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전시안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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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2월 24일 (목) 02:14 판 (근현대를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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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를 기록하다

1941년 당시 영화사업을 위해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의 개인주택으로 지어진 목조 건축물이다.

일본식 목조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세얼에 따른 보수공사는 이루어졌어도 양식 그대로를 갖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59년부터 20년간 대법원장 공관으로 4‧19 혁명재판의 판결문이 작성되는 등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1941~1959 개인 주택

1899년 서대문에서 청량리를 연결하는 최초의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가 부설되었다.

192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급증하고 주거지가 외곽으로 확장되면서 전차와 버스는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이 시기에 한인의 주거지가 혜화동 너머로 확장 되었는데,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면서 혜화동에도 몰리기 시작한다.

혜화동은 북촌에서는 드물게 문화주택이 몰려 있던 곳이었다. 문화주택은 서양식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택이었다.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는 영화 제작자였던 일본인 다나카 사부로가 있던 집이다. 이 집은 성곽 위에 지어졌다.

성곽위에 집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1907년 성곽이 해체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해방 후 소유주가 변경되었고 1959년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3명의 개인 거주자가 이 집을 거쳐갔다.

1941~1945: 다나카 사부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사장

1945~1955 하준석: 중추원 참의

1955~1957 손원일: 독립운동가,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 5대 국방부정관

1957~ 1959 한석진: 기업가

현재를 함께하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시민들에게 열린 전시공간으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와 이 곳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미래를 바라보다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