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 목차
 
| 이름 = 조만식
 
| 원래 이름 = 曺晩植
 
| 그림 = Cho Man-sik 02.jpg
 
| 출생일 = [[1883년]] [[2월 1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강서군]] <br/>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강서군]])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평양]]에서 총살형 집행됨.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50|10|15|1883|2|1}}
 
| 학력 = [[일본]]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정칙영어학교]]
 
| 직책 = 前 북조선 건준위 위원장
 
| 배우자 = 박씨 부인(사별) <br/> 이의식(사별) <br/> [[전선애]](삼혼)
 
| 자녀 = 조칠숭(아들) <br/> 조연명(아들) <br/> 조연창(아들) <br/> 조연흥(아들) <br /> 조연수(아들) <br /> 조선부(딸) <br/> 조선영(딸)
 
| 경력 = 前 [[조선민주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총재]]
 
| 부모 = 아버지 조경학(曺景學) <br/> 어머니 [[경주 김씨]] 김경건(慶州 金氏 金敬虔)
 
| 친인척 = 조은식(누이동생)
 
| 정당 = [[무소속]]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교]])
 
| 웹사이트 = [http://godang.goorm.net 고당 조만식 선생] <br/>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7465&ipp=10000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1882년]] [[음력 12월 24일]]) ~ [[1950년]] [[10월 15일|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 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설립운동|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의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195페이지</ref>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
 
  
== 생애 ==
+
=='''외부 링크'''==
=== 생애 초반 ===
 
==== 유년기 ====
 
[[1883년]] [[2월 1일]]([[1882년]] [[음력 12월 24일]]) 아버지 조경학(曺景학)과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敬虔)의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경학은 매년 벼 백 섬을 거둬들이는 [[평안남도]] [[강서군|강서]] 출신의 향반으로, 평양에서 일종의 위탁판매업이라 할 수 있는 물산객주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군|강서]] 출신으로,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1888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6년 한문 수학을 마쳤다. [[1905년]] [[평양]]의 개신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또는 숭실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숭실중학에서 수학하면서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
 
어린 시절의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어린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
 
그 뒤 체력을 단련하고 무예를 연마하여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혀 호신술로 활용하면서 어린 조만식은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나도록 연마하기도 했다.
 
아버지 조경학은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하며 의리와 절의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역설하였고, 이는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보다 5살 아래인 누이 동생 조은식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는데, 은식은 열일곱에 결혼하여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로 50년을 수절한 후 고고하게 생을 보냈다. 그 뒤 조만식은 평안남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 포목상 경영 ====
 
[[1897년]] 15세 때부터는 포목상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포목상을 경영하다가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1895년]] 그는 부모의 권유로 2세 연상의 박씨(朴氏) 부인과 결혼하였다.
 
첫 아들 조칠숭이 태어났지만 정신박약아였고,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생활 7년 만인 [[1902년]] 그는 첫부인 박씨와 사별하였다. [[1902년]] 전주이씨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 장애아였던 장남 조칠숭은 그의 나이 26세때에 요절하고 말았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조만식은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이끌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섬에 있는 벽도지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그 무렵 고당의 나이 22살 때 피난 생활 중에 급우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 개신교 입문 ====
 
===== 장대현교회 =====
 
조만식은 22세에 [[장로교]]에 귀의하여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폭음으로 건강을 잃어 부모로부터 생활의 절제를 권유받았고 동료 한정교는 그에게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고하였다. [[개신교]]에 입문한 한 후 조만식은 [[한정교]]를 따라 [[평양]] [[장대현 교회]]에 출석했다. 주일 낮에 1천 5백명을 육박할 만큼 신자가 많던 장대현 교회의 교회당에 처음 들어 선 순간 조만식은 거대한 군중들의 분위기를 보고 놀랐다 한다.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인파가 서양 선교사의 예배집례에 따라 열광적으로 노래하다가, 다시 온 무리가 함께 부르짖기도 하는 광경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처음 [[개신교 예배]]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며칠 밤을 잠못이루다가 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면서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
 
===== 숭실학교 재학 시절 =====
 
놀기를 좋아하고, 대주가(大酒家)로 용맹을 떨칠 정도였던 조만식은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직후 술과 담배를 끊고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05년]]초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년사경회를 통해 감화받은 조만식은 3월이 되자 고당은 숭실 중학교에 입학을 결심, 아버지를 여러 번 설득한 끝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숭실중학교에 원서를 제출시 초라한 몰골 때문에 배위량 박사 등이 거절하였으나 여러번의 설득으로 [[1905년]] 그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 금욕주의 =====
 
숭실중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일한[[윌리엄 M. 베어드|배위량]] 박사는 [[한국]]인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폐단이 많은 것을 보고 학교의 교칙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술이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철저하게 금주 교육을 시켰던 것이며, 수업중에 술 주(酒)라고 써야할 대목이 나오면 그 글자를 일부러 피하여 ○표로서 술 ‘주’자를 썼다.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자 은사였던 배위량 박사와 박자중 교사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박자중 교사는 조만식이 숭실중학교 재학 중이던 [[1906년]] [[6월 21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교외의 인물로는 [[안창호|도산 안창호]]와 [[이승훈 (1864년)|남강 이승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에 다니며 [[금연]]과 [[금주]]를 결심하였으나, 술과 담배 습관을 완전히 끊기 어려워 그는 급우들과 망을 보면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켜서 여러번 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조만식은 [[금연]]·금주에 성공했고 그 후 40년을 일체 금주, 금연하면서 지조를 지켰다.
 
 
 
=== 청년기 ===
 
==== 일본 유학 ====
 
[[숭실중학교]] 재학 중 그는 시내에서 [[평양]]의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의 활동과 강연, 기독교 민족지도자 [[안창호]] 등의 활동과 연설을 우연히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받은 그는 실력을 양성하는 길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한다.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0년]]까지 [[세소쿠가쿠엔 고등학교|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 와 [[수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 [[마하트마 간디|간디]]의 일대기인 '간디전'을 읽었으며 영어를 공부하던 도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주창한 [[인도주의]]와 [[무저항주의]], [[민족주의]]에 관한 글을 공감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그 뒤 심지어 복장이나 삶의 스타일까지 [[마하트마 간디|간디]]풍을 즐겨 따라하였으며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주의]]의 실천과 [[마하트마 간디|간디]] 정신을 따라 매사에 스스로 절제하려 노력하였다. 한편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국내 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후원하기도 했다. [[1910년]]봄 [[세소쿠가쿠엔 고등학교|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校) [[전문대학|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때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을 만나 친구관계를 형성하였다.
 
 
 
일본 [[도쿄]] 유학 시절 조만식은 '동경한인교회'의 영수로 [[기독교청년회]]의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영수로 시무한 장로교단 소속의 동경한인교회를 [[1911년]] 여름, [[백남훈]],[[김영섭]]등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교회(재일본 동경조선예수교연합교회)로 개편하였다. 이는 [[1909년]] 5월 한인 장로교회가 설립된 이후 하나둘씩 늘어난 감리교회 출신 유학생들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격하고, 이국땅에서 교파 문제로 개신교인들이 분열된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더불어 조만식은 지방별로 나뉘어 따로 놀던 동경 유학생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망국적인 지방할거주의 문제를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묻지말자"고 외치며 [[전라도]] 출신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경기도 출신의 [[안재홍]]과 힘을 합해 [[1911년]] 겨울, 출신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회를 구선유학생친목회로 통합하였다. 조선유학생친목회는 창립 몇 달 만에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지만, [[1913년]] 가을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발족으로 이어지며 뒷날 [[2.8 독립선언]]의 디딤돌이 되었다.
 
|저자=장규식
 
|제목=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날짜=2010-8-20
 
|출판사=일조각
 
|출판위치=서울
 
 
 
 
 
일본 도쿄 유학 중 [[1910년]] 여름 조만식은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머무르고 있을 때 [[8월 29일]] 치욕스러운 한일합방에 분노를 느낀 그는 시내의 한일합방 경축식과 일본의 신사에서 신을 모셔오는 행사장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다가 아버지 조경학이 계속 간곡히 만류하여 그만둔다.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격정을 참은 그는 참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을 다녔다.
 
 
 
==== 계몽·사회 활동 ====
 
{{참고|물산장려운동}}
 
 
 
====== 오산학교 이야기 ======
 
[[1913년]] 3월 31살의 늦은 나이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시|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오산학교는 설립자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학교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위기에 놓여 있던 때였다. 조만식은 그런 학교에 부임하여 봉급도 받지 않고 [[교사]]로, 교장으로 만 8년 동안 모두 3차례 걸쳐 봉직하면서 학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3.1운동이야기 ======
 
[[1919년]]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 (1864년)|이승훈]]을 필두로 교사와 직원에 이르기까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도 교장직을 사직하고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수배되어 피신, [[1919년]] [[3월 4일]]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 동료 [[도인권]]과 함께 평양을 떠나 국내를 탈출, [[상해]]로 망명하려던 중, [[평안남도]] [[강동군|강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추격을 받았다. 도인권은 미리 몸을 피했으나 그는 체포되어 평양에 압송되었고,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가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자 아버지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졸도하였다.\ 집에서는 가장의 인사불성으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으나 얼마 후 아버지 조경학은 병석에서 일어났다.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그가 수감된 [[평양형무소]]에 가 형무소 주변을 한바퀴씩 돌았다고 한다.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만식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취사장의 위치를 물은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갔다. 형무소 취사장에서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직접 시식하고는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뭐, 이만하면 견딜만하겠다 하며 아들을 면회하게 되었다.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염려의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아들의 안부를 묻고는 이정도의 식사면 건강에 지장이 없으니 잘 이겨내라며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참고 견딜 것을 주문하였다. 아버지 조경학은 외아들에 대한 걱정을 감추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 민족자본 ======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한 후 [[1920년]] [[1월]]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 두고 가석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가석방 소식은 감방 내에서 경사와 같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형을 단호하게 거절, "10개월 동안 수감된 것 자체가 불법인데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은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가출옥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잔여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석방조치 되었다. 평양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조만식은 다시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20년 [[10월]] 오산학교 교장직에 취임하였다.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고,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에 선출되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산정현교회에서 [[장로 (기독교)|장로]]가 되어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등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다해 일할 때에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산정현교회에선 예배에 늦으면 [[교회]] 문앞에 있어야 했는데, 고당 조만식 선생도 공동체의 [[규칙]]을 존중하여 [[예배]]에 늦으면 스스로 서 있었다.[[1922년]]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부회장으로는 저명한 [[변호사]]였던 [[한근조]]를 찾아가 초빙해서 영입하였다. 평양 YMCA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의 간디”로 불리었다. YMCA 청년회를 중심으로 그는 YMCA내에 장,감여합 저축조합을 조직하였고, 자본을 모아 [[평양 양말]]회사를 설립하여 한민족이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나도록 애쓰기도 하였다.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
 
==== 민립대학 설립 운동 ====
 
 
 
 
 
[[1923년]]에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 [[고하 송진우|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 조직에 동참하였다. 연정회의 구성 목적은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 목적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바로 숭인중학교(崇仁中學) 교장에 취임하였다.<ref name="건국영웅1"/>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과 압력 끝에 1926년 숭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1년]] [[평양시|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하였다.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되면서 그는 [[평안도]]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21년]]부터 [[1932년]] 평양 YMCA 총무직을 지내는 동안 그는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전역을 근거지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자신이 구상한 '풀뿌리 민족운동'을 실천에 옮겨 나갔다. 조만식은 YMCA를 거점으로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하였고, 물산장려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개신교계와 상공업계,교육계,여성계,청년계를 하나의 '네트워크'식으로 엮어나갔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가했다. [[1927년]] 평양지역의 [[신간회]] 조직 활동에 적극참여하고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었다.
 
 
 
==== 실력양성운동 ====
 
[[1929년]] 평양에 공회당이 설립되자 참석하였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공회당의 명칭을 '[[백선행]] 기념관'이라고 명명하였다.
 
[[1929년]] 인파를 모아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광주만세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대 이후로 잡지 삼천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2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직을 사퇴했다. [[1932년]]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이 출감하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서 그를 사장으로 임명하였고 조만식은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경성부]]로 활동무대를 옮겨 사장직을 맡았다. 조선일보의 사장이 되자 편집국장에 주요한(朱耀翰), 전무겸 영업국장에 조병옥을 임명했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자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온데다 [[경성부]]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 악화와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하게 되었다.<ref>《한국사 시민강좌 47집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12人》, [[일조각]], p145</ref>
 
 
 
[[조선일보]] 사장직에 물러난 이후 조만식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물산장려회]]와 관서체육회의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역사회의 대소사를 챙겨 활동했다. 한편 [[이봉창]]·[[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자, [[여운형]], [[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갖고 출입하였다.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보천교를 통해 종교자금 명목으로 모금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만식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출입한 이후,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만식이 출입한 이래 조만식 외에도 [[한규숙]]·[[장덕수]]·[[최팔용]]·[[송진우 (정치인)|송진우]]·[[백관수]]·[[조병욱]]·[[신석우 (1895년)|신석우]]·[[김철수]]·[[김철수]](동명이인)·[[안재홍]]·[[백남훈]]·[[설태훈]]·임모, 김모 등이 보천교에 출입하게 되었다.《한국민족운동과 종교》(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편, 국학자료원, 1998) 389페이지 이 외에도 그와는 동명이인인 조만식(趙晩植)도 보천교에 가담하였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韓圭淑)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 원을 독립 군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조선총독부]] [[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다. 조만식과 [[한규숙]]이 체포된 원인은 그들과 함께 권총 2자루를 소지하고 있다가 검거된 '상해 밀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함께 관여한 월곡의 후손들은 보천교에 있다 체포된 사람은 고당 조만식이 아닌 1936년에 신의주에서 사망한 동명이인 이라 증언하였다.
 
 
 
==== 사회단체 활동 ====
 
1932년 조만식은 [[평양]]의 [[을지문덕]]묘소를 돌보면서 '을지문덕장군 묘 수보회'(墓修保會)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평양 고아원 및 양로원, 인정도서관 개관 등에도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3년]] [[백선행]]이 사망하자 조만식은 [[평양시|평양]] 시민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장례식에 참여하여 애도하였다.이수광, 귀신이 되어서라도 팔아라 (밀리언하우스, 2007) 82페이지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 여사가 별세하였다. 그 뒤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때 주변의 소개로 옛 제자인 [[전선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선애는 이 무렵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정진홍 《완벽에의 충동》 (21세기북스(북이십일), 2006) 239페이지 다시 만난지 3개월 만인\ [[1937년]] 봄 조만식은 [[전선애]]와 결혼하였다.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면서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던 [[전선애]]는 조만식과 결혼하게 된 동기로는 조만식의 인품을 보고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1936년]] 공석인 목사를 대신하여 산정현 교회의 일을 보고 있던 조만식은 목사가 된 제자 [[주기철]]에게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은사의 부탁을 받은 [[주기철]]은 곧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다.
 
 
 
 
 
이무렵 [[안창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송환되었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에게 문안인사차 찾아다녔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평양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탄압이 지속되자, 조만식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에 이송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20여일만에 풀려났다. [[1938년]] [[2월 2일]] 딸 조선영(趙善英)이 태어났다.
 
 
 
 
 
=== 정치 활동 ===
 
==== 해방 직후의 정치활동 ====
 
=== 죽음 ===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1908년)|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한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 사후 ===
 
[[1970년]] [[8월 15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1965년]] '고당의 날' 기념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고당경모회'행사가 거행되었다. [[1966년]] 평남민보사 발행으로 일대기인 <고당조만식>이 발간되었다. [[1976년]] [[1월 21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초대 회장 [[한경직]](韓景職), 상임위원장 [[박재창]](朴在昌))가 창립되었다. [[1976년]] [[12월 7일]]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2년]] [[10월 20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국립묘지]]에서 열린 고당선생 추모-안장식때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 [[1993년]] [[8월 23일]] '고당조만식선생 물산장려운동73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1995년]] [[10월]] 저서 고당조만식회상록 이 출간되었다. 현재 [[서울]] [[능동 (서울)|능동]] [[어린이대공원]]과 [[경기도|경기]] [[파주시|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0년]] [[3월 27일]] 후처 [[전선애]]가 사망하자 국립묘지 조만식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 매년 [[10월 16일]]~[[10월 17일]] 사이에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 이력 ==
 
* [[1888년]] 서당에서 한문 수학
 
* [[1895년]] 첫 번째 부인 박씨와 결혼
 
* [[1897년]] 장사에 종사하기 시작
 
* [[1899년]] 아들 칠숭(七崇) 태어남
 
* [[1902년]] 첫 부인 박씨 사망, 전주이씨 이의식(李義植)과 재혼
 
*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경성부]]와 [[평양시|평양부]]에서 강연, 조만식은 안창호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들었음
 
* [[1909년]] 아들 칠숭 사망
 
* [[1910년]] [[3월]] [[일본]] [[도쿄]]에서 메이지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
 
* [[1910년]] [[음력 3월 25일]] 장녀 조선부(曺善富) 출생.
 
*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축하하는 평양 거주 [[일본]]인 행사에 반발, 일본인 행사를 방해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둠.
 
* [[1911년]] [[일본]] [[도쿄]]에 재일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고 신자 대표직을 맡았다. 이무렵 고하(古下)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인촌(仁村) [[김성수 (1891년)|김성수]]등을 만나 자주 교류하였다.
 
* [[1913년]] [[4월]]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부임하였다.
 
* [[1914년]] [[5월 20일]] 아들 조연명(曺然明) 태어남
 
* [[1916년]] [[음력 5월 15일]] 딸 조선희(曺善姬) 태어남
 
* [[1919년]] [[2월]] 오산중학교 교사직을 사임
 
* [[1919년]] [[3월 3일]] [[3.1운동]]의 영향으로 평양 모락시장(沙川市場)에서 모락시장 만세사건이 일어나,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 [[1919년]] [[3월 4일]] 3.1운동 직후 대사명을 띠고 도인권(都寅權)과 [[상해임시정부]]로 향하던 중 [[평안남도]] 강동군 열패에서 [[일본]] 헌병 보조원을 사칭하는 자에게 붙잡힘, 헌병 보조원의 밀고로 [[평양형무소]]에 투옥.
 
* [[1920년]] [[8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함
 
*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로 선출
 
* [[1920년]] [[9월]] 서울 형무소에 가서 남강(南岡) 이승훈을 면회
 
*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
 
* [[1932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를 사퇴
 
* [[1932년]] [[6월 15일]] 제8대 [[조선일보]] 사장 취임
 
* [[1933년]] [[7월 18일]] 조선일보 사장 사임
 
* [[1935년]] [[8월 27일]]~[[8월 30일]] 금강산 장안사 방문
 
* [[1936년]] [[마산]]에 내려가 [[오산학교]] 시절 제자인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 [[1936년]] [[8월 18일]] 딸 조선희(曺善姬), 강의홍(康義弘)과 결혼.
 
* [[1936년]] [[4월]] 잡지 《삼천리》지에 <생산과 소비의 우리의 각오>라는 논설을 발표.
 
* [[1937년]] [[조선총독부]] [[조선군 (일본 제국)|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순시차 평양에 들러 그를 만나고자 했을 때, 그는 만나주지 않고 [[강서군|강서]]로 피신했으며, 끝까지 한복을 고수하였다.
 
* [[1942년]] [[11월 14일]] 아들 조연수(曺然守) 출생
 
* [[1943년]] [[8월 14일]] 맏사위 정재윤(鄭在允) 41세로 사망
 
* [[1943년]]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 협조 거부
 
== 저서 ==
 
* 《고당 조만식 회상록》(1995, 고당조만식기념사업회)
 
 
 
== 가계 ==
 
* 아버지 : 조경학(曺景學, ? ~ [[1930년]] [[음력 4월 14일]])
 
* 어머니 : 경주김씨 김경건(金敬虔, ? ~ [[1931년]] [[음력 4월 14일]])
 
** 여동생 : 조은식([[1887년]] ~ ?)
 
* 처 : 박씨(朴氏, [[1880년]] ~ [[1903년]])
 
** 첫째 아들 : 조칠숭(曺七崇, [[1899년]] ~ [[1909년]])
 
* 처 : 이의식(李義植, [[1885년]] ~ [[1935년]])
 
** 둘째 아들 : 조연명(曺然明, [[1914년]] [[5월 20일]] ~ 1989년)
 
** 셋째 아들 : [[조연창]]
 
** 첫째 딸 : 조선부(曺善富, [[1910년]] [[음력 3월 25일]] ~ )
 
** 둘째 딸 : 조선희(曺善姬, [[1916년]] [[음력 5월 15일]] ~ )
 
** 사위 : [[강의홍]]
 
* 처 : [[전선애]](田善愛, [[1904년]] [[9월 22일]] ~ [[2000년]] [[3월 29일]]),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조만식의 제자이자 후처.<ref name="한겨레1" />
 
** 넷째 아들 : [[조연흥]](曺然興, [[1940년]] [[2월 6일]] ~ ) 언론인·[[조선일보]]사 이사 역임<ref>조연흥은 [[1967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38년간 근무하고 [[조선일보]] 사회부장, 제작국장, 전무이사 등을 지냈으며 [[2005년]] 정년퇴임했다.</ref>
 
** 다섯째 아들 : 조연수(, 고당조만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셋째 딸 : 조선영
 
 
 
== 기타 ==
 
=== 조만식을 연기한 배우들 ===
 
* [[박종관]] - [[1981년]] ([[제1공화국 (드라마)|제1공화국]]) [[MBC]] 드라마
 
* [[박웅]] - [[1991년]] ([[여명의 그날]]) [[KBS]]1 드라마
 
 
 
== 참고 문헌 ==
 
* [[조영암]], 《고당 조만식》, 부산(釜山), 정치신문사(政治新聞社), 1953.
 
*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편,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서울,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 1966.
 
* 한근조, 《위대한 한국인-조만식》, 태극출판사, 1973.
 
* 김교식, 《한국의 인물:조만식》, 계성출판사, 1984.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http://narasarang.mpva.go.kr/data/downloadFile.asp?filename=monthhero\199302_1.hwp 이 달의 독립 운동가 상세자료 - 조만식], 1993년
 
* 고당기념사업회 편, 《고당조만식회상록》, 조광출판사, 1995.
 
* 송삼용, 《고당 조만식(하나님이 보낸 사람 민족지도자)》, 생명의말씀사, 2006.
 
* 찰스 암스트롱 저, 김연철 역, 《북조선 탄생》, 서해문집, 2007.
 
* 정연선, 《한국정치특강: 한국정치특수주제》, 숭실대학교출판부, 2009.
 
* 고당 기념사업회, 《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 조만식 전기》,  기피랑, 2010년
 
* 《[http://www.yes24.com/24/goods/4130859?scode=032&OzSrank=1 한국사 시민강좌: 47집(2010년) - 특집,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 장규식 저. p.135~148
 
 
 
== 같이 보기 ==
 
{{col-begin}}
 
{{col-3}}
 
* [[물산장려회]]
 
* [[건국준비위원회]]
 
* [[건국동맹]]
 
* [[주기철]]
 
* [[안재홍]]
 
* [[여운형]]
 
* [[물산장려운동]]
 
* [[민립대학기성회]]
 
* [[여운형]]
 
* [[김성수 (1891년)|김성수]]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 [[김병조]]
 
* [[주기철]]
 
* [[이상재]]
 
* [[김두봉]]
 
{{col-3}}
 
* [[안창호]]
 
* [[유영모]]
 
* [[윤치호]]
 
* [[이승훈]]
 
* [[함석헌]]
 
* [[오영선]]
 
* [[우덕순]]
 
* [[신간회]]
 
* [[신탁통치 반대운동]]
 
* [[조선민주당]]
 
* [[스티코프]]
 
* [[김규식]]
 
* [[김구]]
 
* [[이승만]]
 
* [[김원봉]]
 
{{col-3}}
 
* [[한국 전쟁]]
 
* [[한근조]]
 
* [[이윤영 (1890년)|이윤영]]
 
* [[함태영]]
 
* [[장준하]]
 
* [[장면]]
 
* [[이유필]]
 
* [[백선엽]]
 
* [[백인엽]]
 
* [[최기일]]
 
* [[김석창 (1876년)|김석창]]
 
* [[김예진]]
 
*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col-end}}
 
 
 
== 각주 ==
 
{{각주|30em}}
 
 
 
== 외부 링크 ==
 
 
* [http://godang.goorm.net/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godang.goorm.net/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choga.wo.to/choga8/choga8-1.htm 조만식 연보]
 
* [http://choga.wo.to/choga8/choga8-1.htm 조만식 연보]
241번째 줄: 7번째 줄:
 
*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9215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 59주기 추모식]
 
*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19215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 59주기 추모식]
  
{{1993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
 
{{조선미디어그룹}}
+
[[분류:1883년 출생]]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분류:1950년 사망]]
[[분류:1883년 태어남]]
 
[[분류:1950년 죽음]]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형된 사람]]
 
[[분류:화기에 죽은 사람]]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범죄 피해자]]
 
[[분류:반일 감정]]
 
 
[[분류:반공주의자]]
 
[[분류:반공주의자]]
 
[[분류:한국의 반전 운동가]]
 
[[분류:한국의 반전 운동가]]
264번째 줄: 24번째 줄: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한국의 군정기]]
 
[[분류:조선인민공화국]]
 
[[분류:건국준비위원회]]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분류:조선일보사|조만식]]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분류:유교 이탈자]]
 
[[분류:한국의 장로교도]]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신교도]]
 
[[분류:조만식| ]]
 
[[분류:여운형]]
 
[[분류:함석헌]]
 
[[분류:김규식]]
 
[[분류:김구]]
 
[[분류:이승만]]
 
 
[[분류:숭실학당 동문]]
 
[[분류:숭실학당 동문]]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286번째 줄: 30번째 줄:
 
[[분류:창녕 조씨]]
 
[[분류:창녕 조씨]]
 
[[분류:평안남도 출신]]
 
[[분류:평안남도 출신]]
[[분류:평양 소련군정 관련자]]
 
 
==작성자 및및 기여자==
 
[[분류:인물]] [[분류:작성자 이서영]]
 

2022년 6월 15일 (수) 15:01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