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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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강희안(姜希顔)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그의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리지 않은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인물 내용

강희안은 지돈녕부사를 지낸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형이며, 이모부가 세종대왕이다. 이름난 농학자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와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세종 대에 안견(安堅), 최경(崔涇)과 함께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시‧서‧화)로 불렸다.시는 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가를 들었다.


1438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사섬서주부(司贍署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이조정랑‧부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444년 신숙주 등과 같이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했으며, 1445년 최항 등과 더불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해하였다. 1447년 이조정랑이 되어 최항성삼문이개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에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이 해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사은부사(辭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무고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462년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146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가 1464년 겨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1455년에 주조한 활자인 「을해자」의 원본을 써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였다. 꽃과 나무의 재배와 이용에 관하여 서술한 농업서인 「양화소록」을 저술하여 원예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화가로서의 창작활동을 즐겨했다. 그는 먹으로 작은 경치그림을 그리기 좋아하였으며 벌레, 새, 꽃과 나무, 인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품으로는 <미인도>, <매미>, <대나무>, <밭갈이> 등이 있다. 하지만 "서화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다만 이름이 욕될 뿐이다."라고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 중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고사도교도>,<고사관수도>, <오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강호한거도> 등이 있다. 글씨로는「강지돈녕석덕묘표」와 「윤공간공형묘비」가 남아 있다.

인물 성격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여 말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하여 문아가 드높았다고 한다.

"맑은 의표 바라보니 의젓하고, 환한 기운 하나로 자연스럽게 모였네. 세상에 처함은 항상 졸한 것 같고, 몸 행동은 담담하여 신선 같네. 높은 재주 세 가지가 함께 뛰어나고, 
 아름다운 덕은 모두 허물이 없네. 담소하면 누가 창화하려나, 시를 지음에 눈물이 샘처럼 솟네."

라고 강희안에 대해 이석형(李石亨)이 읊었다.

관련 자료

사진 자료

  • 강희안의 대표 작품

양화소록.jpg

강희안 묘비명.jpg

영상 자료

  • 강희안 아카이브

문헌 자료

  • <도서> 강희안 평전

강희안 평전.jpg

작성자 및 기여자

디지털과 지식콘텐츠(2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작성자 한성현