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전시안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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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2월 24일 (목) 02:31 판 (근현대를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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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를 기록하다

1899년 서대문에서 청량리를 연결하는 최초의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가 부설되었다.

192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급증하고 주거지가 외곽으로 확장되면서 전차와 버스는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이 시기에 한인의 주거지가 혜화동 너머로 확장 되었는데,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면서 혜화동에도 몰리기 시작한다.

1941~1959 개인 주택

혜화동은 북촌에서는 드물게 문화주택이 몰려 있던 곳이었다. 문화주택은 서양식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주택이었다.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는 영화 제작자였던 일본인 다나카 사부로가 있던 집이다. 일본식 목조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성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성곽 위에 집을 짓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07년 성곽이 해체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해방 후 소유주가 변경되었고 1959년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하기 전까지 3명의 개인 거주자가 이 집을 거쳐갔다.

1941~1945: 다나카 사부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사장

1945~1955 하준석: 중추원 참의

1955~1957 손원일: 독립운동가,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 5대 국방부정관

1957~ 1959 한석진: 기업가

1959~1979 대법원장 공관

1959년 이후 이 건물은 개인 소유의 주택이 아닌 나라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거주지인 공관이 되었다.

1979년까지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면서, 우리나라 3~4대 대법원장 조진만 판사와 5~6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민복기 관사가 거주하였다.

이곳에서는 혁명제판 판결문을 초고가 작성된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으며, 1971년 검찰과 법원의 갈등으로 불거진 제 1차 사법 파동이 타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입구에 들어서서 1층 서쪽에 위치한 공간이 당시 판결문 작성실로 사용된 방이다.

현재를 함께하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시민들에게 열린 전시공간으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와 이 곳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미래를 바라보다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