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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2월 초 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간 김동인은 '문단사절'을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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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김동인은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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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적산가옥을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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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은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했다. 그는 1939년 2월 초 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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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敵産)은 '적의 재산', '적들이 만든'이라는 뜻으로, 적들이 만든 집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인들은 적산가옥을 문화주택으로 불렀다. 문화주택이라고 부른 데에는 서양의 건축 양식 및 구조 방식을 일식 양식에 활용하여 설계한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적산가옥은 대부분 콘크리트, 벽돌, 철근 콘크리트 등의 서양식 재료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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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담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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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이러한 건축물을 지으려고 했던 이유는 당시의 일본에 탈아입구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서양의 문물이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의 문화를 이만큼 우리의 것으로 활용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탈아입구 사상을 해석하자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이 이면에는 조선인들이 동양 문화를 고집하는 것을 미개하다고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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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병합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 착취 기지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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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들어서 일옥들이 증가하여 조선 방방곡곡 일옥이 지어졌고, 일본인들은 조선을 마치 자신의 나라처럼 여겨 생활을 즐기거나 놀이를 즐기는 등 조선을 자신의 주색장으로 전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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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고 조선이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은 밤이나 새벽에 몰래 집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광복 이후 일옥들은 빈 집으로 남게 되어 일부 조선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부서졌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이후 일옥들은 미군정청령에 따라 미군정이 특별 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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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부령에 따라 남한에 소재한 일옥들 대부분을 국유지로 지정하고 적산가옥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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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은 항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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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B0%EC%82%B0%EC%8B%9C 전라북도 군산시], [https://ko.wikipedia.org/wiki/%EB%85%BC%EC%82%B0%EC%8B%9C 충청남도 논산시],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D%95%AD%EC%8B%9C 경상북도 포항시] 등이 있다.
  
위 사진은 193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이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전선을 방문해 일본군을 위문하러 갔다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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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F%99%EC%9D%B8 위키백과: 김동인]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F%99%EC%9D%B8 위키백과: 김동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okgram&logNo=220397588182&parentCategoryNo=&categoryNo=75&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네이버 블로그: [16-8] 황군위문조선문단사절 속의 임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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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A0%81%EC%82%B0%EA%B0%80%EC%98%A5 나무위키: 적산가옥 사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77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군위문작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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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8%EC%95%84%EC%9E%85%EA%B5%AC 위키백과: 탈아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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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5일 (토) 16:28 기준 최신판

적산가옥

개요

1945년 11월, 김동인은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적산가옥.jpg

위 사진은 적산가옥을 찍은 사진이다.

내용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 '적들이 만든'이라는 뜻으로, 적들이 만든 집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인들은 적산가옥을 문화주택으로 불렀다. 문화주택이라고 부른 데에는 서양의 건축 양식 및 구조 방식을 일식 양식에 활용하여 설계한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적산가옥은 대부분 콘크리트, 벽돌, 철근 콘크리트 등의 서양식 재료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었다.

건축에 담긴 사상

일제가 이러한 건축물을 지으려고 했던 이유는 당시의 일본에 탈아입구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서양의 문물이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의 문화를 이만큼 우리의 것으로 활용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탈아입구 사상을 해석하자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이 이면에는 조선인들이 동양 문화를 고집하는 것을 미개하다고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

1910년 한일병합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 착취 기지로 정하였다.

1930년대 들어서 일옥들이 증가하여 조선 방방곡곡 일옥이 지어졌고, 일본인들은 조선을 마치 자신의 나라처럼 여겨 생활을 즐기거나 놀이를 즐기는 등 조선을 자신의 주색장으로 전락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고 조선이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은 밤이나 새벽에 몰래 집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광복 이후 일옥들은 빈 집으로 남게 되어 일부 조선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부서졌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이후 일옥들은 미군정청령에 따라 미군정이 특별 관리하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부령에 따라 남한에 소재한 일옥들 대부분을 국유지로 지정하고 적산가옥으로 명명했다.


분포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은 항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적산가옥이 집중적으로 분포한 항구는 인천광역시 중구, 전라남도 목포시, 전라북도 군산시, 충청남도 논산시, 경상북도 포항시 등이 있다.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적산가옥 김동인 불하받다.
적산가옥 적의 재산 의미하다.
적산가옥 일제강점기 건축되다.
적산가옥 문화주택 불리다.
적산가옥 서양 건축 양식 활용하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