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자의 좌충우돌 생애기 - 엄마도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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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2일 (월) 23:45 판 (이후 현재인 40대 까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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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모든 부모님께 대한 감사의 말

아빠, 엄마가 미안하다... 근데 아빠, 엄마도 아빠, 엄마가 처음이잖니...,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성동일 대사 中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나갑니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어머님들의 눈에는 자식들이 아무리 컸다고 하더라도 한없이 여리고 약한 자식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식에 대하여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에 우리는 감사함을 느끼지만, 때로는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는 합니다.

오히려 '엄마 아빠는 나한테 왜 이럴까?', '엄마 아빠는 왜 나를 이해를 못해주지?'이런식으로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망을 들을 행동들은 결코 고의가 아닐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세월을 먼저 살아본 선배이자, 부모로서 조언을 한 것일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조언의 내용이나 방법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때문이지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장면 중에서 성동일이 딸에게 하는 문구가 생각납니다. '아빠, 엄마가 미안하다... 근데 아빠, 엄마도 아빠, 엄마가 처음이잖니...'

그렇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우리에게 대가 없는 아가페적 사랑을 처음부터 주신 것이 아니십니다. 엄마 아빠라는 첫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가끔은 부모님이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로 행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 이해를 하고 더욱 따뜻한 말 한마디로 보답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어머님들이 베푸는 아가페적 사랑은 매우 고귀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랑이지만

이러한 대가 없는 사랑에 무뎌지는 경우를 보고 있으면 마음 한켠이 아리기도 합니다.

당연한듯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 어머니도 누군가의 어여쁜 아들, 딸이었거나 진행형으로 누군가의 딸이기도 합니다.

쉽지 않은 이러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모든 어머님, 아버님들께 감사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박상현의 어머니이자 누군가의 딸인 '신숙자'


'신숙자'씨는 '박상현'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기도 합니다. 즉 아가페적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고마운 어머니의 입장이 아닌 받는 입장이기도 하셨다는 뜻이지요.

비록 지금은 자식들에게 아가페적 사랑으로 헌신하는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계시지만 이러한 사랑을 받는 우리라도 어머니들의 삶이 '어머니'의 틀을 깬 한 인격체의 삶, 즉 박상현의 어머니가 아닌 '신숙자'로서의 삶에 대하여

들여다 보고 기억을 하고자 합니다. 신숙자씨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어머니는 엄마 이전에 한명의 사람이었고, 인격체이며,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가슴 한켠에 기억해놓으시길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신숙자의 고향

여러분들은 전라북도에 위치한 지역인‘고창’이라는 지역을 알고 있는가요? 전라북도 고창군은 전라북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선운산이라는 산으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이곳에 위치한 선운사에는 겨울에는 천년기념물로 지정이 된 동백꽃 숲, 여름부터 가을은‘상사화(相思花)’ 즉 사랑의 고통을 상징하는 꽃인 꽃무릇이 절경을 이루는 장소로 유명하며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선운사는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서정주 시인이 살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속하는 고창 고인돌유적이 있으며

우리나라 읍성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축에 속하여 산책코스로도 이용될 정도로 가치가 높은 고창읍성 또한 이곳에 위치하지요.

더불어 이 지역은 복분자와 장어가 특산물로, 정기의 상징인 음식들이 특산물인 만큼 지역 자체가 굉장히 힘차고 활력이 도는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특산물인 청보리는 고창의 여름 특산물로, 드넓은 청보리밭에서 생산되는 청보리가 특산물이라면 청보리밭은 관광 콘텐츠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제가 왜 고창에 대하여 물어보고 설명을 하였을까요?

바로 필자의 어머니 ‘신숙자’씨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어머니이신 신숙자씨는 고창 중에서 선운사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지역인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의 용흥부락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용흥부락은 비록 시골이지만 선운산IC에서 자차로 5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접근성이 나쁘지 않은 한적한 시골마을로 예전에는 매우 정겨운 시골 농촌마을의 모습이었지만

지리적 특성 탓에 골프장과 복분자 관련 공장들, 별장이나 팬션단지들이 들어서고 있어 정작 원주민들은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향의 개발들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신숙자씨는 개발로 인하여 변경이 되는 고향의 모습이 새롭기는 하지만, 정겨운 마을의 모습이 사라지고

기존의 원주민들이 떠나감에 의하여 어릴 때 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어 고향에 갈 때에 반겨주는 사람이 적어지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신숙자의 유년기 시절

신숙자씨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에 위치한 작고 한적한 마을인 용흥부락에서 태어났으며, 2남 3녀중 차녀이자 셋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위로는 큰외삼촌, 큰이모 2명이며 아래로는 작은삼촌, 막내이모 이렇게 남매가 구성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숙자씨는 유년기 시절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년기에 너무 힘든탓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하는지는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지만, 어찌됐든 기억을 잘 못하시고 외할아버지인 '신만균씨'께 들은 유년기 시절에 대한 내용으로나마 기억을 하고 계신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릴 적에는 사진기라는 물건을 몰랐다가 학창시절에 가서야 아셨을 만큼 사진조차 한장이 없어 추억을 회상하기도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신숙자씨가 어렸을때 어머니이신 외할머니가 다섯째인 막내이모 '신경숙'씨를 출산하시다 돌아가시게 되셨고 너무 어린 나이라 현재까지도 어머니의 성함, 즉 외할머니의 성함이 가물가물 하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외할아버지 혼자 육아에 전념하셔서 5남매를 기르셨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 혼자 육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큰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은 어렸을 때 부터 외할아버지를 도와 농사에 전념을 하였고

신숙자씨는 큰이모와 함께 6~7살의 어린 나이 부터 살림을 도맡으셔서 매우 힘든 유년 시간을 지내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울다가 갑자기 운다고 외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으시곤 집 밖에 쫒겨나 더욱 서럽게 우셨다고 하시는데

이때의 기억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하십니다. 또한 외할아버지 혼자 5남매를 모두 기르시는 사정상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였으며, 한적한 시골이라는 특성 때문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누리고 사는 여러가지의 문명의 이기를 접하시지 못하고

사신 모습 또한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접한 쫀드기와 같은 불량식품은 너무 신기하고 맛있어서 눈에 아른아른 거렸다고 하십니다. 경제적, 지리적 형편 때문에 간식거리도 산을 뛰놀며 칡이나 나물, 열매들을 따서 먹는게 일상인

생활 속에서 이러한 인공적인 맛은 그야말로 혁명으로 다가온 셈이지요. 이러한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년생활은 지금도 여쭈어보면 별로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하시고, 말을 해주시지 않는 모습을 보이시곤 합니다.

신숙자의 학창시절

신숙자씨의 시련은 유년기에서 끝나지 않고 학창시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운명의 장난일까... 신은 정녕 없는 것인가...

가난하고 힘든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밝게 지내려 노력하는 신숙자씨에게 갑작스러운 병마가 찾아오게 됩니다. 신숙자씨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갑자기 힘이 빠져 매우 축 쳐지고, 몸 곳곳에 극심한 통증이 생기는 등의 여러 증상들이 지속되었지만 가난한 가정 형편과, 한적한 시골마을이라는 거리적인 제약에 의하여 병원을 가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게 됩니다.

증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심한 몸살인가보다 라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냥 넘기거나 엄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증상이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는 끙끙 앓다가 신음을 토해내시는 어머니를 자꾸 앓는 소리를 낸다고

되려 꾸짖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계속해서 지속이 되고, 일상생활 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러 대학병원과 같은 큰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게 되었고, 여기서 당시에는 생소한 병명인 '갑상선 항진증'이라는

질병의 판정을 받게 됩니다. 오래 방치한 탓인지는 몰라도 꽤 심각하게 진행이 된 상태였고 이로 인하여 성장에도 문제가 생겨 성장판이 닫히는 등의 문제점도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심한 몸 상태에 의하여 학교를 몇주 씩 못나가기도 하는등의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작성자인 '박상현'도 선천적인 갑상선 질병인 '하시모토 갑상선염'을 앓고 있는데 모체 유전으로 인하여 발병하는 질병의 특성상 신숙자씨는 이 질병이 자기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자책하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가끔 작성자인 '박상현'은 이러한 신숙자씨의 모습이 안쓰럽고 이러한 자신의 원망이 담긴 생각을 신숙자씨가 더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곤 합니다.

이처럼 신숙자씨는 매우 어려운 학창시절을 지내셨던 관계로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이때의 기억을 다시 회상하기를 꺼려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십니다. 경제적인 여건과 병마와의 싸움에서 오는 고통속에서

그래도 이를 이겨내고 견뎌내신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스럽고 감사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신숙자씨의 학창시절은 학교를 자주 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진이 별로 없었고, 이 마저도 이사를 다니다 분실을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진이 있었던 이사 전의 경우에도 앨범을 보여달라고 해도 한번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20대 시절의 모습부터 보여주시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어릴적의 힘든 기억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끔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외할아버지가 자신과 남매들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길러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을 최대한 밝고 즐겁게 이겨냈다고 합니다.


신숙자의 20대 시절

신숙자씨는 위에서와 같이 매우 힘들고 고달픈 학창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자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비싼 학비가 필요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상경을 하여 취직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핸드폰 제조 관련 회사에 취업을 하신 신숙자씨는 고향인 고창과 서울을 오가며 일을 하였으며, 돈이 모이는 족족 외할아버지께 용돈으로 드리는 생활을 반복하며 생계에 큰 보탬이 됨에 보람을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에서 작성자의 아버지이신 '박한일'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외모를 보고 매우 무서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을 하셨다고 하는데, 점점 이야기를 해보고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호감으로 발전을 하게 되어서 연애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데이트 비용은 신숙자씨가 거의 대부분을 담당할 정도로 박한일씨에게 푹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는데

그 당시 작성자의 아버지이신 박한일씨는 버는 월급의 대부분을 박한일씨의 어머니께서 관리를 하고 일부분만을 용돈으로 지급하는 형식으로 돈을 대신 관리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신숙자씨와 박한일씨의 말에 의하면

그 용돈이 월급에 비하여 턱도 없이 작았는데,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만원정도의 교통비를 제외하면 밥도 제 끼니마다 먹지 못하는 수준의 용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용돈을 쓰는 박한일씨를 보면서

신숙자씨는 박한일씨가 몹시 가난한 집 아들로 오해를 하였고, 결혼 결심이 어러번 들 정도로 열렬히 사랑을 하였지만,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에 몇차례 망설였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렇게 결혼의 현실과 이상 속에서 계속하여 고민을 하던 신숙자씨는 고심끝에 결혼은 현실이지만 힘을 합하면 어떠한 난관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꺼야 라는 생각으로 그 당시에는 당연시 되는 남자의 프로포즈를 받는 형식이 아닌

신숙자씨의 결혼 고백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둘은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알고보니 박한일씨가 동화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과 같은

또는 소위 요즘 말로 말하는 이른바 '금수저'인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월,화 또는 수,목 드라마에 나오는 백마탄 왕자님 스토리의 드라마 전개이지만, 이런 드라마에는 한가지 시련이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이 고난은 멀지않아 찾아오게 됩니다. 박한일씨의 어머니이시자 작성자의 할머니이신 '라금덕'씨에 의하여 이 고난의 날이 다가오게 됩니다.

라금덕씨는 신숙자씨와 박한일씨의 결혼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비록 결혼을 반대하거나 쫒아낸다던가 이런 드라마에서 나오는 극적인 연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제외하면 아무 돈도 지원을 해 주지 않았으며 이러한 원인으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부부생활을 시작한 관계로 모아놓은 돈이 턱없이 부족했던 신숙자씨와 박한일씨의 신혼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숙자씨는 작성자인 '박상현'을 임신을 하게 되었고 심각한 임신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보통 임신을 하게 되면 특정한 먹을 것이 당긴다고 많이들 하는데, 신숙자씨의 경우에는 임신중독이 너무 심하여 당기기는 커녕

음식을 입에도 대지 못하고 구역질만 반복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40키로대의 몸무게가 82키로로 갑자기 불어나는 등의 심각한 임신 중독증에 시달리던 신숙자씨는 결국 조기 분만을 하게 됩니다.

이후 작성자인 '박상현'이 9개월이 조금 안되는 시점에 미숙아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때 박상현의 몸무게는 2.3키로에 불구할 정도로 매우 연약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신숙자씨는 출산 후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시고 육아에 전념하게 됩니다.

육아에 노력을 쏟은 끝내 박상현은 건강하게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50일이 조금 넘은 시점에 갑자기 황달을 앓게 되고 그 이후로 상태가 매우 나빠지게 됩니다. 놀란 신숙자씨는 병원에 박상현을 데리고 황급히 가보지만

100일을 넘기기 힘들고, 넘긴다 하더라도 첫 돌 전에는 마음의 준비를 무조건 해야한다는 사실상 자식의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후 신숙자씨의 가정은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으며, 가까스로 박상현이 허약한 상태로 100일을 넘기자

돐잔치는 못해주더라도 100일잔치만은 성대하게 해주자라는 생각에 왠만한 돌잔치보다도 크게 열었다는 지금이야 웃지만 그 당시에는 웃지 못할 부모님의 가슴을 찢어놓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지만 100일이 지난 뒤에 점점 박상현은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첫 돌이 다가가게 되었을 시점에는 정말 기적이라는 단어가 적합하게 건강하게 자랐으며, 걸음마도 또래에 비하여 빨리 시작하였을 정도로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신숙자씨는 육아에 더욱

전념하였으며, 3년뒤 작성자의 동생인 '박상민'을 출산하게 됩니다. 이렇게 희노애락이 가득한 신숙자씨의 20대가 지나가게 되었으며, 육아에 전념하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신숙자씨와 박한일씨 부부를 본 작성자의 할머니 라금덕씨는 점점

마음을 열게 되어 경제적인 부분을 지원해주기 시작하였고, 박한일씨의 경우에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가까워지게 되며 안정적인 가정의 생활이 시작이 되고, 아름다운 청춘인 20대가 저물어가게 됩니다.

신숙자의 30대 시절

매우 힘든 고비와 슬픔이 있었지만, 자식을 얻은 기쁨 또한 있었던 꽃다운 청춘의 20대가 저물고 신숙자씨의 30대가 시작되었습니다.

30대가 되자, 어느새인가 초등학생 아들을 육아하는 것에 종사중인 아줌마가 되어 있는 모습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신숙자씨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비록 20대시절의 힘든 시절을 이겨냈지만

자신은 초등학교에 재학중인 아들과 유치원생인 아들을 기르고 있는 반면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이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이 당시에는 너무나도 부러웠다고 합니다.

'나는 출산을 하느라 골반이 다 뒤틀리고 살은 늘어졌으며, 외국조차 한번도 나가보지 못했는데....' 라는 회의감이 들었던 시절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매우 많은 수준이 아니라 대다수를 차지했고

이 친구들은 신숙자씨를 만날 때 마다 무용담처럼 해외여행을 다녀온 경험, 캠핑을 간 기억, 최근에 개봉한 핫한 영화를 본 내용, 비싸고 이쁜 옷들과 명품백과 같은 사치품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는 등의 자랑을 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이 자랑을 들을 때 마다 신숙자씨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신숙자씨는 또래의 친구들이 하이힐을 신을 때, 육아에 편리한 운동화를 꺾어 신고 있었고, 또래의 친구들이 명품백을 차고 다닐 때 장바구니를 들고 다녔으며

또래의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자랑할 때, 자식들이 좋아하는 놀이공원에 데려가 놀이기구를 태워주느라 본인은 타지도 못하고 다리가 아픈데도 하염없이 서있어야 했던 모습이 스쳐가며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라는 생각에 자주 잠겼다고 합니다.

아마 대다수의 일찍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이라면 공감 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친구들은 화려하고 재미있게 보내는 반면에, 자식을 기르느라 몸은 고되고, 꼴은 꾀죄죄하며, 비교되는 일상에 의하여 초라해지는 고민을 쉽게 겪을것입니다.

이러한 우울감에 빠진 신숙자씨는 솔직히 자식얼굴을 보면 그런 마음 다 없어진다는 말은 그 당시에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딸린 자식이 있기 때문에 견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식들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자라는

책임감을 원동력으로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후 30대 중후반에 접어들게 되어 첫째이자 이 글의 작성자인 박상현은 중, 고등학생이 되었고 동생인 박상민도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이 되어가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게 되었으며

결혼을 대다수 하지 않았던 30대 초반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친구들이 결혼을 막 하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고, 30대에 흥청망청 사용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고생을 하는 것을 보시고는

'아 그래도 애를 빨리 기르고 돈을 착실히 모아 남들보다 빠르게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십니다. 이후 신숙자씨는 자식들이 어느정도 성장을 하여 집에 혼자 있어도 되거나, 여행을 같이 다녀도

관심사가 겹친다는 장점을 통하여, 그 당시의 가장 핫했지만 비용이 비싸서 잘 하지 못하던 취미인 캠핑에 도전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캠핑장비만 외제차값을 넘길 정도로 보유하고 있는 프로 캠퍼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이처럼 취미활동도 즐기면서 행복한 나날들만 보내는 듯 했던 인생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며 30대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현재인 40대 까지의 삶

20대의 고비와 30대의 회의감을 모두 이겨내고 즐거운 나날만 계속될 줄 알았던 와중에 신숙자씨의 30대는 막이 내리고 대망의 40대가 시작되게 됩니다.

신숙자씨가 40대가 되자 첫 아들이자 작성자인 '박상현'의 대입시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박상현은 강남 8학군의 고등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담임상담때에도 소위 sky라 부르는 최상위는 힘들어도 바로 밑 등급의 학교정도는

갈 수 있을것 이라고 상담 결과를 들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상현에게는 공부가 아닌 다른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부보다 두각을 더 뛰어나게 들어내던 음악분야, 그 중에서도 피아노과에 진학을 원하고 있었으며

중학교 시절부터 예대를 보내달라신숙자씨에게 요구를 할 정도로 의지가 견고했습니다. 하지만 신숙자씨는 잠깐 지나가는 사춘기의 반항이라 생각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넘기게 되었고

고3이 되자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첫 아들인 박상현이 돌연 고등학교 자퇴를 선언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자퇴 요구에 신숙자씨는 크게 당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담임선생님에게도 연락을 하여 혹시 아들의 반항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 여쭈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담임선생님도 처음 듣는 얘기이고 당황스럽다는 대답 뿐이었습니다.

박상현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음대를 진학할 수 있게 도움을 주거나, 아니면 자퇴를 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반응에 신숙자씨는 크게 당황을 하게 되고, 이리 저리 자문을 구하러 다니게 됩니다.

첫 번째 자문은 작성자의 할머니이자 신숙자씨의 시어머니인 '라금덕'씨에게 자문을 얻게 됩니다. 그러자 라금덕씨는 '우리 집안에 딴따라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전하라 하셨고, 신숙자씨는 이러한 입장을 박상현에게 전하지만 오히려 반항만 심해지게 됩니다.

박상현은 공부에 아얘 손을 놓게 되었고, 전교권이던 성적은 중하위권까지 곤두박질 치게 됩니다. 신숙자씨는 매일같이 그냥 꿈을 밀어주자는 남편인 박한일씨와 의견 대립 및 싸움을 이어가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인 박상현과 의견대립이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박상현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게 되었으며, 결국 100위권을 돌파하여 담임상담을 진행할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이 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님이 없다는 말 처럼 신숙자씨는 한 발짝 물러서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단 자식의 철없는 행동 하나로

자식이 어려워 질 미래가 두려웠던 신숙자씨는 한가지 조건을 걸고 아들과의 협상을 진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서울의 유일한 음악교육과인 '건국대학교 피아노과'에 합격을 한다는 조건 하에 음대에 진학을 시켜준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곤두박질을 친 박상현의 성적으로는 아무리 실기를 잘 봐도 어림이 없었으며, 결국 신숙자씨가 쓰는 대학교를 아무 반항 없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도 서울소재의 대학교인 한성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한 숨 놓게 된

신숙자씨는 이제 전쟁은 끝났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습니다. 박상현이 대학 입학과 동시에 반항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학 공부는 뒷전이고 피아노 활동에만 매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숙자씨의 속은 타들어갔습니다.

피아노 활동을 하는 박상현을 보면서 신숙자씨는 결국 참고 또 참은 뒤에 박상현을 타이르게 됩니다. '정말 너가 너무 하고 싶은 이 길이 확실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더이상 말리지 않으마. 한번 해봐' 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지요.

이 제안에 신이 난 박상현은 매우 소중한 대학교 1학년 새내기시절은 뒷전이고 반수에 올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수를 하면 할수록, 시간이 갈 수록 철이 들었던 것일까요? 박상현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박상현은 피아노과를 나와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라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반수를 통하여 음대 합격에 성공하지만 이 조차도 포기하고, 대학생활도 일시적으로 도망치듯 휴학을 하게 됩니다.

박상현의 현실과 이상에 대한 고민은 날이 갈 수록 깊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을 도피하기 위하여 어느 기업의 직영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주구장창 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신숙자씨는 아들이 혹여나 잘못될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진행하던 박상현은 이 길이 적성이다를 발견하게 되었고, 열심히 일한 끝에 졸업 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아르바이트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까지 받게 되었으며, 뚜렷한 목표가 생긴 박상현은 학교를 복학하게 되었고

신숙자씨의 고민은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둘째 아들의 대입이 다가왔지만, 둘째 아들인 '박상민'은 마찰 없이 대입을 마치게 되었고, 2020년 40대의 끝을 바라보는 신숙자씨는 자식농사를 성인까지 일구어 놓은 보람을 느끼며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앞날은 신숙자씨도 작성자인 박상현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이겨내고 극복해나가면 다시 좋은 날이 반복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겠지만 될 수 있으면 즐거운 날이 더 많은 인생을 즐기는 신숙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상현'의 엄마이자 '신만균'의 딸로서

지금까지 신숙자씨의 삶의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생애를 살펴보면 학창시절 이후로는 '박상현'이라는 대상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후반에 가서는 '박상현'의 이야기인지 '신숙자'씨의 이야기인지 헷갈릴 수준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데

저는 이 이유가 '신숙자'씨의 삶의 대부분이 이미 '박상현'이라는 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 말고도 '신숙자'라는 하나의 인격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부분이 매우 많았습니다.

신숙자씨가 아닌 다른 부모님들도 이러한 이야기를 진행을 하다 보면 분명 자식이 인생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이야기 속에서 부모님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또는 누군가의 아들, 딸로서의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점은 알아서 어따쓰게? 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일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의 어머니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바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관심이 없는 우리의 부모님이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었다는,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삶이 있었다는 점 이것 하나만큼은 반드시 영원히 기억을 하고 감사함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숙자씨의 이야기를 진행함에 따라 '박상현'의 엄마가 아닌 '신만균'의 딸이라는 기억의 어머니에 대하여 알게 되는 뜻 깊은 경험이었으며, 이러한 경험이 여러분께도 공유가 되었으면 하면서 이 글을 남깁니다.

끝으로

저는 지금까지 신숙자씨의 일생을 통하여 부모님도 어느 한 가정의 귀한 자녀였으며, 부모님의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되물림 받아 우리에게 헌정을 해주시는 만큼 감사함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여러번 고여 마음을 진정 시키며 글을 작성하였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이 글의 제목의 부제인 '엄마도 사람이야!'라는 문구는 엄마, 즉 신숙자씨가 작성자에게 말하는 내용이 아닌 작성자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외치고 있는 내용으로 작성한 부제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방대하고 마르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을 끊임없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을 양분삼아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이러한 대가없이 주는 사랑은 과연 주는 사람에게도 대가가 없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동안에 리스크는 계속하여 발생될 것입니다. 감정적인 면일지, 물리적이나 금전적인 면일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리스크는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리스크는 우리가 느끼기가 힘듭니다. 부모님이 방패막, 또는 방파제가 되어 리스크라는 파도를 온몸으로 막으시면서 사랑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상처받고 힘든 와중에도 우리에게 사랑을 계속하여 베풀고 계시는 겁니다. 부모님들이 이러한 사랑을 계속하여 주시기만 한다고 사랑만을 받는 행위는 저는 너무 이기적인 행위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끔은 등을 보이지 않고 온몸으로 리스크를 받아내며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의 등을 바라볼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분명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엉망징창인 경우가 대다수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여러분들의 상처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과, 사랑해요 부모님 한마디면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치유가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원동력보다 더한 원동력은 바로 자식의 사랑이라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분명 어머니 아버지께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오그라들어서 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 또한 지금 갑자기 남이 시키면

매우 오그라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 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이겨내고 부모님을 꼭 껴앉고 '엄마 사랑해요', 내지는 '아빠 사랑해요' 한마디를 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여러분의 이 한마디가 부모님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삶의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언젠가는 한번쯤 저의 어머니도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신숙자씨... 엄마! 사랑해요! 평소에 잘 말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요!, ♡신숙자를 사랑하는 아들 박상현♡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센스(CCL)

박상현에 의해 작성된 신숙자의 좌충우돌 생애기 - 엄마도 사람이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 (CC BY-NC-SA)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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