 권세 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따라서 백성들의 원한과 탄성은 높아 간다. 이들의 짓눌린 삶에 응어리져 있던 울분이 불씨가 되어 한양 성내에서도 살육과 침탈의 불길이 번져갔다. 부패한 관리와 무도한 양반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검계와 살주계는 부호와 대갓집들을 차례로 들이친다. 양반의 세상이 곧 끝난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한양 성내는 술렁대기 시작한다. 이에 포청에서는 당대에 그의 무예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포도 종사관 최형기를 토벌에 나서게 한다.

정묘년 4월, 입국(立國)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길산의 활빈도, 운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巫系),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이 결속한다. 백성들 사이에서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하여 용화(龍華) 세계를 이룩한다는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한다. 이 때 고달근이 큰 이익을 꾀하다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이미 달아난 뒤이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징계하여 다스리고 최형기를 처단한다. 해서와 관북 일대에는 장길산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출몰해 조정을 괴롭히지만, 이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의 말

2002년 한국일보

지난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이래로 나의 문필 생활은 올해로 어언 40년이 되었고 이제 곧 환갑인 나이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는 전후의 어려운 시절임에도 내게 책을 사다 주셨고 나에게 일기를 쓰도록 권하셨다. 영등포의 야시장 골목에 나가면 난리 중에 생계가 어려워진 집이나 빈 집에서 쏟아져 나온 개인 서가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헌 책을 팔기도 했지만 대개는 노천에 책꽂이를 늘어놓고 대서점을 하는 데가 많았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책꽂이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날마다 닥치는대로 책을 빌려다 보곤 했다. 해방 공간에 나온 갖가지의 세계명작 번역서로부터 대중소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몇개의 책꽂이를 모두 훑었다. 다락과 마루방에 엎드려서 읽다가 유리창 너머로 변하고 사라지는 풍경들을 눈에 익혔다. 여의도 비행장의 프로펠러 소리며, 공장의 회색 담벽이며, 샛강의 푸른 들판이며, 그 속에 피어나던 꽃다지, 자운영과, 까마중과, 뱀딸기가 책 속의 다른 세상들과 어우러졌다.

글짓기 행사에서 몇 차례 상을 받고 나서, 칭찬을 받은 어린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담에 크면 뭐가 될거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곤 했다. 당시에는 작가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글 쓰는 일이 학과 공부에 비해서는 그다지 대수로운 짓이 아니라는 점은 학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확실하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내 눈과 가슴에 그 어떤 기관이 생겨나 있었던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건 ‘인문적’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아무튼 ‘사람 살이’에 대한 따스한 온기와 물기 같은 것이 스며든 무슨 투명한 렌즈 같은 것이었다. 빛을 투과해서 여러 색깔을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 프리즘이라면 그 비슷한 감성의 기관이 생겨났을 거라는 얘기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세계와 인간의 경험을 반영한 갖가지의 책을 읽음으로써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 갈피 갈피마다, 저 여름날 도로의 움푹 패인 물웅덩이에 번진 기름이 오색 빛으로 빛나던 순간이나, 아침에 깜짝 놀라게 몰래 오신 손님처럼 내린 첫눈이라든가, 인천상륙작전이 계속되던 캄캄한 밤 하늘의 야광탄의 불꽃이나 먼 우레 같던 포 소리들, 어린 거지 남매의 때 묻은 손 위에 걸린 더러운 밥 찌끼가 담긴 깡통이나, 무릎이 앙상하고 눈이 빛나던 검정치마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내밀어준 짭짤한 누룽지라든가, 하는 생생한 삶의 편린들이 이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미지의 세상과 새로운 체험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은 바로 이러한 기관이 내 몸과 마음을 부추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학이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일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청소년기에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그것은 숱한 난리를 겪으며 어렵게 생존을 이어온 어른들의 영향도 컸으리라. ‘글 쓰는 일’은 ‘직업’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낚시, 등산, 독서처럼 취미란에나 적을 수 있는 일거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글 쓰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 때문에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문학’은 마치 사랑하는 상대처럼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고하면 전체적인 형상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곁눈질도 하지않고 그냥 ‘놓아’ 버렸다. 갈테면 가라지… 하고 중얼거렸겠지. 그는 아마도 내가 ‘거리를 두고’ 놓아버린 뒤에도 늘 내 주변을 맴돌았을 터이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자아’라는 꾸며진 가상의 껍질을 벗고 사회와 만난다. 그때에 내 등 뒤에서 작은 속삭임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나 아직 당신 등 뒤에 있어.”

나는 그것과 새삼스럽게 재회한다. 그로부터 그것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동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죽음도 이별도 함께 겪었다. 나는 무명 작가 시절의 가난을 견디면서 ‘글 쓰는 일’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시장 가운데서 하나의 생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직업 작가’이며 프로 글쟁이다. 하늘로부터 천형의 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글줄 좀 쓰다가 늙은 글쟁이들이 고민하는 쌍통을 하고, 무슨 특별하고 월등한 생산을 해낸 것처럼 엄살을 부리는 꼴은 정말 차마 못보아 주겠더라. 스패어 운전수를 하다 정식 운전수가 되고, 개인택시 허가를 얻어 육십이 넘어서야 사남매를 대학 졸업시키고, 마나님과 임대 아파트에서 산다던 어느 고참 택시 운전사의 너털웃음은 겸허하고 당당하다.

나는 이러한 직업의식과 더불어 ‘글 쓰기’가 사람의 삶과 관계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직업 윤리 같은 것이다. 사람의 삶에 깊숙이 관계된 일을 하는 비슷한 처지의 의사라든가 교사라든가 종교인이라든가 더욱 넓게는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라든가 하는 부류들에게 그러한 직업 윤리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원칙적인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러한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려고 할뿐이다. 나는 잃어버린 것도 많지만 마음을 비우고 놓아버린 탓에 얻은 것들도 많았다. 나는 원래가 왼손잡이였다. 교육열이 대단한 모친에게서 왼손의 사용은 잘못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왼손을 사용할 때마다 호되게 얻어 맞았다. 그래서 오늘날 글씨 쓰는 것과 밥 먹는 것만은 오른손으로 익숙하게 해낸다. 하지만 공 던지기며 싸울 때 주먹이 나가는 것이며 뜀박질을 하려면 왼쪽이 본능적으로 익숙하다. 교육은 받았으나 그것은 일종의 억압이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억압과 제한에는 저항한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나의 이런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져서모두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한다.

글쎄, 나는 왜 문학을 할까?

세상을 돌아보면 지금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의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백 년 뒤에는 지상에 한 사람도 살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모두 사라지고 후세의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겠지. 세상은 좀 더 나아져 있을까. 그들은 나를 조금은 기억이나 할까. 우리가 꿈꾸었던 가치들은 여전히 귀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어디선가 보았던 모자이크 벽화처럼 사람마다 자신의 사금파리 파편들을 붙여 나가면서 형상은 차츰 구체화할 것이리라. 우리가 기획했던 그림은 어느만큼 완성에 가까워질 것인가. 그 벽의 한 모퉁이에 나의 손짓이 또한 자취를 남겼으면 한다.

세계는 지금 지난 세기에서 넘어온 미완의 숙제들이 고통이 되어 우리를 옥죄고있다. 우리는 아마도 문명의 변화하는 이행기에서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길고 고통스런 이행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내 독자들이 있어 운이 좋은 축에 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력하게 그들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나는 편들기가 글쟁이의 업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사람들의 삶이 보다 넉넉하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고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이 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뒤늦게도 나는 오늘 문학청년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나를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게 만든다. 글 쓰는 일은 아직도 나에게는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랑은 나를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나의 실천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언제나 앞서가고 있잖은가.

─한국일보/2002/05/23, 황석영



2004년 창비 개정판

지난 1994년에 옥중에서 현암사 판 『장길산』을 다시 살펴보다가 몇가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개정판을 내리라고 작정하게 되었다. 오자와 탈자가 제법 많았는데 이는 원래 신문에 연재되던 것을 그대로 원본으로 삼은 탓에 책을 내면서 미처 바로잡지 못한 것들이었다. 신문연재란 창작의 순발력과 끈기를 요구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곳곳에 본격문학적 긴장을 풀어줄 놀이의 요소를 적당히 배치해둬야 하는 등의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작가로서도 1974년부터 십년에 이르는 집필기간의 연속된 긴장 가운데서 여러 단원의 매 고비마다 쉬었다 가거나 놀다 가는 느낌이 확연한 부분이 많았다. 1995년 창비에서 개정판을 내면서는 이런 부분들의 때를 벗겨내고 싶었다.

특히 1991년 봄, 마지막으로 방북했을 때에 평양 문예출판사의 제의로 북한에서의 출판에 응하게 되었는데 책임교정자는 벽초(碧初)의 손자인 외우 홍석중(洪錫中)형이 자청하여 결정되었다. 그때에 내가 먼저 ‘너무 야한 남녀상열지사’와 ‘지나친 패설(悖說)’은 빼어버리자고 제안하자 홍형은 “나도 재미를 봐야 할 거 아닌가”고 허튼 소리를 하더니, 나중에 북에서 출판되었다는 소문만을 뉴욕에서 전해듣고는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 어쨌든 『장길산』은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판된 유일한 책이 되었다. 당시 나는 옥중에서 이러한 사정을 밝히면서 ‘작가의 말’을 썼지만 옥내 검열위원회는 나의 글이 출판되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꺼려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첫 개정판에는 나 대신에 문학평론가 최원식(崔元植)형이 ‘덧붙이는 글’을 써넣었다.

원래 평론가들의 글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소싯적부터의 원칙이지만 몇마디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장길산』에 대한 평론이나 해설은 곳곳에 많으니 일일이 거론하기는 생략하고 다만 평론가와 작가의 일치된 의견 가운데, 역사소설은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 못지않게 그 소설이 언제 씌어졌느냐 하는 당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즉 『장길산』을 두고 ‘남한 진보진영의 초상’이라면 좀 지나친 말이겠지만 197,80년대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대 가운데서 ‘민중성’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볼 수는 있겠다. 또한 새로운 세기에 미국식 세계화라는 이행기를 맞은 동아시아와 주변부 나라들이 오래 전부터 그려오던 민중적 문명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누구는 이 소설이 농민을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둥 또는 반대로 이제 농민 중심의 개혁론은 낡은 게 아니냐는 둥 중구난방이던데, 그야말로 사회과학적 잣대로 인생을 재단하던 지난 시대의 묵은 습관일 것이다. 우선 전체의 흐름을 보고 강물 같은 역사 속에서 현재에도 존재하는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 일이다.

이번에 개정판을 다시 내면서 그동안 달라진 독자들의 독서습관에 맞추어 활자도 조금 키우고 단원 나누기도 줄거리 위주로 좀더 짧게 하여 늘어지게 읽기보다는 한숨씩 쉬게 해주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장을 나누는 부분이 달라졌고 맨 끝부분인 ‘귀면(鬼面)’과 ‘운주사 전설’ 부분을 고쳐썼다.

원래 장길산은 숙종 연간인 병자년 역란(逆亂)에 이름이 나온 뒤로 붙잡히거나 출몰하지 않고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데, 나중에 연대가 훨씬 위인 연산군 때 도적 홍길동을 그렸다는 광해군 무렵 허균(許筠)의 소설에 잠깐 거론된다는 것은 내가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미 밝혔던 바다. 우리에게 전해진 ‘언문소설’이 대개는 안성본인데, 이들이 제작된 것은 안성이 서울에 가까운 삼남 물산의 집산지로서 중요 저자로 부상한 뒤일 테니 아마도 영정조 때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 전에 장길산이 사라진 뒤에도 그에 관한 소문은 민중들의 구전을 통하여 끊임없이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사실은 이미 실학자 이익(李瀷)이 그의 책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선의 3대 도적을 거론하며 지적했던 점이다.

나는 장길산이 사라진 뒤에 상징적으로 역성혁명과 민중운동의 사상이 어떻게 백성들 사이에 전수되고 기억되는가를 이야기체로 덧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봉산탈춤’과 ‘가짜 장길산의 죽음’을 연결해보려고 하였다.

─2004년 4월, 황석영[1]


작품 해설

이 소설은 조선 숙종조에 실재했던 인물인 장길산을 주인공으로한다. 『숙종실록』과 『추안급국안』,『성호사설』 등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있는 장길산의 파란만장한 삶과 시대적 변화를 역사학계의 연구물과 실록과 야사 등의 기록을 참조하여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천노(賤奴)의 소생인 그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키워나가는 과정, 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녹림당(綠林黨)을 조직하고 지배계층에 대항하는 모습. 그리고 장길산 개인의 실천의지가 그 개인의 특별함으로 끝나지 않고 민중에게로 확대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을 이끄는 것은 장길산을 중심으로 한 광대들의 길이다. 팔천(八賤)의 하나로 엄혹한 신분질서의 맨 아래쪽에 놓여 철저히 소외된 처지. 그들이 비록 가족을 거느리고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산다고해도 그들의 본질은 자신의 재주를 팔기 위해 걷는 길 위를 떠도는 뿌리 뽑힌 유민이다. "길이란 광대들이 태어나는 곳이자 살아가는 동안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며, 죽는 곳이며 묻히는 곳"이라는 말의 밑에 숨은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철저한 소외에서 원한이 생겨나고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한의 더미 내부에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는 해소의 지항성과 현실 체험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모순에 대한 인식, 그리고 계몽자의 계몽에 의한 충격과 각성 등이 합하여져 마침내 그 길은 그 같은 모순을 타파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투쟁의 길로 변모한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봉건 질서에서 소외된 불쌍한 무리들이 그 길에 합류하여 함께 나아가니, 이들 집단의 여로는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 싣고 당대 현실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무수한 관계의 고리를 엮어내고, 그리하여 방대한 소설 공간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반봉건운동의 실천적 투쟁의 길로 변모한 이 길을 이끄는 힘은 여러 가지인데,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장길산을 정점으로 모인 무리들을 결속시키는 절대의 의리와, 장길산·이갑송 등 주요 인물들의 공통된 특성인 절대의 순직성, 그리고 장길산·묘옥·이경순 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극히 순수한 사랑 등이다. 이처럼 고귀한 덕목들을 좇아, 지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끝끝내 이를 지키고 실현하면서 그들은 나아가 마침내는 유토피아 건설의 실천적 투쟁의 전선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 건설은 실현되지 못한다. 아름다운 전설만을 남기고 그들은 사라져갔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우선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발견된다. 등장 인물 중 묘옥과 이경순을 제외한 대부분이 숙종 때의 공안(供案)에 기록된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아예 무시되기도 한다. 기존의 역사 소설류가 대체로 실제의 사건과 인물의 행적이나 따르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단순한 영웅 소설이 아니다. 당대 사회 현실을 광범위하고 다채롭게 그리고 있으며, 민중 세력이 확고한 미래의 전망을 가지고 반봉건적 변혁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 지배충의 관점에서 씌어진 사료(史料)들을 철저히 민중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한 작가의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시대 민중들의 언어와 관습을 풍부하게 재현함으로써 풍속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문제점도 적지 않은데, 당대 사회의 경제 수준을 지나치게 근대적인 것으로 미화시키고 있다거나, 변혁 운동을 주도하는 민중 출신 지도자들을 너무 지식인이나 영웅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어서, '역사적 실체'보다 '낭만적 전망'이 앞선 느낌이 든다.표현면에서는 장면 중심적인 묘사보다 작가의 직접적 설명에 치중하고 있는 점, 인물의 심리를 과다하게 묘사하여 사건 전개의 리듬이 끊어지는 점 등이 지적될 수 있다. 허나 이런 몇 가지 부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민중 의식의 역사적 재인식을 높은 수준에서 성취한 걸작이다. 특히, 장길산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포부는 좌절되었지만, 그의 정신이 면면히 계승된다는 결말 처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길산이 종적을 감추자 관가에서는 가짜 길산을 잡아죽이고 그에 대한 소문을 근절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하층민 사이에 널리 퍼지고 그의 애환을 담은 탈춤이 생겨나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는 마지막 대목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민중의 희구와 갈망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작품 연구



작품 배경

장길산(張吉山)

장길산(張吉山, ?~?)은 조선 숙종 때의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 장길산에 관한 기사가 짧게 언급되어 있으나 생몰 연도나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조선 시대에 활동한 범죄자들을 수사한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장길산이 언급된다.


소설가 황석영의 《장길산》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만화 《장길산》, 드라마 《장길산》등이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길산 관련 기사는 2개이다. 하나는 169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항 그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697년 이익화, 장영우 등의 반란 모의와 관련되어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실록은 장길산이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일부 반역에도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홍길동, 임꺽정과 달리 장길산의 체포 기사가 실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장길산은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월 10일 임술 3번째기사 (1697년 청 강희(康熙) 36년)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과 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往來)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陰凶)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초사(招辭)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道)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숙종실록보궐정오 31권, 숙종 23년 2월 16일 정유 1번째기사 (1697년 청 강희(康熙) 36년)

국청에서 죄인 이영창을 다시 추문하자 말을 변경해서 공사를 바치다

국청(鞫廳)에서 죄인 이영창(李榮昌)을 다시 추문(推問)하자, 말을 변경해서 공사(供辭)를 바쳤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이형징(李衡徵)이 윤두서(尹斗緖)·윤창서(尹昌緖)와 같이 찾아 왔기에 그대로 그들과 함께 심단(沈檀)의 집으로 갔더니, 심단의 아들 심득천(沈得天)과 윤두서가 은전(銀錢)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김춘택(金春澤)과는 원한을 맺었으므로, 그가 반드시 죄를 꾸며서 해치려고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상세하게 엿보고 탐지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심득천이 죽은 뒤에 가까이서 유선기(兪選基)·이절(李梲)과 서로 친밀했다는 뜻을 심단과 윤두서 등에게 말하니, 윤창서가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일찍이 환국(換局)을 도모하다가 유배당했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불량한 일을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잘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탐지한 지 수일 뒤에 가서 이절 등을 보니, ‘우리가 어지러움을 틈타 일어나려고 이미 군장(軍裝)과 마필(馬匹)을 갖추었다.’고 하면서 내어 보이므로, 즉시 그 말을 심단 등에게 전하니,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손수 쓴 필적(筆跡)을 얻은 연후에야 착실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경함(金慶咸)은 개국 충신(開國忠臣)이란 말을 들어서 알고 돌아가 윤두서의 무리에게 보이니, 이형징이 인해서 해상(海上)의 정씨(鄭氏) 성(姓)을 가진 자, 옥여(玉如)·정학(鄭涸)·최헌경(崔憲卿) 등 및 삼광 사한(三廣四漢)이란 말을 지어내고, 또 신건(申鍵)의 은(銀)과 인삼에 대한 말과, 장길산(張吉山)과 관계를 맺은 상황과 여인(女人)이 소를 탄 상황을 지어내어, 그것으로 이절의 무리를 속이고 미혹되게 하였으며, 일여(一女)와 혜일(惠一)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서로 아는 터이며, 풍열(楓悅)이 이름난 중이란 것을 빙자해서 말하고, 여러 절의 이름과 다른 지역의 이름은 더러는 혜일에게 배웠고, 더러는 자신이 지어 낸 것이었으며, 묘정(卯丁)이란 이름도 자신이 지어 내어 이절 등에게 보여 세력이 확대됨을 보이려는 뜻이었고, 지난날의 거짓 초사는 과연 윤두서·이형징 제인(諸人)과의 약속을 매우 굳게 하였으며, 또 은화(銀貨)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마 바로 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운주사(雲住寺)

중앙


운주사(雲住寺)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에 있는 절이다. 화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2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천태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개천사, 서쪽에는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주사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을 따라, 운주사의 지형이 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불상 천 위와 탑 천 개를 세웠다고하여 일명 천불천탑이라 한다. 다만 문헌상으로 전해져오는 살에는 아직까지 천불천탑에 대한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異座”란 기록이 있어 현존 석불석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2]

칠성바위와 와불 등 미륵사상과 관련이 있는 유적들이 바로 소설 장길산의 배경 무대이다.


칠성바위

중앙[3]


이 곳에 위치한 7개의 원반형 석재는 언듯보면 원반형 7층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하나 자세히 관찰하면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듯한 모습의 배열 상태와 원반지름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와 매우 흡사하여 칠성신앙의 조형물인 북두칠성석으로 보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


와불

중앙[4]


도선국사가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와불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 땅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전해온다.




출간사항

소설

1984년 현암사

중앙


장길산(張吉山)

  • 출판사: 현암사
  • 출간일: 1976년 5월~1984년 7월 (전 10권)


중앙


현암사 창업 70주년 기념 전시회(2015년)에 전시된 작품. 장길산의 등장인물들을 홍성담 화백이 판화에 담아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길산, 묘옥, 최형기, 이갑송, 우대용, 박대근이다. 인물들의 성격이 그림에 확연히 드러난다.


1995년 창작과비평사

중앙


장길산(구판)

  •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출간일: 1995년 7월 (전 10권)


2004년 책이있는마을

중앙


(청소년을 위한) 장길산

  • 출판사: 책이있는마을
  • 출간일: 2004년 1월 1일 (전 10권)


작품 소개
황석영 대하소설. 17세기 말 숙종조를 배경으로 장길산을 비롯한 수많은 인걸들이 집결하여 형성되는 구월산의 녹림당, 그들이 겪게 되는 파란 곡절과 활빈행을 장쾌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조선후기의 세태와 풍속, 제도와 생활상, 장길산의 활동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가 직접 줄거리를 간추리고 어려운 역사적 곁가지들을 쳐내어 새롭게 각색 편집해 청소년용으로 개작하였다.


목차
제1권 재인말 사람들
제2권 결의 형제
제3권 강물을 따라서
제4권 다시 모인 의형제들
제5권 백성들을 구하라
제6권 천민들의 반란
제7권 활빈당의 맹활약
제8권 구월산 토벌
제9권 미륵의 얼굴
제10권 역사 속으로


2004년 창비

중앙


장길산(신판)

  •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 출간일: 2004년 4월 28일(1쇄) (전 12권)


작품 소개
황석영 대하소설 『장길산』의 개정판. 여러가지 사료들을 풍부하게 활용하고 그 위에 역사적 상상력을 보태어 거대한 서사의 장강을 이루어낸 이 소설은, 우리 민중사의 도도한 물줄기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밝혀준다. 그 웅대한 규모 속에는 조선조 후기사회의 세태와 풍속, 제도와 생활상이 실감나게 재현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낡은 왕조를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고자 하는 민중들의 절실한 염원이 의적들의 활약상을 통해 비추어진다.

개정판에서는 낡아 보이는 활자를 바꾸어 읽기 편하게 했으며, 작가가 줄거리 위주로 장을 새롭게 나누고, 말미의 '종장 귀면'과 '운주 미륵' 일부 등을 손질하였다. 길산과 묘옥의 애틋한 사랑, 수많은 인걸들의 활약과 새 세상을 향한 절절한 염원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져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만화

1990년 풀빛

중앙


장길산

  • 원작: 황석영
  • 그림: 백성민
  • 출판사: 풀빛
  • 출간일: 1987년 4월~1990년 5월 (전 20권)


목차

  • 제1부: 광대
    • 1권 돌무덤
    • 2권 재인말
    • 3권 외로운 싸움
    • 4권 부평초
    • 5권 입산
  • 제2부: 대소두령
    • 6권 달마산
    • 7권 사당패
    • 8권 떠돌이들
    • 9권 한강뱃길
    • 10권 재회
  • 제3부: 잠행
    • 11권 자비령
    • 12권 황토바람
    • 13권 살주계
    • 14권 활빈당
    • 15권 구월산
  • 제4부: 역모
    • 16권 용녀
    • 17권 보살행
    • 18권 미륵향도
    • 19권 심산대하
    • 20권 귀면


2004년 애니북스

중앙


장길산

  • 원작: 황석영
  • 그림: 김태형
  • 출판사: 애니북스
  • 출간일: 2004년 7월~ (전 20권 출간예정)


작품 소개
황석영의 역사 대하소설 『장길산』을 원작으로 한 올컬러 교양만화. 시각적으로 친숙한 SD캐릭터를 도입하고,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통해 장길산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이야기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장길산'이라는 인물을 찾아내어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시대적 변화를 함께 엮어 놓고 있다. 천노의 자식인 그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의지를 키워 나가는 과정, 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녹림당을 조직, 지배 계층에 대항하는 모습, 그러한 개인적 실천력이 민중에게로 확대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RDF 및 온톨로지

RDF

DOMAIN(A) RANGE(B) RELATION 설명
황석영 장길산 창작하다 A는 B를 창작했다.
임꺽정 장길산 영향을 주다 A는 B에게 영향을 주었다.
장길산(인물) 장길산 주인공이다 A는 B의 주인공이다.
운주사 장길산 배경이다 A는 B의 배경이다.
현암사 장길산 출간하다 A는 B를 출간헀다.
창작과비평사 장길산 출간하다 A는 B를 출간했다.
장길산 (청소년을 위한)장길산 원작이다 A는 B의 원작이다.
장길산(인물) 조선왕조실록 등장하다 A는 B에 등장한다.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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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출처



작성자 및 기여자

인문정보콘텐츠(2020) 강의의 일환으로 송지선(1611138)이 2020년 6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