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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font-size: 70%;"><span style="color:gray">기로세련계도, 김홍도.|독상을 설명하기 위해 넣은 참고사진.|소반-국립중앙박물관.</span> <br/>
 
  <span style="font-size: 70%;"><span style="color:gray">기로세련계도, 김홍도.|독상을 설명하기 위해 넣은 참고사진.|소반-국립중앙박물관.</span> <br/>
 
 
*<span style="font-size: 125%;">'''중인의 주식''' </span>
 
*<span style="font-size: 125%;">'''중인의 주식''' </span>
 
<span style="background:#F0FFFF"><span style="font-size: 110%;">주식으로는 쌀, 보리, 콩, 완두, 기장, 조, 피 등이 있으며</span> <span style="background:white"><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gray">부식으로는 육류, 어패류, 채소류, 과일류가 있었다. 젓갈의 종류도 다양했으며 (새우, 오징어, 굴 등) 김치도 여러 가지 젓갈로 담아 맛이 다양했다. 신분상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중인들은 외국의 음식 (일본, 중국)도 적극 수용하였다.</span> <br/>
 
<span style="background:#F0FFFF"><span style="font-size: 110%;">주식으로는 쌀, 보리, 콩, 완두, 기장, 조, 피 등이 있으며</span> <span style="background:white"><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gray">부식으로는 육류, 어패류, 채소류, 과일류가 있었다. 젓갈의 종류도 다양했으며 (새우, 오징어, 굴 등) 김치도 여러 가지 젓갈로 담아 맛이 다양했다. 신분상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중인들은 외국의 음식 (일본, 중국)도 적극 수용하였다.</span>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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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background:white"><span style="color:gray"><span style="font-size: 100%;">지방의 아전들의 경우에도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의·역 등의 기술관인 경우에는 지방에 집중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지방에서 중인촌 혹은 중촌이라고 할 때는 대체로 지방 아전들의 거주지를 지칭한다.
 
<span style="background:white"><span style="color:gray"><span style="font-size: 100%;">지방의 아전들의 경우에도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의·역 등의 기술관인 경우에는 지방에 집중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지방에서 중인촌 혹은 중촌이라고 할 때는 대체로 지방 아전들의 거주지를 지칭한다.
 
*<span style="font-size: 125%;">'''중인촌'''</span> <span style="color:gray"><span style="font-size: 95%;">중촌(中村)</span> <br/>
 
*<span style="font-size: 125%;">'''중인촌'''</span> <span style="color:gray"><span style="font-size: 95%;">중촌(中村)</span>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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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촌.jpg]]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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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70%;"><span style="color:gray">중인들의 청계천-서울시설공단 제공.</span>
 
<span style="background:#F0FFFF"><span style="font-size: 110%;">≪비변사등록≫의 영조조에 조종의 제도에 중인에게 서울의 조시 근처에 머물러 살게 하여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게 함에서 유래되었다.</span> <br/>
 
<span style="background:#F0FFFF"><span style="font-size: 110%;">≪비변사등록≫의 영조조에 조종의 제도에 중인에게 서울의 조시 근처에 머물러 살게 하여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게 함에서 유래되었다.</span> <br/>
 
<span style="background:white"><span style="color:gray"><span style="font-size: 100%;">여기에서 조시 근처란 청계천의 육교(여섯 번째 다리.) 부근으로, 조선 초 이래로 기술직 종사자들이 살기 시작하여 기술관들의 집중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특히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이 많이 살고 있었다. 청계천 사람들은 상류 양반사대부 계층이 아닌 시전상인, 역관, 의관과 같은 기술직 관료, 하급군인과 기생, 거지와 같은 조선시대 신분구조 상 기층을 이루는 중하층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span style="background:white"><span style="color:gray"><span style="font-size: 100%;">여기에서 조시 근처란 청계천의 육교(여섯 번째 다리.) 부근으로, 조선 초 이래로 기술직 종사자들이 살기 시작하여 기술관들의 집중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특히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이 많이 살고 있었다. 청계천 사람들은 상류 양반사대부 계층이 아닌 시전상인, 역관, 의관과 같은 기술직 관료, 하급군인과 기생, 거지와 같은 조선시대 신분구조 상 기층을 이루는 중하층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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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2157 ''소반''-국립중앙박물관]
 
*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2157 ''소반''-국립중앙박물관]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03_0040_0020_0020 ''한국 문화사, 조선 중기 한양 산업의 동요와 재편''-국사편찬의원회, 고동환, 2001~2011]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03_0040_0020_0020 ''한국 문화사, 조선 중기 한양 산업의 동요와 재편''-국사편찬의원회, 고동환, 200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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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916 ''중인촌 (中人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s://www.sisul.or.kr/open_content/cheonggye/intro/life4.jsp ''중인들의 청계천''-서울시설공단]
 
* [https://www.sisul.or.kr/open_content/cheonggye/intro/life4.jsp ''중인들의 청계천''-서울시설공단]

2023년 6월 17일 (토) 18:53 기준 최신판

중인의 정의

중인이란?

조선 시대 양반(23)상민 사이의 중간 신분 계층.
중간 정도의 품격이나 재산을 가진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신분 재편성기인 조선 초기에는 사실상 없던 계급이나, 조선 후기에 신분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전문직과 비슷한 의미로 쓰여진다.

양반에게는 천대받았고, 상민과 천민들조차 계급 상 윗 신분인 중인을 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중인의 이름 뜻에는 크게 두 가지 주장으로 나뉘어지는데, "거주지가 서울의 중심부여서 중인이다."라는 주장과 "당론에 가담하지 않는 중립자."여서 중인이다라는 두 가지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중인층은 복잡하게 구성되어 쉽게 일반성을 찾기 어려운데, 대체로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고 상민보다는 우위에 있던 조선 시대의 중간 신분이라든가,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상민에서 상승한 자들이라는 것은 공통된 점이다. 이들이 관직에 진출하여도 승진에 제한을 두었고, 문과 응시 또한 제한되었다.


중인의 종류

중인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는 기술관행정실무자로 나뉜다.

우선 서울의 중심가에 살던 역관 · 의관 · 산관 · 율관 · 음양관 · 사자관 · 화원 등 기술관이 있고, 향리 · 아전· 서리 · 녹사 · 서얼 · 토관 · 장교 · 역리 · 우리 · 목자 등 경외의 행정실무자가 있다.

중인 종류 각 중인 이름
기술관 역관 · 의관 · 산관 · 율관 · 음양관 · 사자관 · 화원
행정실무자 향리 · 아전· 서리 · 녹사 · 서얼 · 토관 · 장교 · 역리 · 우리 · 목자

중인의 의

중인의 옷

  • 철릭 天翼(천익)’, ‘帖裏(첩리)’, ‘帖裡(첩리)

철릭.jpg

구름과 보배무늬 철릭(雲寶紋緞帖裏), 조선 16세기 중기~16세기 초기, 길이 113.0cm, 화장 120.0cm, 신수15051

철릭2.jpg

<동래부사접왜사도> 조선후기, 세부.

얼핏 보면 양반들이 입던 도포와 비슷하지만, 양옆이 트여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있는 겉옷이다.

철릭은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전래된 옷으로 상의와 하의를 따로 재단하여 허리 부분에서 주름을 잡아 연결한 남자의 겉옷이다. 몽고족이 입던 여러 형태의 옷 중의 하나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또는 왕의 궁궐 밖 거동을 호위할 때 착용하는 융복이었으나, 점차 일상적으로 입는 평상복이 되었다. 철릭은 시대에 따라 상의와 하의의 비율, 주름을 처리하는 방법, 소매의 모양에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상의와 하의의 비율이 1:1로 거의 같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하의 부분이 길어진다. 또 임진왜란 이후에는 소매 폭이 점차 넓어지고 촘촘했던 허리 주름의 간격이 넓어졌다. 철릭 위에 답호를 걸쳤다.

  • 답호

답호.jpeg

조선시대 16세기,용인시 어비리 심수륜(1534~1589) 묘.

조선시대 단령과 직령 아래, 또는 철릭 위에 입는 옷이다.
깃과 무의 형태는 직령과 같으나 반소매 옷이다.
녹사, 서리, 생도는 옷깃을 둥글게 만든 단령을 입었고, 옷깃이 곧은 직령은 중앙 문지기인 별감, 수종인 조례, 시골의 아전이 입었음.


  • 술띠

술띠.jpg

강세황 자화상.

선명하게 허리를 강조한 남자 허리띠.
양반들의 전유물인 술띠가 있었는데, 중인들도 이를 착용했다고 한다. 술띠는 옷을 단정히 하는 구실도 있지만, 장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신분을 구별하는 표식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중인의 식

중인의 식

  • 중인의 상차림

독상 차림이지만 매우 소박한 반상(주로 3첩) 차림.
식탁으로는 소반을 사용했다.

독상.jpg 3첩반상.jpg
소반.jpg

기로세련계도, 김홍도.|독상을 설명하기 위해 넣은 참고사진.|소반-국립중앙박물관. 
  • 중인의 주식

주식으로는 쌀, 보리, 콩, 완두, 기장, 조, 피 등이 있으며 부식으로는 육류, 어패류, 채소류, 과일류가 있었다. 젓갈의 종류도 다양했으며 (새우, 오징어, 굴 등) 김치도 여러 가지 젓갈로 담아 맛이 다양했다. 신분상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중인들은 외국의 음식 (일본, 중국)도 적극 수용하였다.

중인의 주

중인이 살던 곳

  • 한양 중심지

주로 역관·의관·산관·율관·화원 등의 기술관들이 한양 중심지에서 살았다.
한양의 상업 체제는 17세기 후반 이후 국제 교역의 활성화를 계기로 크게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전개된 청-조선-일본의 국제 교역은 곧 중국과 일본의 직접 교류가 봉쇄되어 전개된 조선 상인의 중개 무역이었다. 조선 상인은 중국의 비단을 수입하여 이를 일본 상인에게 은화를 받고 수출했고, 이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중개 무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부는 대부분 한양의 역관 계층에게 집적되었다.

  • 경외 지역

향리·서리·역리 등의 행정실무자들은 경외 지역에서 일했다.
지방의 아전들의 경우에도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의·역 등의 기술관인 경우에는 지방에 집중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지방에서 중인촌 혹은 중촌이라고 할 때는 대체로 지방 아전들의 거주지를 지칭한다.

  • 중인촌 중촌(中村)

중촌.jpg

중인들의 청계천-서울시설공단 제공.

≪비변사등록≫의 영조조에 조종의 제도에 중인에게 서울의 조시 근처에 머물러 살게 하여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게 함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에서 조시 근처란 청계천의 육교(여섯 번째 다리.) 부근으로, 조선 초 이래로 기술직 종사자들이 살기 시작하여 기술관들의 집중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특히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이 많이 살고 있었다. 청계천 사람들은 상류 양반사대부 계층이 아닌 시전상인, 역관, 의관과 같은 기술직 관료, 하급군인과 기생, 거지와 같은 조선시대 신분구조 상 기층을 이루는 중하층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참고 문헌 및 출처

참고 문헌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