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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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1514054)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9일 (월) 00: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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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정승자(김상엽 엄마)는 1955년 10월 28일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에 3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앞에는 서해 바다가 보이고 밀물과 썰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었다.

그 아름다운 바다는 밀물이 들어왔을 때, 햇볕과 함께 반짝이는 물결이 너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집 뒷 쪽으로는 뒷동산이 있어서 친구들과 뛰어 놀기에 아주 좋았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3, 4살 때 또렷한 기억이 있는데 우리 동네에 감나무가 많았는데 감꽃이 필 때면 엄마의 할아버지께서 아침 일찍 감나무 밑에 하얀 감꽃이 수북이 쌓였을 때,

할아버지께서 감꽃을 주워 오셔서 실로 하나하나 꿰어서 엄마의 몫에 걸어주셨다고 한다.

첫째라서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은 우리 엄마는 그 이후에 동생들이 태어나고 저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일하러 들판에 가시면 동생들을 엎고 많이 돌봐줬다.

8살 때는 면소재지에 있는 미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 시절에는 각기 동네마다 다 같이 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는데 저희 엄마 동네가 가장 커서, 학생들이 줄을 서면 제일 길게 서 있었다고 한다.

엄마 추억 속의 초등학교는 굉장히 컸는데, 결혼하고 20년 후에 엄마 친구들과 여행 겸 학교를 찾았는데 어렸을 적 컸던걸로 기억하는 학교는 아니고 아름다운 미술관 같은 학교였다.

그 학교를 오랜만에 보니 옛 추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저희 엄마는 저희 엄마의 고모님이 서울에 계셔서 서울로 올라가 서울에 있는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중 고등학교를 졸업 후 직장(회사 경리) 생활을 하시고 엄마 동생들(이모, 외삼촌)도 서울로 와서 학교를 다녔는데, 엄마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

아빠와의 만남, 두 딸 아이를 출산

그렇게 생활하다가 서울 사람인 아빠를 중매 반, 연애 반으로 만나서 1979년 엄마 25살, 아빠 30살의 나이에 서울 퇴계로 서울행복예식장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시부모님과 아주버님, 손윗동서, 시누이들과 함께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6개월 정도 살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과수원 농사를 하기 위해, 분가하여 김포군 계양면 박촌리(현재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박촌동)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엄마가 처음 박촌으로 이사갔을 때는 버스도 1시간에 1대 씩 다녔고

그 동네가 아내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사는 동네라고 소문이 났는데 그 만큼 비가 많이 오면 땅이 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다음 해인, 1980년 2월 첫째 아이(딸) 김지선을 출산했다.

막상 아빠께서 서울 사람이고 과수원 농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엄마는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엄마는 젊은 시절에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앙고라 토끼도 키우시고 포도나무도 가꾼 적 있으며,

호박 농사를 많이 해서 부평의 깡시장 노점상에서 호박을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1982년 2월, 둘째 아이(딸) 김지은을 낳았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박촌리가 인천직할시로 편입이 되면서,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그 동안의 농촌 마을이 도시로 점점 변했다고 한다.

셋째 늦둥이를 임신하다

거기서 살 때 시골이라 그 윗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집에 놀러 오시면 누나들도 돌봐주시고 하셨는데 항상 엄마한테 하시는 말씀이 꼭 아들 하나 낳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께서는 아들이 없으셔서 따님 집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 당시 엄마는 자식을 더 낳을 생각이 없었으나 할머니의 말씀에 그냥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현재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만수동으로 이사온 뒤는 모든 일을 접고 가정 살림만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94년 겨울, 엄마가 태몽을 꾸고 다른 사람들도 엄마 태몽 꿈을 꾸셨다고 전화를 주셨다고 한다.

그 때 엄마 나이가 40이었는데 엄마 친구랑 약국에 가서 임신 테스기를 사서 검사해보니깐 임신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한테 말씀드렸더니 아빠께서는 나이가 많아 낳지 말자고 하셨는데, 누나들이랑 엄마가 그냥 임신했으니깐 딸이라도 더 하나 낳겠다고 해가지고 아이를 낳기로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건강에 이상이 없으셔서 임신 몇 개월 뒤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나이가 많으신데,

아기한테 이상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늦게 병원에 오셨냐고 꾸중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께서는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여러 가지 검사를 다 했는데 다행히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의사 선생님께서 병원에 오라는 날짜에 꼬박꼬박 다니셨다고 한다.

그리고 임신 6개월 쯤 됐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엄마께 넌지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임을 암시해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1995년 8월 27일 진통 끝에 수술을 해가지고 아들(김상엽)을 낳았다고 한다.

손자 보는 재미로

엄마는 그 이후 아들 키우기에 전념을 했다고 한다.

엄마께서는 저를 열심히 키우면서 저를 많이 이뻐해주셨다고 한다.

그 이후 엄마는 누나들도 뒷바라지하면서 누나들도 결혼시켰고, 지금은 가족들을 위해 매일 기도를 하시고 엄마 친구 분들과 자주 만나 여행도 다니시며 생활 하시는데,

5년 전 둘째 딸(김지은)이 손자를 출산했는데 요즘은 그 손자가 너무 귀여워서 매일같이 손자와 화상통화를 하는 것이 삶의 기쁨이라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특히 코로나19 때문에 여행도 못 가셔서 손자와의 통화를 더 자주하신다.

엄마는 제가 열심히 공부도 하고 미래를 위해 잘 준비하고 조그마한 것이나마 남을 배려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한다.

엄마는 저에게 젊었을 때는 인생이 긴 줄 알았는데 엄마도 어느덧 70이 가까워지면서 인생이 정말 짧다고 말씀하시면서 젊었을 때 시간을 아끼고,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말씀을 하시고 엄마는 별로 바라는게 없고 지금처럼 변함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는게 소원이라고 말씀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