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가족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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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우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2일 (월) 23: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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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노홍우 잡지 표지.jpg 노홍우 잡지 마지막장.PNG

아카이브와 콘텐츠 수업의 일환으로 가족의 구성 과정, 소중한 순간 등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를 제작하였다. 아래에 기재된 내용은 우리 집안의 최고 어른인 박순덕 조모님(1942~)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해당 잡지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결합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 가족 뿐 아니라 작은아버지, 고모에게도 전달하여 해당 가정에도 선순환을 일으키고자 한다.


구술자 정보

노홍우 조모님.jpg

이름: 박순덕

성별: 여성

생년월일: 1942년 12월 25일(양력)

출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년도 내용
1942년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출생. 7남매 중 5번째
1962년 노준식 과의 결혼
1964년 노정애 출산
1966년 노희철 출산
1968년 노명 출산
1980년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에서 상경
1994년, 1997년 손주 노홍민, 노홍우 출생
1997년 남편 노준식 과의 사별
2020년 시어머니 김성례 소천
~ing 감사하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중

할아버지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조부모님 결혼 사진

그런 때는 연애도 안하고 중매하는 세상이었어. 외사촌 언니가 계곡면에서 살고 나는 마산면에서 사는데 언니가 그 계곡에서 장보면서 시어머니 될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이 너무 인자하고 좋아서 언니가 나 중매를 해줘서 시어머니하고 그 집안의 당숙모하고 두 분이서 우리 집에 오셨어. 아침에 와서 차타고 오셔서 우리 동네에 와서 점심 먹고 가시려고 보니까 그 때 차가 없어서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되었어. 그때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한 방에 앉아서 얘기 하고 그렇게 아버지는 주무시러 가고 우리는 안방에서 자는데 아버지가 시부모님하고 이야기를 해보니까 사람들이 너무 인자하고 좋다고, 내 딸 거기 보내면 그래도 잘 아끼고 살겠다고, 사람들이 성품이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고 아버지가 너무 칭찬을 해서 선도 안보고 그래서 시집 안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되었어. 선도 안보고 시집을 가는데 할아버지가 군복 입은 사진 하나 보내줘서 봤더니 살이 뚱뚱하니 쪄가지고 튼실하니 생겼더라고. 세상에도 못생겨서 마음에 하나도 안들었어.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부모 말씀에 순종하고, 묵묵히 일 잘하고 너무 착하셨어. 가정 살아가는 데 아무 불편함 없이 식구들 편하게 해주셨어. 그리고 이제 우리가 농사 짓는 땅이 적고 큰 집에 농사가 많았는데 큰 집 일도 하면서 우리 일도 하면서 열심히 사셨지.


증조모님과 결혼하면서부터 같이 사셨는데 힘든 일은 없으셨나요?

그런 때는 증조할머니하고 산 것은 갈등은 없고 할머니가 나를 많이 생각해주셔서 가정은 편하게 지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고 논밭이 귀해서 우리는 베만 짜서 그것 팔아서 먹고 살고 나물 캐고 그런 것 해서 나물밥이나 거의 죽 그런 거 먹으면서 살고.. 어려워서 힘들었지. 고부갈등은 없었어. 할머니가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셨지. 말 잘 듣고 뭐든지 한번 하면, 보고 잘 한다고 할머니가 칭찬해주셨었어.


아버지를 양육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 있나요?

아빠 양육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는 끼니때 상을 놓으면 아버지 할아버지, 손자들하고 그렇게 상을 차렸는데 아빠가 어려서 국물을 좋아했나봐, 그런데 김치 국이고 뭐 국이 있으면 애기들이니까 자기 입에 맞아서 그것만 그렇게 먹으니까 한번은 증조할아버지가 화가 나가지고 새끼들하고 밥먹으니까 국물 청시를 못한다고 성질을 내셔서 아버지를 들어서 밖에다 던졌어. 아버지도 기억에 있을 것이다.


서울로 상경하게 된 과정과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서울로 상경할 때는 할 형편도 안 되었어, 그때 5월 달에 이 집 들어와 가지고 정월 초 나흗날 나왔거든. 그런데 집 지어놓고 빚만 있으니까 빚만 갚다 자식들은 학교도 못 보내겠다. 그런 생각에 내가 서울로 가겠다고 증조할아버지한테 졸랐지. 근데 할아버지가 절대 못하게 했어. 그런데 우리가 소를 하나 키웠거든. 그래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내가 서울 간다고 조르니까 소 새끼를 같이 가서 팔았는데 60만원을 받았거든, 그 60만원을 다 나를 줬어. 그 돈으로 방 얻고 생활하고 살아라 그러고. 그렇게 새벽에 첫차로 올라오는데 그때는 정월달이라 춥고 서리가 눈같이 하얗게 왔어. 근데 그때 창을 내다보니 어떻게 짠하고 마음이 쓸쓸하니 눈물이 그냥 눈물이 무단히 나오더라. 그래서 할아버지하고 서울에 와서 작은 할아버지 집에 가니까 작은할머니가 밥 차려줘서 밥 먹고, 그날 작은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전세를 얻으려고 복덕방에를 갔는데 복덩방에서 그 50만 원짜리 방 한 칸을 보여줬는데 그 집이 얼마나 좁던지 한 부엌에서 세 집 씩 산거야, 한 부엌에서. 그리고 일을 하려는데 공장은 4만원 주고 파출부는 7만원 준대서 파출부를 했지. 차타고 한양으로 다니면서 착실하니 아무 꾀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착실하게 잘 해주니까 나보고 그 아주머니가 그래.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진짜 흙에 묻힌 보석이라고. 그렇게 살면서 계 들고 열심히 살아가지고 이렇게 살았지. 처음에는 나랑 할아버지랑 올라오고 그 해에 고모랑 아버지가 2학기 시작할 때 올라왔어. 그리고 신정동에 집짓기 1년 전에 증조할머니가 올라오셔서 신정동에서 다 같이 살았어.

신정동 집

지도를 불러오는 중...


아버지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아버지가 직장 들어가서 다니는데 한 번은 결혼을 하겠다고 그래서 나이랑 뭐하는 아가씨냐고 물어보니까 경리국에 있는 경리 보는 아가씨라고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사람이 자기가 겪어보니까 너무 사람이 좋고 마음이 착하고 긍정적이고 누구한테든지 사람을 대하는 것 보면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한다고, 엄마가 편하게 살려면 그런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와야 편하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래 그라고 했더니 데리고 오겠다 그래서 데리고 오라 그랬어. 그랬더니 하루는 데리고 왔더라고, 그런데 증조할머니랑 같이 살았잖아. 증조할머니는 아버지가 멋지고 예쁘다고 할머니는 손에 쥐기도 아까워했지. 그런데 엄마 데리고 와서 인사시키니까 증조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손자는 저렇게 이쁜데 우리 손부 될 사람은 더 안이쁘다.” 그래. 그러니까 아버지가 뭐라는지 아냐? “할머니 여기는 미스코리아 뽑는데가 아니에요. 가족을 만나는 곳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 그러더라고 허허 나는 아무소리 안하고 웃기만 했어. 근데 엄마가 담백하고 좋잖아 사람이. 내가 너희한테 너희 장가가려면 엄마 같은 사람한테만 가라고 그러지.


어머니의 첫인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가식이 없고 그냥 그대로 그 자체가 편했어. 저도 뭐 시어머니다 며느리다 이런 거리가 없고 나도 며느리다 딸이다 그런 거리가 없어. 할아버지가 아버지 분가시키려고 돈 70만원을 모아뒀는데 1년 살고는 할아버지가 밥 드시면서 아버지한테 너희도 이제 1년 되었으니까 나가서 살아라. 엄마도 젊고 할머니도 계시고 그러니까 우리는 셋이 여기서 살 것이니까. 이렇게 나가서 살라고 하니까 아버지는 아무 소리 안하는데 엄마가 뭐라는지 아냐? 안 나가요! 여기 집이 있는데 뭐하러 나가요? 그러드라? 그래서 증조할머니하고 나하고 막 웃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이 사니까 내가 딸보다도 저를 더 생각하지. 딸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 대학 졸업식에서 찍은 조부모님

할아버지는 서울에 와서 열심히 살면서 집을 사고 건축해서 5월 달에 입주해 가지고 1년도 채 안 되어서 딱 1년 만에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가 보니까는 암이라고 선고를 받았어. 병원 생활을 하시다가 10월 17일 날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집 지어 놓고 딱 1년 못 되어서 돌아가셨지. 6월 달에 갑자기 몸이 좀 피곤하다고 해서 한약을 지어 먹었는데 그래도 몸이 피곤하다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니까 암이라고 그래서 아주 그냥 청천벽력. 그냥 정신도 없었지. 갑자기 그렇게 건강하고 아파본적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돼서. 그래서 병원에서 치료하는데 3기가 넘어서 수술을 못 한다고 병원에서 그랬어. 그래도 아버지는 수술을 하려고 애를 쓰고 병원에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까 다른데 한 번 더 가 본다고 하더라고. 근데 거기서도 암 3기고 수술을 하면은 위험하고 해도 오래 못 가고 안 해도 그런다고 했어. 안 하시고 차라리 그냥 고생 안 시킨 것이 낫겠다고 그러는데 이제 아빠는 그래도 해도 똑같고 안 해도 똑같은 해보거나 저 후회 안하겠다고 한다고 그랬지. 그런데 작은 할아버지가 수술을 못하게 했어. 그렇게 아픈데다가 살아있는 동안 고통이나 덜 받아야지 수술해갖고 더 안 좋아지고 고통 받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해 10월 달에 그렇게 그냥 얼른 가셔 버린거야. 딱 1년 만에 가신 거야. 돌아가시는 날 아침 밥 먹으니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불렀어, 그래서 들어가니까 내일 내가 죽을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가는데 증조할머니가 계신 것이, 내가 증조할머니를 이렇게 너한테 짐을 주고 가니까 그것이 너무 힘들고 할머니한테 잘하라고 그러면서 또 엄마한테도 잘해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화가 나던지 아니 죽을 사람 같이 왜 출근하는 아들 불러다가 그런 소리를 하냐고 내가 그러니까 “내일은 죽겠네.” 그래. 그래서 아니 죽을 것을 어떻게 아냐고 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했지 속상해서. 그랬더니 “내일은 죽겠네.” 그래. 그러더니 다음 날 아빠가 출근하고 한 열시 조금 못되었는데 나를 부르더니 “희철이랑 명술이랑 딸이랑 다 부르게” 그래서 왜요? 그러니까 이제 죽겠다고 그래. 작은아버지가 제일 먼저 오고 그 다음에 고모가 오고 그 다음에 아들은 조금 있다 왔는데 교회 식구들이 와서 찬송을 하나 불렀어.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문 열고 들어오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눈을 떠서 보드라? 아버지가 문 열고 들어온 데를 그렇게 보더니 그 찬송이다 끝나고 나니까 그냥 고개가 옆으로 사르라니 움직이면서 아무 소리도 없이 숨도 거칠게 안 쉬고 편하게 그냥 눈 감고 사르라니 고개만 힘이 없이 내려가더라고. 그래서 보니까는 돌아가셨어. 할아버지가 조금 못 다 살고 60에 갔지만 자식들이 커서 가게도 하고 그래서 “나는 시골 가서 산에 댕기면서 노루도 잡고 꿩도 잡고 총 하나 사갖고 와서 그렇게 살란다”고 그랬는데 그냥 아파서 얼른 가셨어, 얼른 가신 것뿐이지 너희들 키우고 사니까 하나도 어렵고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힘들어서 그냥 애기들한테 귀찮게 하지도 않고 그냥 할아버지 살아계신 것 같이 지금까지 편하게 잘 살았지.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감사만 하지. 감사만.


손주가 태어났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손주가 태어났을 때 너무 좋았지. 근데 엄마가 첫째 애기라 애기 낳을 때 아주 엄청 힘들게 낳았어. 그리고 애기가 조그맣게 나왔는데 애기가 태어났을 때 파래가지고 안 울어서 막 아빠랑 우리랑 벌벌 떨고 있는데 의사가 두 발을 손으로 잡고 거꾸로 세워서 궁댕이를 탁탁 세 번 때리니까 그때서 으에엥 하고 울더라, 그래서 우리도 숨 내쉬고 아이고 살았구나 그랬지. 그리고 얼마나 말랐는지 뭐를 안 먹고 컸어. 집에서 뭐 고기 같은 거 삶고 그런 냄새나면 애기가 막 헛구역질을 해. 그래서 밥을 안 먹고 말라서 해남 댁이 “너네 손자는 아프리카 애다. 아프리카 애는 아프리카에서 살아야 되겠다.‘ 그랬는데 유치원에서 라면을 먹었던가봐, 그래서 집에서 라면을 끓여주면 그렇게 라면을 잘 먹더니 애기가 그렇게 라면 먹고 살을 올랐어. 지금도 그렇게 라면을 좋아하잖아. 그리고 또 형이 크고 나니까 너가 두 살 차이로 태어났지. 그래서 너는 엎고 그놈은 걸리고. 너희 있어서 할머니는 할아버지 생각나고 그런 거 없이 너무 행복하게 잘 살았지.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형과 저의 육아를 도맡아 주셨는데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그때는 젊었으니까 괜찮았어, 자식 키울 때는 예쁜 줄 모르고 키웠거든? 근데 손자들은 예쁘기만 하니까 힘든 것도 모르고 그냥 예쁜 것밖에 없었어. 다른 사람들이 그랬어. 애기들이 너무 순하고 아저씨 안 계셔도 그렇게 나보고 행복하게 산다고,


아버지와 저희 형제의 성장과정을 보셨는데 서로 비슷한 점이 있나요?

응. 아버지랑 작은아버지 그때도 싸움을 안 하고 살았어, 남들 보면 형제간에 막 싸우니까 엄마가 막 뭐라 하고 동생이 형도 치고 그런다던데. 우리 친정집에서는 형은 부모하고 똑같다고 오빠는 부모 대신이라고 항상 내가 그렇게 교육을 받고 살았는데 너희는 그런 교육도 안 시켜도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하고 한 번도 안 싸워보고 뭐든지 있으면 나눠 먹고 옷도 서로 나눠서 입고 그랬어. 한 번도 너희도 싸워서 큰 것 못보고 아버지도 그런 것 못보고 너희 지금도 보면 그렇게 장난하고 웃고 그러잖아. 아빠 큰 것이나 너희 큰 것이나 똑같아. 생각해보면 증조할아버지가 그렇게 유하시니까 할아버지도 그렇고, 할아버지가 유하시니까 아버지 작은아버지 너희도 다 똑같아.


증조모님이 돌아가신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아직도 많이 생각나시죠?

형 삼칠일날 찍은 가족사진

지금도 많이 생각나고 지금도 생각하면 짠해. 할머니가 그렇게 아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는데 여기 이사 와서 나가기만 하면 길을 몇 번 잃어버리셨잖아. 길을 잃어버려서 밖에 못 나가니까 얼마나 밖에 나가고 싶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지금도 엄청 짠해. 그리고 신정동에서는 방을 따로 썼지만 이사 와서는 연세가 많다고 내가 같이 한 3년 살아놓으니까 너무 짠해. 증조할머니께서 항상 교회 갔다 오면 세수 딱 하고 머리 딱 빚고 앉아있는 것이 눈에 훤해. 증조할머니가 해년마다 밖에 나가서 그렇게 사진 찍고 좋아했는데 작년에만 안 나갔잖아. 작년에 한번 안 나가고 정월에 돌아가셔서. 지금도 앉아서 이렇게 책 보면 사진이 딱 나 보고 웃고 있으니까 살아계신 것 같이 그래. 내가 지금은 생각하면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이렇게 안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내가 이럴까 싶고.. 언젠가는 누구든지 한번이나 가는데 내가 이렇게 마음이 항상 짠하고.. 얼마나 다니고 싶으셨을까 그 생각이 계속 들더라. 내가 이번날도 아버지한테 증조할머니 더 계셨어도 괜찮은데 돌아가셨다 그랬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생애를 되돌아보니 기분이 어떠신가요?

노홍우 조모님.jpg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가꾸기 안 했으면 시골에서 더 묻혀서 살았을까 모르지. 근데 집 지은 빚 갚으면서 자식들 키우면 자식들 학교 못 다닐까 그런 생각에 털고 나온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잘했고 내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내가 그런 용기가 났을까 싶어. 내가 나올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그 생각이 들고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벌어서 이렇게 집도 사서 살다가 또 이렇게 더 큰 집도 새로 건축해서 살고.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해, 사람이 욕심 없이 정직하니 착하게 살면 다 되는구나 싶어. 너희 키울 때 나쁜 길로 안 빠지고 너무 착하고 그래서 그냥 감사만 해. 집이 좁아서 신경질 내고 식구 많이 살아서 내가 힘들단 생각 한 번도 안 해보고 너무 감사했는데 또 이리 넓은 데로 이사오니까 너무 좋고 그냥 너무 감사해. 너무 감사.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주세요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세상에는 다 이렇게 부모들하고 같이 안 살고 따로 사니까 혼자 산 사람들이 많잖아. 근데 우리는 엄마가 안 나가겠다고 그래서 이렇게 같이 사니까 너무 감사해. 내가 나한테 너는 뭔 복이 있어서 자식들하고 이렇게 늙어서 같이 살면서 날마다 하루하루 재밌게 사냐. 그래. 그러고 혼자 살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가족이 한 번에 사니까 너무 감사해. 그리고 항상 내가 하는 말이 그거잖아. 첫째도 정직 둘째도 정직, 항상 정직하게 살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아시고 남한테 사기치고 내 욕심 챙기고 내 이익을 보려고 해도 그때 그 잠깐 뿐이지 뒤 끝은 안 좋으니까 항상 정직하게 살아라. 나는 항상 식구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해, 엄마도 착하고 아버지도 그러고 한 번도 싫은 소리 안 해보고 너희도 말 잘 듣고 착하게 크니까 너무 감사하기만 하다.


그 외의 이야기

60년대 결혼 풍습

그때는 막 동네 청년들이 신랑오면 부채 뺏는다고 조금 가면 묶어놓고 왜 왔냐고 그러고 신랑이 선물 줄 때마다 부채 뺏는 사람들한테 한 대 맞고. 그리고 그때는 신랑 신부 처음 보는 자리라 너무 어색하니까 신부가 방에 있고 사람들이 그 방에 모여서 신랑을 막 장난을 시켜. 각시를 찾아오라고, 방에 가득 앉아서 신부가 그 안에 있으니까 찾기도, 가기도 힘들지, 사람들이 꽉 차고 앉았고 남자들은 부뚜막하게 앉아서 신랑을 막 달아매고 때리기도 하고 막 엎어놓고 뒤로 손을 묶기도 하고. 그렇게 신랑을 고생을 시켜. 그리고 신랑이 꽃 찾으러 왔다고 하면 무슨 꽃이 찾으러 왔냐고 해. 그 때 할아버지가 인화 꽃 찾으러 왔다고 했는데 그러면 인화 꽃을 직접 찾아오라 그래. 그래서 나를 찾으러 오는데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으니까 그냥 걸어가도 남의 무릎도 밟아지고 발도 밟아지고 그랬어, 결국 나를 보듬고 가는데 나는 그때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어. 그냥 기분도 안 좋았는데 하도 신랑을 귀찮게 하니까 그래도 할 수 없이 따라갔지. 사람들이 나를 저 구석에다 숨겨뒀는데 너무 신랑을 힘들게 하니까 옆에서 막 쿡쿡 찌르더라고 얼른 가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갔어. 그러고 밤에 같이 가운데 앉혀놓고 별 짓거리를 다 시키지. 막 키스도 시키고 안으라고도 하고 장난시킨 사람들은 그렇게 시켜,

상경 비하인드 스토리

그 때 나 혼자 올라오려 그랬어. 증조할아버지도 못 가게하고 할아버지도 못 가게 했는데 내가 억지로 가려 그랬지. 그래도 서울에 작은할아버지 있으니까 올라오려 그랬지. 작은아버지 믿고. 내가 혼자 어떻게 오겠어. 그랬더니 증조할머니가 나 혼자 보내면 안 되겠으니까 보자기에 이불 싸고, 밥그릇 두 개 담고, 또 냄비 작은 것 하나 담고 머리에 이고 할아버지하고 같이 나왔더라고. 그래서 할아버지랑 같이 올라왔어. 증조할머니는 차까지만 배웅해주시고 다시 돌아가셨지.

조모님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

처녀 때 집에서 그냥 아무 근심 없이 살면서 친구들하고 재밌게 지낸 것 하고 또 가설극장 들어오면 그냥 동네 오빠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가설극장 보고, 또 명절 때는 사진 찍는다고 해남까지 친구들하고 나와서 놀고 그런 것이 재밌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좋았다 내가 그러지


잡지를 발행하며

노홍우.jpg

잡지를 발행하며 가족의 소중함 인식 및 결합력 강화라는 구술 프로젝트의 목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조모님이 해주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거 내가 태어나기 전의 가족에 대해 들여다보고 가상으로 체험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조모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 있으나 조모님이 기억하고 말씀해주신 내용은 우리 가족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에 녹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중 특히 아버지 형제와 우리 형제의 성장과정에 비슷한 점이 있었냐는 질문에 조모님께서 “똑같다. 증조할아버지에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형과 너 모두 같다.”는 답변을 듣고 우리 가족이 삶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이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오는구나 하는 깊은 가족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문득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우리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같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아버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아버지기 때문에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조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옛날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의 청춘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아버지에게도 이런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있었구나.” 같은 알지 못했던 내용을 알게 되어서 굉장히 뿌듯하고 보람찬 프로젝트였다.



결과물

파일:가족의 가족애(愛) 잡지.hwp


총 10페이지 분량 잡지.

노홍우 잡지 표지.jpg 노홍우2-1.PNG 노홍우2-2.PNG 노홍우2-3.PNG 노홍우2-4.PNG 노홍우2-5.PNG 노홍우2-6.PNG 노홍우2-7.PNG 노홍우2-8.PNG 노홍우 잡지 마지막장.PNG


영상자료


관련자료 접근 및 설명

노홍우 구글드라이브_프로젝트 관련자료 모음

구술채록은 기획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며 기획서는 목적, 구술자 선택 과정, 구술자 정보, 예비질문지 등이 담겨있다. 구술채록은 5월 25일, 6월 5일, 6월 7일 3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녹음과 녹화를 병행하였고 총 진행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정도이다.

구술채록을 통해 생산된 기록물로는 채록문(상세목록 포함), 녹음물, 녹화물, 면담일지가 있다. 구술 채록을 통해 생산된 기록 및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있어 생산된 모든 기록물은 채록자인 필자에 의해서만 관리되었으며 구술자 전용 폴더를 생성하여 관리하였다.

구술채록을 진행한 후에 구술자의 반응을 빠른 시간 내에 기술하기 위해 면담일지를 우선적으로 작성하였고 면담일지 작성 후에는 채록문을 작성하였다. 그 후에 다시 한번 읽어보며 상세목록을 기술하였다. 채록을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기록물이 전부 생산된 후에는 날짜별로 폴더를 만들어 녹음 자료, 촬영 자료, 채록문을 보존하였다.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한 자료들은 스토리텔링 폴더를 생성하여 스토리텔링 콘텐츠 기획서, 활용되는 사진, 결과물(잡지와 동영상)을 보존하였고 최종적으로 구글드라이브에 게재하여 자료에 안정성과 공유성을 더하는 등 나만의 질서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그에 맞게 보존, 관리하였다.


노홍우폴더1.PNG

구체적으로 구술채록이라는 폴더 안에 공개허가서, 스토리텔링 콘텐츠, 박순덕_20.05.25_노홍우, 박순덕_20.06.05_노홍우, 박순덕_20.06.07_노홍우 폴더로 구성되어 있고 기획서와 성찰보고서를 파일로 보존하였다. 공개허가서 폴더 안에는 공개허가서 양식과 구술자의 서명을 받은 파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토리텔링 콘텐츠 폴더는 잡지 폴더와 영상파일, 스토리텔링 콘텐츠 기획 파일로 구성되어 있다. 잡지 폴더는 잡지 결과물과 잡지 제작에 활용한 사진과 직접 제작한 표지 및 마지막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순덕_20.05.25_노홍우를 포함한 각 일자별 폴더는 면담일지, 채록문, 녹음물, 녹화물로 구성하여 관리 하고 있다.

이렇듯 보존된 기록을 집합적으로 기술 및 관리하여 맥락을 유지하였고 기록물을 크고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작고 구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연속체를 따라 점차적으로 관리하여 효율성 증가시키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