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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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팀원들 모두가 활기차다는 장점이 있어 팀 이름을 활기차조로 정하였다.

조원

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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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

루이 15세의 손자로 세자인 루이-페르디낭의 둘째 아들이었다. 1761년 형이, 1765년 부친이 사망하자 11살의 나이에 세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왕자 교육을 받아 라틴어, 지리, 천문학, 이탈리아어, 영어, 역사 등을 배우고 스포츠에도 능통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취미가 자물쇠 만들기였던 것을 보아 소심한 성격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1770년 15살의 나이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프랑스의 숙적으로 여겨 루이 16세의 결혼은 국민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통치 전반기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스무 살이 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다섯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먼저 루이 14세가 만들어 놓은 절대왕정 체계의 정책들을 이완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는 항상 여론을 존중하고 참조하면서 정책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다양한 여론들 중에서 그에게 강한 정치적 압박을 가한 계층은 바로 특권계층인 고등법원의 법복귀족들이었다. 이들은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루이 15세 말기에 추진되었던 모푸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다른 한편 그는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선왕들에 비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1787년 반포된 ‘베르사유 칙령’을 통해 루이 16세는 드디어 프랑스 왕국 내에 비가톨릭교도들, 즉 칼뱅파 개신교도와 루터교도, 유대교도들에게 법적 지위를 보장했고 그들의 신앙 활동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루이 14세 말기부터 내려 온 재정문제였다. 루이 15세 당시 플뢰리 추기경에 의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던 재정문제는 이후 재발된 국제전들, 특히 프랑스의 패배로 끝난 7년 전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튀르고, 말제르브, 네케르와 같은 유능한 행정가들에 의해 왕국의 개혁안들이 추진되었으나 번번이 특권계층들, 특히 고위 성직자와 법복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왕국 내 가장 많은 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에 대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이들에 대한 과세 시도는 폭군의 절대주의적 정책으로 비난받았다.이러한 재정악화 가운데 루이 16세 정부는 7년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1775년에 발발한 아메리카 독립혁명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778년부터 루이 16세 정부는 아메리카 혁명군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 국익을 위해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83년 파리조약으로 북아메리카 13개 주는 독립을 획득했으나 프랑스는 옛 누벨 프랑스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고 전비만을 지출하여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통치 후반기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루이 16세는 1783년 알렉상드르 칼론을 재무총감으로 임명하고 개혁을 추진하도록 했다. 칼론은 각종 토목공사와 자원개발 등에 대규모 투자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왕국 내 모두에게 50분의 1세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1787년 2월 22일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새로운 과세를 제안하였으나 개혁 시행에 실패하고 4월 8일 재무총감에서 사임하였다. 1788년 9월 국가 재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총신분회의 소집이 선포되었다. 특권계층들은 총신분회의를 통해 왕권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으나, 새로운 정치적 주체인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789년 5월 5일 총신분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무산되고, 6월 20일 국민의회가 조직되었다. 7월 14일 파리 민중에 의해 바스티유가 함락되었고, 8월 4일에는 특권계층의 권리가 폐지되는 동시에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반포되었다. 이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어떠한 적극적인 행위도 보이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변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10월 5일 파리 여성들의 베르사유행진 이후 혁명 세력의 감시에 놓이게 되었다. 루이 16세 일행은 1791년 6월 20일 밤에 도주하다 국경 근처 바렌에서 발각되어 25일 파리로 강제 송환되었다. 루이 16세의 도주는 혁명정부와 프랑스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의 도피는 혁명정부에 대한 거부였고, 이는 그나마 입헌군주정의 형식을 통해 그를 왕으로 인정하려던 세력들에게 큰 실망감을 주었다. 대외전쟁은 혁명을 더욱 급진화시켜 나갔고, 1782년 9월 1일 군주정 자체를 폐지하여 프랑스 최초의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이미 8월에 루이 16세는 폐위당해 ‘시민 루이 카페’의 지위로 감금되었다. 그해 12월 루이 16세는 혁명정부에 의해 혁명의 적으로 고발당했고, 1793년 1월 15~17일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1793년 1월 21일 루브르궁 인근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21의 저주

어린 시절 루이 16세는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손자를 걱정한 루이 15세는 점성가를 불러 점을 치게 해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점성가는 “루이 15세는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숫자 21을 조심해야 한다”고 예언을 했다. 이후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왕이 된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에 왕이 된 후에도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21시 전에 잠들거나 21일에는 외출을 삼가했다. 루이 16세는 묘하게도 21세에 대관식이 진행되자 여러 행사를 미루고 칩거에 들어간다. 또 21명 왕족들의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루이 16세가 혁명군에게 사로잡힌 날도 1791년 6월 21일로 숫자 21일이 또다시 일치한다. 1792년 9월 21일 루이 16세는 국민들에게 공개재판을 받게 되며 1793년 1월 21일 사형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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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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