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성동현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2일 (월) 23:25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구술자 소개

심규금 1962년 부산 태생으로 삼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졸업 이후 26세의 나이로 결혼하여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세살배기 손자를 돌보기 위해 최근 서울시로 이사를 왔으며 손자를 양육하는 일상이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즐겁다고 한다. 유투브를 보며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곤 하는데 언제나 훌륭한 맛으로 가족들을 즐겁게 한다. 급하지 않고 유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그런 사람이 화가 났을 때 더 무서운 법이다.


들어가며



언제나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것 같아.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르게 살 거야.



2020년 6월 8일 서울시 성북구의 자택에서 가진 면담을 시작하며, 어머니는 자신의 삶이 후회된다고 하셨다.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왔던 삶이었다며 눈가의 주름을 작게 떠셨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 더 잘할 수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며 나지막이 내뱉는 한숨에는 자신이 놓쳐버린 삶의 기회에 대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하고픈 것도, 해야할 것도 없었다

가정실습시간 중에서, 1977

나의 어머니, 심규금은 1962년 부산의 한 해안가 마을에서 삼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조부모님의 사이는 좋지 않아서 가정의 분위기는 늘 험악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뜻대로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했고, 할머니도 할아버지와의 결혼생활에서 받은 상처를 모진 말로 어머니에게 풀어냈다. 말대꾸 한 마디에 나무로 된 막대기가 종아리에 날아오는 상황에서 반항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라는 걸 하고, 하지 말라는 걸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공부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조부모님은 어머니가 그저 시집만 잘 갔으면 하는 바램뿐, 어머니의 향후 진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성적은 늘 공부를 잘하는 자신의 오빠와 비교를 당해 공부할 의욕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창피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공부를 하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마을 한 구석에 있는 책방에서 만화를 읽었다. 학교가 끝나고 책방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만화를 한 장씩 넘기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고위 공무원이신 할아버지 덕분에 집안의 경제적 형편은 썩 넉넉한 편이어서 당시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소일거리라도 해야 했던 주변 친구들에 비해 돈을 벌만한 일을 찾아 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래서 일상은 늘 한결 같았고, 집과 학교와 책방으로 이루어진 생활반경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어머니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뒤늦게 생긴 교사의 꿈을 이루기에는 부족한 성적이었다. 어머니는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야 한다는 조부모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고, 그 중에서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가정대의 식품영양학과에 진학했다.

어느새 엄마, 어느새 주부

결혼사진, 1988
어머니와 장녀, 1997

부산대학교 식품영양학과의 4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 당시 여자들이 모두 그러했듯, 취직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졸업을 한 후 2년 간은 그저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마침 교제하던 대학 선배가 취직을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었고 1년 뒤 아이를 가지게 되며 전업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업주부로서 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7시쯤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차리고, 남편의 출근을 준비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저녁식사를 마지막 일과로 9시 반에서 10시쯤 잠자리에 드는 나날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다지 재미있는 일도 아니었다. 삶에는 낙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는 TV를 보며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거나 윗집 권사님 댁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시댁은 극성맞기 그지 없어서 명절날 경상남도 진주의 시댁으로 가는 길이 가장 괴로웠다. 언제나 남편 뒷바라지를 못한다며 꾸중을 듣고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제사 준비를 하다 고된 몸을 이끌고 서울로 귀성해야 했다.


부모로서의 삶은 처음에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가 태어나 육아를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손도 대지 않았다. 혼자 두 시간마다 일어나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빨아서 다시 입히는 나날이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거실 구석에서 조용히 울었다. 둘째를 가질 때부터는 조금 익숙해졌고, 셋째를 키울 때는 수월하게 육아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고부터는 부모로서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 혼자만의 시간을 보다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전업주부로, 엄마로 사는 것은 이따금 큰 회한을 안겨주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상의 없이 있는 돈을 모두 끌어다 주식에 투자하고는 어머니에게 와서 큰 손해를 본 것을 말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도 있을뿐더러 이혼 후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크게 따질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사범대학에 진학했어야 한다며 후회했지만 가사 일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직업을 가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제일 서글펐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체감할 때마다 어머니는 베란다에 가서 조용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럼 기분이 좀 나아졌다.

쉰이 넘어 마주한 사회

나이가 쉰이 넘어 아이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낸 후, 부모로서의 역할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럴 때 자기 주변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전문성 또한 자기에겐 없다고 생각해서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교회의 사모님의 지역 아동센터의 학습도우미 일을 권유를 받아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학습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영어 교과서와 참고서를 두고 이미 잊어버린 교과과정을 공부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중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후 장애학교의 선생님으로 제의를 받아 오전에는 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공부를 돕고, 오후에는 장애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학교의 아이들은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종이 접기도 하고, 동요도 부르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그저 아이들과 조금이나마 소통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했고, 행복을 느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건강에 대한 감사함과 같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자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어머니는 자신이 주부로서의 경력을 살려 맞벌이 부부의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두 아이 중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는 굉장히 폭력적이어서 애를 많이 썩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도 어머니를 편하게 대하고 남자아이의 폭력적 성향도 점차 나아지며 보람을 느꼈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을 해내고 그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힘든 일, 즐거운 일을 겪으며 절망도 느끼고 행복도 느꼈다. 늘 전업주부로 살며 남편에 의존하며 살아왔기에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껴왔지만, 아동센터의 선생님을 시발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전업주부, 부모가 아닌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맡으며 자신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머니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긍정적으로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니는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뭐야,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진작할 걸."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면담을 마치며 어머니는 후련한 모습이었다. 입가에 걸린 작은 웃음은 썩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면담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최근 자신의 삶의 행보가 썩 맘에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전의 어머니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는 것처럼 인생을 좀 더 긍정적으로 살지 못한 것을 이따금 후회하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순히 후회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업주부와 부모의 삶에서 더 다양하고 새로운 자신을 찾았다. 어머니는 즐거운 얼굴로 TV 드라마를 마저 보러 가셨다.


면담을 하며 어머니는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와 같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남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대해 변명하거나 치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내셨다. 그건 분명히 스스로의 삶에 자신을 가진 이들만 할 수 있는 일이리라. 그 모습은 아들인 내가 보기에, 어제가 내일인 일상 속에 자신을 박제했던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분명히 변화하셨다. 더 나은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