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백악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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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2월 25일 (금) 16:13 판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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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 (태조5)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른다.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514년이라는 기간 동안 가장 오래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성벽 돌에 새겨지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달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같은 사대문이 있으며 혜화문, 소의문, 광화문, 창의문이 사소문으로 구분된다.

그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으며 2014년까지 도성의 전체 구간의 70%가 옛모습과 가깝게 복원 및 정비되었다.

백악구간

백악구간은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4,7KM 길이 구간으로 약 3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백악(북악산,342m)은 옛 서울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을 기점으로 축조되었으며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구간 주요지점으로 창의문, 백악마루, 1·21 사태 소나무, 암문 밖 순성길, 백악 곡성, 숙정문(肅靖門), 북촌한옥마을, 북정마을, 혜화문(惠化門),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등이

벡악구간에 자리잡고, 지금까지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치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하고,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체계를 반영한 계획도시이다.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그 축성과정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있다.

내사산의 능선과 평지를 아우르는 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지형과 조화롭게 건설되었으며,

도성 사람들의 놀이 장소이자 문학·회화·민속의 배경의 되어 왔다.

오늘날 한양도성은 천만 도시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성곽 안과 밖

한양도성은 일차적으로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였으나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구실도 하였다.

도성 안에서는 채석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모두 성 밖에서 조달해야 하였다.

성벽은 비록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의 능선 위에 쌓였으나, 그 돌들은 북한산과 아차산 등지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한양도성은 이렇게 내사산과 외사산을 연결하고,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통합하였다.

성곽 안은 조선시대 부터 어느정도 재산이 있는 부유층이 거주했으며, 개화기 이후에도 사업을 갖고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거주가 많았다.

그중 백악구간의 성곽을 담벼락으로 사용하며,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저 시민들에게 개방된 공간인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와룡공원 쪽으로 이어진 한양도성의 암문으로 형성된 마을인 북정마을은 현재까지도 주민들의 이동 통로이다.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북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